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화 > 너 같으면 화가 안 나겠냐!? (5)
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차에 올라 월미도로 향했다.
네비에 나오는 예상 시간은 1시간 정도. 출발할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피로도 쌓이고 배도 부른 탓에 김민아는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깜빡거리며 어떻게든 잠들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아우웅.. 심심해애.."
"그러게 뒤에서 좀 자고 있으라니까."
"뭐래애.. 졸린 게 아니라 심심하다니까.."
졸린 눈을 하고 축 늘어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졸음을 참고 있는 걸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김민아가 이렇게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이유는 뻔했다.
"그냥 입에 물고 아무것도 안 하면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자라."
이걸로 세 번째 부탁이었지만 망설이지 않고 바로 쳐냈다.
처음에는 그냥 대놓고 빨고 싶다고 했고, 그다음엔 살살 맛만 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는 입에 물고만 있겠다며 수위를 낮췄지만 뭐가 됐든 사양이다.
운전하면서 펠라를 받는다? 기분이야 당연히 좋을 테고 지루하지도 않겠지만 그러다가 사고라도 나면 그만큼 한심한 일도 없지 않은가.
몽마가 아무리 체력이 뛰어나고 건강하다지만 신체 능력 자체는 결국 평범한 사람 수준이었으니 괜히 다칠 만한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우씨.. 진짜 비싸게 구네."
"좀 참아봐. 운전 중에 딴짓하지 말자는 게 이상한 건 아니잖냐."
그래도 김민아의 비위를 최대한 맞춰야 하는 입장이라 세게 말하지는 못하고 적당히 타이르기만 하고 넘어갔다.
"아직 30분 남았으니까 지금이라도 뒤에 가서 쪽잠이라도 자."
"..간만에 만난 건데 자면 시간 아깝잖아."
여로모로 기특한 대답이었지만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된다.
차를 구해서 혼자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된 건 좋았는데, 발정 난 상대를 옆에 두고 운전을 하려니 참는 쪽도 고역이었다.
그렇게 10분 정도가 더 지나자 김민아는 결국 졸음이 한계에 달했는지 어느새 곱게 눈을 감고 얕은 숨소리를 흘리며 잠들어 있었다.
"......"
이제 좀 살겠네.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김만아의 펠라가 얼마나 기분 좋은지는 말할 필요도 없고, 김민아의 말에 혹해서 '그래도 물고만 있는 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니까.
신호에 걸린 김에 잠시 숨을 돌리며 잠든 김민아의 옆모습을 살폈다.
잠버릇도 없는지 코도 골지 않고 얌전히 색색거리는 숨소리만 흘리는 모습은 깨어있을 때와는 달리 차분한 공기가 감돌아 친근하다던가 하는 느낌도 없이 예쁘다는 인상만 남았다.
갖고 싶다.
그동안 만났던 여자들. 이미 내 소유가 된 유서연이나 임예진은 제외하고, 성은영이나 정예주, 이지은, 정혜수, 자잘하게 오피에서 만난 여자들이나 편의점 알바생 한수영, 최수정까지 생각해보더라도 김민아처럼 소유욕을 자극하는 여자는 없었다.
얼굴로 급을 따지자면 그나마 성은영과 정예주 정도가 김민아와 비슷한 수준이었지만 그 둘은 굳이 무리해서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걸 보면 단순히 예쁘다는 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갖고 싶은 여자가 상대라면 최면을 너무 쓰면 안 된다는 거겠지.'
이것도 나름 교훈이라면 교훈이다.
상대가 갖고 싶다면 내게 적당히 호감을 느끼게 하거나 상식을 비틀지 않는 선에서의 최면만으로 잠자리를 유도하고, 몸을 섞으면서 쾌락으로 길들여야 한다.
그래야 최면을 풀었을 때 위화감을 느끼지 못 할 테고, 몽마가 된 후에도 내게 악감정을 가지지 않게 될 테니까.
새롭게 떠오른 명제에 어떤 식으로 최면을 걸어야 나중에 뒤탈이 없을까. 이런저런 상황을 상정하고 걸어볼 만한 최면을 떠올리면서 운전을 하다 보니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이럴 거면 김민아한테 자지를 물린 채로 운전해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지만 단순히 다른 생각만 하는 것과 아래쪽에서 직접적으로 쾌감이 올라오는 건 다른 문제였다.
"야, 도착했다. 일어나봐."
"우웅..?"
공용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김민아를 살짝 흔들어 깨우자 감긴 눈꺼풀이 움찔 떨린다. 하지만 눈은 뜨지 않고 칭얼대는 소리를 흘리는 걸 보아하니 그 짧은 사이에 어지간히도 깊이 잠든 모양이였다.
"월미도 도착했으니까 일어나라고. 아니면 조금만 더 잘래? 좀 있다가 깨워줄까?"
"아니야아.. 일어날래애.."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있는 주제에 비척비척 몸을 흔들어가면서 일어나겠다고 하는 걸 보니 집념이 대단하기는 하다.
"아웅.. 몸이 안 움직여.."
"안전벨트를 안 풀었으니까 그렇지. 가만있어봐. 풀어줄게."
"웅.."
나로서는 김민아가 이대로 푹 자고 일어나는 것도 개운해지고 기분도 좋아질 테니 나쁜 일은 아니었지만 일단은 본인이 원하는 대로 해주기 위해 몸을 옆으로 기울여 안전벨트를 풀어줬다.
"스읍.. 하아.. 좋은 냄새.."
"카레 냄새밖에 더 나냐."
안전벨트가 풀린 김민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내 몸을 끌어안고 깊게 숨을 들이키며 중얼거린다.
김민아가 말하는 '좋은 냄새'는 내가 몽마가 되면서 풍기게 된 채체를 말하는 것이리라.
나도 유서연과 임예진의 몸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달짝지근한 향을 알고 있었기에 금방 답을 내릴 수 있었다.
"일어날 거야?"
"우웅.. 조금만.."
안전벨트를 풀어주느라 자세가 어정쩡해서 불편하긴 했지만 일단은 달라붙은 김민아가 내 체취를 마음껏 만끽하도록 내버려 뒀다.
이게 다 업보로 쌓일 일이라는 걸 생각하면 마냥 즐길 수도 없는 일이라 기분이 복잡했다.
그리고 그렇게 불편한 자세로 있기를 잠시. 허리를 감싸 안고 있던 김민아의 팔이 풀어지고, 몸을 천천히 떨어뜨리더니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부활!"
언제 잤냐는 듯 쌩쌩하게 눈을 뜬 김민아가 기운차게 소리치고는 곧장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김민아를 따라 차에서 내리자 습한 공기가 훅 밀려들어 온다. 이게 바다 공기인가? 직접 바다까지 와본 건 처음이라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아마 그럴 것이다.
"햐.. 바다 냄새 좋다. 월미도 진짜 오랜만이네."
차 앞쪽으로 빙 돌아 옆으로 다가온 김민아가 기분 좋은 표정으로 말했다.
"와봤어?"
"나야 기껏해야 차로 1시간 거리니까. 버스 타면 조금 더 걸리긴 해도 어릴 때 몇 번 와봤었지."
"그래? 바다는 어느 쪽인데?"
"몰라? 마지막으로 왔던 게 7년인가 8년 전인데 당연히 까먹었지. 주차장도 처음 와보는 거고. 일단 대충 걷다 보면 나오겠지. 가자!"
김민아는 가벼운 걸음으로 성큼성큼 주차장 출구 쪽으로 걸어 나간다.
나도 살짝 거리를 두고 김민아의 뒤를 따라 걸었고, 김민아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말없이 주변을 둘러보며 거리를 걸었다.
누구한테 물어보거나 표지판도 찾아보지 않고 내키는 대로 걸었음에도 운이 좋았는지 헤매지 않고 금방 난간 너머로 지평선까지 넓게 펼쳐진 바다를 볼 수 있었다.
'..괜찮은데?'
요즘 세상에 바다 한 번 안 가 본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딱 그런 사람이었던지라 바다라고는 인터넷에서 이미지로 본 게 전부였다.
그래도 역시 직접 보는 건 느낌이 다르다.
성욕이나 식욕은 있어도 감성적인 부분은 다 메말랐다고 생각했는데, 탁 트인 전경에 나도 모르게 빠져드는 걸 보니 마냥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나중에 제대로 여행 다녀보는 것도 괜찮겠어.'
영어나 일본어를 배워서 해외로 나가볼 계획은 있었지만 목적은 어디까지나 본토 쪽, 진짜배기 외국인들을 따먹어보고 싶어서였을 뿐이다.
하지만 단순히 섹스를 떠나서 이런저런 관광지를 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음에 드나 보다?"
고시원에서 같이 지낼 때 같이 이것저것 시켜 먹으면서 서로 어린 시절 얘기도 했었기 때문에 김민아는 굳이 바다가 처음이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러게. 나쁘지 않네."
"그치? 오길 잘했지?"
"마음에 든다니까 그러네."
"히히. 난간 쪽으로 가서 보자. 떨어져서 보는 거랑은 또 다르거든."
처음이라고 말한 적은 없지만 이미 내가 바다에 처음 와본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김민아는 가이드 흉내라도 내는 것처럼 난간 쪽으로 성큼성큼 앞서 걸어갔다.
확실히, 난간을 시야에 두고 보는 것과 난간에 붙어서 시야 전체가 바다로 가득 차는 건 또 느낌이 달랐다.
"해변은 어디로 가야 있어? 한번 가보고 싶은데."
"월미도는 해변 없는데?"
"..해변이 없다고? 바다인데?"
"내가 알기론 없어. 방파제 쪽으로 내려가 볼 순 있는데, 막 해운대처럼 모래사장이 깔린 그런 건 없을걸."
"그게 뭔.."
김민아의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에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월미도 해변', '월미도 모래사장' 따위의 검색어를 찾아봤지만 정말로 월미도에는 해변이 없는 모양이었다.
"뭐 이딴데가 다 있어? 인천에서 바다 하면 그냥 월미도인 줄 알았는데."
"바다는 맞잖아. 모래사장만 없는 거지."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의외로 바다 풍경이 마음에 들어서 모래사장까지 걸어보고 싶었던 나로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여름엔 바다나 한번 가봐야겠다.'
어쨌든 바다라고 하면 넓게 펼쳐진 모래사장에 햇살도 짱짱하게 내리쬐고 파라솔을 펼쳐놓고 쉬거나 얕은 물가에서 노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당연히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수영복 차림이고, 여자들 역시 수영복을 입고 돌아다닐 것이다.
이제 막 4월 중순을 지난 참이라 월미도에서 그런 풍경을 볼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거였다.
한참을 말없이 난간을 따라 걷다가 방파제까지 내려와 파도 소리를 들었다.
기분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머리가 텅 비고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아서 없던 피로도 날아가고 힐링 되는 기분이었다.
"이제 가자!"
"뭐야.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차에서 내린 지 이제 막 30분 정도가 지났을 뿐인데 벌써 돌아가자고 하니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당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간만에 바다도 보고 기분 좋아졌으면 된 거지. 이제 볼 것도 없어. 놀이공원 비슷한 게 있긴 한데. 바이킹이라도 한번 타볼래? 사고 났다고 뉴스에 나온 적도 있긴 한데."
"..차라리 그냥 타지 말자고 해라."
"타지 마! 힐링은 충분히 했으니까 이제 스트레스만 싹 날리면 끝이란 말이야."
힐링이랑 스트레스 해소가 뭐가 다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제 빨리 돌아가서 섹스가 하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래. 가자."
어차피 여기서 이러고 있어 봤자 뭔가 정보가 더 나올 것 같지도 않고,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고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고 깔끔하게 승부를 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쩐지 월미도에 도착했을 때보다 더 신난 것처럼 보이는 김민아의 뒤를 따라 방파제에서 올라와 왔던 길을 쭉 되돌아갔고, 3시간짜리로 끊은 주차권이 무색하게 1시간도 채우지 못하고 월미도를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