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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큐버스 시스템-223화 (223/775)

< 223화 > 너 같으면 화가 안 나겠냐!? (4)

차로 30분 정도를 달려 도착한 카레집은 막 가게를 연 참이라 아직 나와 김민아 외에는 손님이 없었고, 덕분에 오래 기다릴 것도 없이 금방 요리를 받을 수 있었다.

"맛있어!"

"괜찮네."

유서연과 워낙 이것저것 먹으러 다니고, 고급 요리도 제법 먹어본 탓에 김민아처럼 호들갑을 떨 정도는 아니었지만 확실히 맛은 나쁘지 않았다.

아마 내가 서큐버스 시스템을 얻지 못했다면, 취미가 게임과 섹스가 아닌 게임과 식도락 탐방이 됐을 것이다.

연애도 하지 않고, 혼자 사는 남자가 가질 만한 취미라면 대부분이 그런 느낌이었으니까.

"아웅.. 나도 차 한 대 있으면 출퇴근도 편하고 여기저기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기도 좋을 텐데."

"이제 공무원이니까 대출받아서 살 수 있지 않나? 신차는 몰라도 중고로 사면 더 싸게 살 수도 있을 텐데."

"대출은 받기 싫단 말야. 가뜩이나 돈도 없는데, 좀 편하자고 그렇게 돈 쓰는 것도 아깝구."

김민아의 대답을 들으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김민아네 집은 상당히 가난한 편이다. 예전 우리 집만큼은 아니었지만, 어릴 때는 세 가족이 좁은 화장실 하나에 반쪽짜리 주방, 그리고 원룸 크기 정도 되는 방에서 셋이서 지냈다고 했었던가.

지금이야 평범한 가정집 수준은 되는 빌라에서 지낸다고 하지만 그것도 김민아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나 돼서야 생긴 일이라고 했었다.

부모님이 맞벌이로 겨우겨우 돈을 모아서 이사한 거라 저축도 거의 남지 않았고, 대출도 조금 있다고 했으니 김민아까지 일을 해서 돈을 번다고 해도 개인적인 이유로 차를 살 여유까지는 없는 것이리라.

'돈은 확실히 무기로 쓸 수 있어.'

나 역시 어릴 때부터 가난하고 굶주린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돈이라는 한 글자에 얼마나 큰 마력이 담겨있는지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다.

아직 어떻게 조건을 제시해야 할지는 떠올리지 못했지만 김민아에게 금전적인 이득을 제안해 꼬신다는 방법은 진작에 생각해두고 있었기에 지금의 대화로 나름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굳이 지금 안 사더라도 지내다 보면 돈도 모이겠지. 서두르지 말고 느긋하게 생각해."

"..그렇겠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 것 같지만 돈 얘기를 할 때와는 약간 다른, 희미하게 우울감이 섞인 듯한 목소리에 힐끗 김민아의 표정을 살폈다.

'뭐가 있나 본데?'

내 앞에서는 감정을 감추지 않는 둘과는 달리 김민아는 감정을 숨기는 것 자체를 잘 못 하는 편이었기에 표정만 봐도 어느 정도 기분을 살필 수 있었다.

"그렇겠지. 공무원이면 어지간해서는 짤릴 걱정도 없고, 그냥 시간만 보내도 호봉은 오르잖냐."

"그거야.. 그렇지 뭐."

굳이 무슨 일 있냐고 캐묻는 것보다는 이렇게 살살 긁어보며 반응을 살피는 게 낫다.

역시나 이번에도 반응이 시원찮다. 가끔 야근하느라 피곤하다는 말 정도는 들었었는데, 그 외에 직장에 대한 불평을 꺼낸 적은 없었으니 그쪽으로 가닥을 잡아야 할 것 같았다.

"일은 어때? 할만해?"

"뭐어.. 그냥저냥 할 만해."

그렇게 대답하면서 숟가락에 한가득 카레를 퍼 올려 입에 욱여넣고는 우적우적 씹는다. 진심으로 맛을 즐기던 아까와는 달리 지금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뭐라도 입에 퍼넣는 모양새였다.

'이래서 찍힌 거 아니야?'

이렇게 감정이 표정으로 훤히 드러나서야 직장에서 뭐 하나 싫은 소리라도 듣거나 귀찮은 일이라도 떠맡게 되면 곧바로 표정을 구겼다가 찍히는 일도 있을 법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일 뿐이었다.

'좀 더 자세히 캐물어야 하나?'

김민아에게 '스트레스가 쌓여서 속 시원하게 하소연이라도 싶다' 같은 최면이라도 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예 화제 자체를 피하는 태도로 봐서 김민아는 내게 자기 직장 생활에 대한 불만을 터놓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여기서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서 마음을 털어놓게 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자연스럽지 않다.

최면에 대해 모르고, 몽마가 되지 않는다면 눈치채더라도 작은 위화감 정도로 끝나겠지만 최면에 대해 알게 된다면 '내가 왜 그랬지?' 하는 사소한 위화감 하나하나가 의심이 되어 발목을 붙잡을 게 분명했다.

'술자리라도 가면 좀 더 편하게 해결될 텐데.'

술을 먹으면 아무래도 감정이 흔들리고 자제력이 떨어지니까. 그때 솔직하게 최면을 건다면 김민아도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김민아는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섹스하기 전에는 더더욱 술 마시기를 꺼려했다.

아무래도 술에 취하면 선명하게 쾌감을 즐기기도 어렵고, 평소보다 더 빨리 뻗어버리는 게 이유였다.

그리고, 오늘의 김민아는 나와 섹스할 생각이다. 아니, 애초에 섹스가 하고 싶어서 불렀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욕구가 많이 쌓여 있는 상태였으니 술 역시 마시게 할 수가 없었다.

김민아는 한이라도 맺힌 것처럼 카레를 거의 마시다시피 퍼먹고 있는 탓에 망설일 시간도 별로 없다.

이 뒤의 일정은 바다가 보고 싶다는 김민아의 요청에 따라 그나마 가까운 월미도에 가기로 했고, 돌아와서는 그대로 저녁을 먹고 모텔에 가던가, 그냥 모텔에 갈 예정이었다.

운전 중에는 쓸데없이 머리 쓸 만한 얘기는 하고 싶지는 않았고, 월미도에 가서도 적당히 바람만 쐬고 올 예정이었으니 진지하게 대화를 할 만한 시간은 없으리라.

'여기서 확인하는 게 낫겠어.'

어차피 지금이나 저녁 먹으러 갔을 때나 상황은 별로 다를 것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확실하게 정보를 캐내고, 하루 종일 김민아의 기분을 맞춰주다가 그나마 기분이 좋을 때 모텔에 가서 솔직하게 설득하는 게 낫다.

어차피 시간도 많았으니 꾸준히 찾아오거나 이 근방에서 며칠 묵으면서 기회를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결국 만날 때마다 섹스하게 될 테고, 그만큼 최면이 풀렸을 때 김민아가 느껴지는 배신감 역시 커질 테니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할 만하기는. 일 힘들지? 표정에 다 써 있어서 모르는 척해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네."

"......"

다시 한번 카레를 힘껏 퍼 올리던 김민아의 손이 뚝 멈춘다. 그리고는 아예 감정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언짢은 눈빛으로 이쪽을 째릿 노려보며 컵에 물을 한가득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

"하아.. 그래서 뭐? 돈 벌려고 일하는 건데. 당연히 힘들지. 그게 이상해?"

"나도 힘들게 일하는데 그게 이상하겠냐? 힘든 게 당연한 거니까 억지로 숨길 필요는 없단 거지. 나도 일 힘들다고 얘기하고 팀장 때문에 죽겠다고 뒷담도 깠잖아."

친구끼리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다던가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쉽게도 최면이 풀리면 김민아에게 친구 사이라는 것부터 인정받아야 할 판이었으니 지금 친구라는 관계를 써먹을 수는 없었다.

"진짜.. 전에도 그렇고. 무슨 눈치가 그렇게 빨라?"

"눈치는 무슨. 니가 표정을 너무 못 숨기니까 다 보이는 거지. 어지간히 눈치 없는 거 아니면 너랑 1분만 얘기해도 다 눈치챌걸."

"..뭐래."

본인도 표정을 감추는 게 서툴다는 자각 정도는 있는 걸까. 그래도 아득바득 아니라고 부정하지는 않고 시선을 피하면서 어물쩍 넘어갔다.

"뭐, 공무원도 일하는 데 따라서 힘든 데는 힘들다고 하더라. 아니면, 나처럼 누구한테 잘못 찍힌 건가?"

"..솔직히 공무원이 되기만 일은 편하게 하면서 월급도 따박따박 받아먹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일도 좀 빡세고 주에 서너 번은 퇴근도 못 하고 야근하고, 돈도 생각보다 못 버니까 좀 피곤하더라고."

그래도 끝까지 힘들다고는 하지 않고 좀 피곤하다고 넘어가는 게 김민아의 마지막 자존심일 것이다.

"그래도 주말은 확실하게 쉬기도 하고, 니 말대로 그냥 시간만 지나도 호봉이랑 같이 월급도 오르니까 어지간한 직장에 비하면 훨씬 나은 편이잖아. 안정적인 것도 있고. 당장 너도 새벽에 일어나서 나보다 힘쓰면서 일하는데 배부른 소리지."

"음.. 뭐.."

그냥 일이 힘들다고 말하는 게 쪽팔려서 말 안 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물류 창고 일 자체도 유서연이 귀찮고 짜증 났을 뿐이지 힘들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고, 지금은 일도 때려치우고 마음껏 놀고 있었으니 떠올리기 힘든 발상이긴 했다.

"그런 게 어딨냐. 그냥 힘든 게 힘든 거지. 난 그래도 일 빨리 끝내고 대낮부터 쉬기라도 하지. 야근 시간 길어질수록 쉴 시간도 줄어드는 건데. 그게 더 힘들겠다."

"그럼 뭐해. 이제 와서 힘들다고 때려치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버텨야지. 1, 2년만 버티면 인사이동도 있으니까 더 좋은 보직 걸리게 해달라고 기도나 해야지."

공무원의 인사이동이 어떻게 굴러가는 건지는 몰라도 김민아가 나름대로 저기에 희망을 걸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1, 2년이나 기다려야 한다면 상당히 멀게 느껴질 것이다.

아마 그동안 나한테 꾸준히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권했던 것 역시 성욕도 있었지만 스트레스가 너무 쌓여서 시원하게 풀고 싶은 마음 역시 한몫 했으리라.

시간이야 넉넉하게 남았지만 혹시라도 김민아가 편한 보직으로 이동하게 된다면 나로서는 김민아를 꼬실 수 있는 요소가 하나 줄어드는 상황이었으니 그 전에 해결을 볼 필요가 있었다.

'결국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야.'

김민아에게 공무원을 때려치우고도 안정적으로 돈을 벌 수 있게 해준다면? 이건 깊이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유서연이 준비 중인 마사지 샵의 카운터라도 보게 하면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일은 힘들지 않을 테고, 공무원이 정확히 얼마를 버는지는 몰라도 지금보다 더 넉넉하게 챙겨줄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힘들고 스트레스받는 생활에서 벗어날 기회를 준다는 건 단순히 돈을 내미는 것 이상으로 매력적인 제안이 될 수도 있었다.

'돈 아니면 편하고 안정적인 새 직장. 외모의 향상, 건강. 최면 능력. 그리고 나랑 하는 섹스..'

마지막 건 너무 자뻑하는 느낌이라 매번 민망하긴 했지만 유서연이나 임예진의 경우를 보면 이것 역시 무시 못 할 무기임은 확실했다.

내 정기에 중독된 김민아에게라면 보통 사람들 이상으로 더 확실하게 먹히기도 할 테고.

'문제는 얘가 얼마나 일을 때려치고 싶어 하느냐인데.'

결국은 내가 제시할 수 있는 것들이 최면으로 정신을 조종당하고 몸을 농락당했다는 거부감과 친구라고 생각했던 상대에 대한 배신감을 앞설 수 있는가. 그런 문제였다.

"그럼.. 지금 일 그만두는 대신에 바로 다른 일자리 구할 수 있으면 그만둘 수 있을 것 같아?"

조금 딱딱하게 굳은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최대한 가볍게 장난치듯 물으며 멈췄던 숟가락을 움직여 카레를 입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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