< 225화 > 너 같으면 화가 안 나겠냐!? (6)
김민아는 월미도에 올 때와는 달리 아무 말 없이 얌전하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거나 가끔 창밖을 내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얼핏 보면 차분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희미하게 달아오른 뺨이나 가끔 '하아아..' 하고 흘러나오는 열기로 가득한 한숨은 안에서 성욕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덮쳐지는 건 아니겠지?'
최면도 풀지 않고 즐길 거 다 즐겨놓고 진심을 담아 호소해봤자 가증스럽게 보일 뿐이다.
모텔에 들어가면 우선 상황을 설명하고, 최면을 푼 뒤에 합의를 마쳐야 했다. 만약 실패한다면.. 수습할 방법은 생각해뒀지만 아마 김민아와 다시 만날 수는 없게 되리라.
이미 어떻게 대화를 풀어나갈지는 생각해뒀지만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내 긴장과는 별개로 이상하리만치 신호에 걸리지 않고, 차가 막히는 일도 없이 매끄럽게 이동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모텔 주차장 앞까지 도착한 뒤였다.
김민아는 이미 핸드폰도 주머니에 넣어놓고 다리를 달싹이며 내릴 준비까지 하고있는 탓에 시간을 끌지도 못하고 차를 세우고, 내리자마자 말없이 터벅터벅 걸어가 방을 잡고 그대로 방 안까지 들어와버렸다.
"하아.. 하아.."
철컥 하고 문이 닫힌 순간 김민아의 어깨가 작게 들썩이며 달뜬 숨이 흘러나온다. 그리고는 신발을 휙휙 벗어 던지고는 안으로 들어가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눈을 맞춰왔다.
"야아.. 나 이제 진짜 한계야.. 빨리이.."
벌써부터 애가 타는 목소리로 말하면서도 입고 있던 얇은 겉옷까지 바닥에 휙 던져버린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그대로 전부 벗어버리고 나한테 달려들어 내 옷까지 벗겨버릴 기세였기에 나도 급하게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와 옷을 벗으려는 김민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잠깐만."
"뭐, 뭐야."
그래도 아직 이성이 남아있는 상태라 내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움찔하면서 눈을 맞추고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진지하게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잠깐만 이리 와봐."
"뭔데에.. 꼭 지금 해야 하는 얘기야?"
"지금 해야 해. 조금만 참고 들어봐."
침대 위에서 얘기할까 하다가 마주 앉을 수 있는 테이블과 소파가 보이길래 그쪽으로 가서 앉았고, 김민아 역시 몸이 달아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순순히 따라와 맞은편에 앉았다.
"도대체 무슨 얘긴데? 지금 나 급한 거 알지? 빨리 말해."
다급함을 넘어 살짝 짜증기까지 섞인 목소리에 불안감이 느껴졌지만 어떻게 물꼬를 틀지는 이미 생각해뒀기에 짧게 심호흡하며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그동안 너한테 숨기고 있던 일이 있는데. 이젠 확실하게 밝혀야 할 것 같아서 그래. 들을 거지?"
"뭐, 뭐야. 쓸데없이 무게 잡고. 내가 화낼 만한 일이야?"
"엄청 화낼 일이야. 솔직히 칼로 찔려도 할 말 없는 일인데, 듣고 화내지 말란 말은 안 할 테니까 끝까지 듣고 어떻게 할지 결정하기만 해줘."
"..말해봐."
김민아도 내 태도가 진심이라는 걸 느꼈는지 살짝 긴장하면서도 한층 진지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일단.. 난 인간이 아니야."
"뭐..?"
뜬금없는 폭탄 발언.. 이라기보다는 개소리나 다름없는 발언에 김민아의 진지해졌던 표정이 순식간에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김민아가 제대로 이성을 찾고 무슨 장난질이냐고 따지기 전에 선수를 치고 몰아치듯 말을 덧붙였다.
"미친 소리 같겠지만 일단 들어봐. 인간이 아니라고는 해도 사실 인간이랑 별 차이도 없어. 몽마라고 들어봤어? 서큐버스나 인큐버스.. 그런 거."
김민아는 인터넷 방송을 보는 게 거의 유일한 취미라 이런 서브컬처에는 나름 빠삭하다. 서큐버스 같은 단어는 게임이나 만화, 소설, 심지어는 섹시한 여성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인 만큼 모를 리가 없었다.
"아니, 잠깐만.. 나 지금 급해 죽겠다니까 갑자기 왠.."
"나도 장난하는 거 아냐. 지금 바로 증거도 보여줄 수 있어. 보여주기 전에 네가 최대한 덜 혼란스럽게 미리 상황부터 정리해놓는 거야. 그냥 내가 소설 한 편 쓴다고 생각해도 괜찮으니까 들어봐. 몽마라고 들어 봤어?"
"..알긴 알지."
김민아의 말을 자르고 다시 한번 강하게 밀어붙이자 결국 마지못해 대답이 돌아왔다.
"네가 아는 몽마랑 어떻게 다를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몽마는 여자랑 성관계를 맺으면 정기를 얻을 수 있고, 정기를 이용해서 최면을 걸 수 있어."
"......"
김민아는 그냥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듯 어이없고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사실 유서연과 임예진이 이상한 거였지, 저게 정상적인 사람의 반응일 것이다.
"고시원에서 지내던 도중에 갑작스럽게 최면 능력을 얻었고, 얼마 없는 정기를 이용해서 최면을 걸고, 꾸준히 정기를 수급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지. 거기서 찾아낸 첫 번째 대상이 너야."
"그래서.. 뭐, 나한테 최면을 걸었다고..?"
"맞아."
김민아는 도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 어이없는 목소리로 되물었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내가 너한테 무슨 최면을 걸었는지는 지금 알려줄 거야. 나한테 말을 듣고 나면 굉장히 혼란스럽고, 화가 날 텐데. 그래도 일단 얘기를 끝까지 들어줬으면 해."
"..말해봐. 나한테 무슨 최면을 걸었는데?"
내 말을 믿는 게 아니라 어이가 없어서 어디 한 번 마음대로 해보라는 태도였지만 어쨌든 준비는 끝났다.
나답지 않게 긴장으로 쿵쿵 뛰어대는 심장 소리를 의식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번 생각해봐. 우리나라는 일단 성매매가 불법이잖아. 그런데 당당히 세금 내고 운영하는 고시원에서 성욕 해소 서비스 같은 걸 운영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것도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고, 예쁠지 못생길지도 모르는 총무한테 시켜서. 그리고, 고시원에 혼자 사는 남자가 얼마나 많았는데 나 말고는 서비스를 이용한 사람도 없었잖아. 너 같은 애가 해준다고 하면 보통은.."
"자, 잠깐만!"
"......"
김민아의 다급한 목소리에 거의 몰아붙이듯이 한 번에 쏟아내던 말을 멈췄다.
그 짧은 사이에 김민아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리며 손끝을 덜덜 떨어대고 있었다.
"그, 그러니까.. 왜.. 이상하다고 생각을..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겁에 질린 것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횡설수설 중얼거리는 김민아의 표정이 점점 혼란으로 물들어간다. 그러더니 이내 어깨를 크게 흠칫 떨더니 벌벌 떨던 움직임을 멈췄고.
"우욱..!"
파랗게 질린 얼굴로 다급하게 입을 틀어막더니 벌떡 일어나 의자를 넘어뜨리며 욕실로 뛰쳐들어갔다.
"웩..! 우웨엑..!"
욕실 문도 닫지 못하고 뛰어 들어간 탓에 내용물을 쏟아내며 괴로워하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고, 흐릿한 욕실 창 너머로 변기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자세도 그대로 보였다.
"우웨에엑..!"
오전에 먹었던 내용물을 전부 쏟아내는 것처럼 계속해서 구토가 이어진다.
나중에는 더는 쏟아낼 것도 없는지 소리가 줄어들었지만 그 뒤로도 웩웩거리며 헛구역질하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진짜 망한 것 같은데..'
반응이 좋지 않을 거라는 것 정도야 이미 예상한 일이었지만 그냥 정색하고 날 죽일 듯이 화낼 거라고만 생각했었지 이렇게 심각하게 몸에서부터 거부 반응이 올라올 줄은 몰랐다.
더 큰 문제는 김민아의 저런 반응이 이해가 간다는 거였다.
'나라도 저랬겠지.'
물론 나야 김민아 같은 예쁜 여자애한테 성욕 해소 도구로 쓰였다면 기뻐했겠지만 그 상대가 다 늙은 할머니나 뚱뚱하고 못생긴 아줌마였다면 나 역시 저랬을 것이다.
단순히 성처리 도구로 쓰인 것만이 아니라 본인이 그걸 자연스럽게 여기고, 기뻐하며 진심으로 즐기기까지 했으니 더더욱 충격이 컸을 것이다.
"......"
거의 10분 정도가 지난 뒤에는 간헐적으로 들려오던 헛구역질 소리까지 거의 끊어졌다.
후우, 후우 하고 크게 심호흡하다가 다시 한번 웩하고 숨을 들이키는 소리를 들어보면 기절하거나 한 건 아닌 것 같았지만 변기 앞에 무릎 꿇은 자세로 몇 분째 저러고 있으니 불안감이 계속해서 커지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일단 기다려야겠지.'
지금 내가 가서 무슨 소리를 하던 간에 김민아에게는 가식이나 자길 가지고 노는 소리로밖에는 들리지 않을 테니까.
적어도 자기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고 나올 때까지는 기다려주는 게 맞았다.
물론 김민아가 이대로 문을 박차고 나와 밖으로 도망치는 일만은 막기 위해 나름 신경을 곤두세우고는 있었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20분을 지나 30분이 넘게 지나고 나서야 변기 앞에 무릎 꿇고 있던 실루엣이 비틀거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변기 물이 내려가는 소리와 함께 수도가 틀어지는 소리, 몇 번이고 반복해 입 안을 가글하고 뱉어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거의 스무 번이 넘게 입 안을 헹궈내고 나서야 실루엣이 비척거리며 욕실 문 쪽으로 걸어 나왔고, 이내 그 짧은 사이에 다른 사람처럼 초췌해진 김민아가 터덜터덜 걸어와 내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너, 뭐야..?"
"..몽마."
굳이 다른 설명은 덧붙이지 않고 최대한 짧게 대답했다.
"몽마.. 그래.. 몽마라 그거지..? 그럼 하필 왜 나였는데..? 사람 가지고 노니까 재밌었냐..?"
힘없이 흘러나오는 목소리에서 이쪽을 향한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뚝뚝 묻어나와 공기를 싸늘하게 만들었다.
"그때는 마땅한 상대가 없었어. 아무나 상대로 최면을 쓰고 싶지도 않았고, 내 주변에 여자라곤 너밖에 없어서 그랬어."
"그래서 나였다고..? 씨발.. 그래. 그건 그렇다 쳐. 돈은 또 왜 준 건데..? 꼴에 미안해서..? 있지도 않은 양심이 남아서 그랬냐..?"
"정기를 사용해서 최면을 거는 거니까. 내가 가진 정기로는 네가 공짜로 나한테 뭘 하게 만들 수가 없었어. 그래서 돈이랑 총무의 업무라는 핑계를 붙여서 네가 그나마 거부감을 덜 느끼게 만든 거고."
"하.."
간신히 쥐어 짜내듯 묻는 김민아와 달리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차분하게 내뱉어지는 대답에 김민아의 입에서 허탈한 한숨이 짧게 흘러나왔다.
"개새끼.. 그래놓고 친구..? 사람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아니, 가지고 논 거겠지.. 나쁜 새끼.."
뚝뚝 끊어지며 흘러나오는 악담을 말없이 들었다.
김민아의, 피해자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그 사실이 더 당연스럽게 느껴졌다.
김민아에게는 분명 미안하다는 마음이 든다. 하지만 당사자에게는 그 미안하다는 마음조차도 기만으로 느껴질 것이다.
이것 역시 미안한 일이었지만, 이렇게 나쁜 새끼라고 욕을 듣고 보니 오히려 '내가 원래 그런 놈인데 어쩌겠어.' 하는 생각까지 떠올라 죄책감으로 뒤덮인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게 느껴졌다.
결국 결과만 좋다면 그만이고, 여기서 김민아를 내 걸로 만드는 데 실패하더라도 나는 내 마음대로 살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