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화 > 절친은 침대 위에서도 사이가 좋다 (2)
"지은이 쪽에서 먼저 물어본 거야. 혜수한테 무슨 일 있는 것 같다고. 네가 자꾸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니까 애가 의심한 거잖아."
[..이, 이상.. 안 그랬거든요!?]
"아니긴.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얘는 잠자리에서 어떨까?' 같은 망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되게 끈적한 눈빛이었는데."
[아, 안 그랬다고요!!]
어디서 통화하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이번에는 제대로 정곡을 찔리고 다시 한번 소리를 빽 지른다.
애초에 그렇게 생각하도록 최면을 걸어뒀으니, 정혜수로서는 정말 완벽하게 마음을 읽힌 기분이라 당황스러울 것이다.
[아, 아무튼..! 지은이가 이상하다고 의심했어도 모르는 척하면 됐잖아요!]
"그래도 지은이는 진심인데 계속 거짓말하기에는 너무 미안하더라고."
[개소리 좀 하지 말고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데요!?]
"정말 지은이한테 미안해서 그런 거라니까. 그래도 전부 사실대로 말한 건 아니고, 네 쪽에서 하고 싶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했다고 말했어."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네가 멋대로 미행까지 한 것도 그렇고, 날 나쁜 놈이라고 생각해서 지은이랑 헤어지는 조건으로 대신해주겠다고 말했다는 건 오해도 좀 섞인 일이잖아. 지은이도 엄청 화낼 것 같았거든 그래서.."
이지은에게 걸었던 최면의 내용을 적당히 줄여서 설명했다.
나와 이지은이 모텔에서 나온 걸 우연히 봤다는 것, 하지만 사귀는 사이는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이지은이 혼자만 경험을 마쳤다는 초조함에 자신과도 해달라고했고, 섹스에 빠져버렸다는 것까지.
차라리 정혜수가 이지은과 헤어지라는 조건으로 몸을 대주는 쪽이 덜 막장이었지만 이렇게 하는 편이 이지은이 덜 화낼 것 같다는 말에 정혜수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뚝 끊어졌다.
'사실 어느 쪽이 더 심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뭘 어쩌고 싶은 건데요.]
"뭐가?"
[아, 좀! 뭐가 됐든 원하는 게 있어서 이런 거 아니냐고요!]
"정말로 아무것도 없어. 그냥 와서 둘이 얘기 좀 해봐."
[..알았어요.]
정혜수는 이 이상 붙들고 늘어져도 의미 없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혜수 온대요?"
"응. 택시 타고 간지 얼마 안 됐으니까, 지금 차 돌려서 오고 있대."
"하아아.."
평소 밝은 분위기의 이지은에게서는 보기 힘든 힘없는 한숨이 흘러나온다. 최면으로 멘탈을 잡아주기는 했어도 지금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해둔 건 아닌 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화 많이 났어?"
"..너무 갑작스러워서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정혜수에게 상황을 설명하느라 제법 시간을 썼는데, 조금 진정되기는 했어도 아직 제대로 생각을 정리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할 수 없지.'
셋이서 한 번 해보겠다고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조금만 더 최면을 쓸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너무 센 걸로는 넣지 말고..'
[최민석과의 섹스는 너무 기분 좋아서 한 번 하고 나면 계속 떠오르고 성욕이 생길 수밖에 없다. 경험해본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너무 자신감 넘치는 최면일 수도 있겠지만 첫경험을 마친 날부터 이지은은 나와의 섹스를 거른 적이 없었다.
날 유혹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일단 본인이 섹스의 쾌락에 완전히 빠져버렸다는 건 은근한 흥분과 욕구가 뒤섞인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 아무튼 얘기해봐야 알 것 같아요."
새로운 최면이 들어가자마자, 움찔하며 표정이 조금 더 풀어진다. 정기의 소모가 적은 걸 보니 이미 조금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미안해. 내가 제대로 거절했어야 했는데."
"아, 아니에요! 그렇게 따지면 저도 오빠한테 억지 부려서 이렇게 된 거니까.."
그래도, 자기도 술에 취해 억지를 부린 전적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내 잘못이라고는 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적당한 말로 이지은의 기분을 조금씩 풀어주고, 은근히 정혜수를 변호하는 사이에 시간이 지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변에 선 택시에서 내린 정혜수와 눈이 마주쳤다.
이쪽을 노려보려다가, 옆에 있는 이지은을 보고 멈칫한 정혜수에게 살짝 웃어주고, 긴장한 듯 천천히 다가오는 정혜수에게 먼저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왔어?"
"......"
"일단 앉아봐. 지은이도 그렇게까지 화난 것 같지는 않으니까 얘기부터 해보자."
"..알았어요."
정혜수는 이지은보다 내 쪽에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분위기였지만 바로 옆에 이지은이 있는 탓에 평소처럼 노려보는 것조차 하지 못하고 얌전하게 이지은의 옆에 앉았다.
잠시간의 침묵. 이지은은 잠시 도움을 요청하듯 힐끔 시선을 보내왔지만 직접 말하라고 말없이 눈빛으로 대답하자 이지은은 잠시 한숨을 쉬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혜수야."
"아, 응."
"일단.. 오빠한테 들은 게 전부 사실이야?"
"맞..아."
눈이 마주쳤을 때 웃은 걸 협박으로 받아들인 걸까. 정혜수는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순순히 내 설계에 맞춰주고 있었다.
"하아.. 맨날 나 애 취급만 하던 혜수는 어디 가고 그런 애 같은 생각을 했어? 먼저 그.. 그것 좀 한다고 어른이니 앞서간다느니, 그게 더 애들 같잖아."
"미안해.."
"..됐어. 나도 네가 이것저것 신경 써주고 도와줬는데 다 숨기고 있었잖아. 나도 솔직히 좀 미안했었거든."
그건 몰랐다. 애초에 제대로 숨기지도 못하고 금방 들켜버린 탓에 나중에는 이지은이 우리 관계를 숨기고 있다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던 탓이었다.
"그래도, 혜수 너도 너무했던 거 알지? 아무리 부끄러워도 나한테 먼저 말했어야지, 그걸 오빠한테 찾아가서 그러는 건 너무했잖아."
"으응.. 그렇지.. 미안해."
정작 화내야 할 이지은은 나긋나긋하게 말하고 있었는데, 정혜수는 정말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계속해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사실, 큰 잘못이 맞고 담담하게 넘어가려는 이지은의 태도가 이상한 쪽이긴 하지만 저런 태도를 보인다면 당장은 이지은이 하자는 대로 따를 가능성이 컸으니 내 입장에서 본다면 좋은 일이었다.
"아무튼, 이번 일은 서로 하나씩 비밀로 한 거니까 비긴 걸로 치자. 난 이런 걸로 너랑 사이 나빠지기 싫단 말이야."
"지은아.."
조금, 아니 상당히 감동한 듯한 정혜수의 표정이 굉장히 인상적이다. 솔직히 말하면 언성이 높아지고 머리채를 잡는 일까지도 상상하고 있었는데, 최면의 도움이 있다고는 해도 정말 어지간히 정혜수를 좋아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기서 상황이 종료됐다면 나름 훈훈한 마무리라고 할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아직 본론이 남아 있다.
감동하고 있는 정혜수와는 달리 이제는 조금 후련해진 표정으로 큼큼 헛기침을 하는 이지은의 눈빛에 약간의 장난기가 깃들었다.
"근데, 오빠랑 했던 게 그렇게 좋았어?"
"어, 어..?"
"처음에는 너무 화가 났는데, 한 번 했으면 어쩔 수 없겠구나 싶더라구. 오빠랑 하는 거, 엄청 기분 좋잖아. 그치?"
"어, 그, 그게.. 그렇..지..?"
갑작스럽게 시작된 19금 토크에 차마 정색은 못하고 어색하게 맞장구를 쳐주는 정혜수. 이지은은 그런 정혜수의 모습을 부끄러워하는 거라고 여겼는지, 킥킥 웃음을 흘린다.
"평소에 이런 얘기 나오면 나만 부끄러워했었는데. 이제는 반대가 됐네?"
"아, 응.. 그렇네.."
"아무튼! 다른 사람이 오빠랑 하는 거였으면 정말 싫었을 텐데. 우리끼리니까 참아줄 수 있는 거야. 그리고, 앞으로 하고 싶으면 몰래 하지 말구 나한테 말하고 셋이서 해. 알았지?"
"뭐, 뭐..?"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제안에 정혜수의 이성이 한계를 맞이해버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는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로 우스웠다.
"어차피 그.. 혼자서 해도 해소가 안 된다며. 오빠가 안 해주면 아무 남자나 만나서 막 하겠다고도 했었구. 그래도 그건 너무 심하니까, 혜수가 남친 만들 때까지만 내가 양보할게."
마치 큰 선심이라도 쓰는 듯한 말투와 달리 내뱉는 말은 완전히 상식에서 벗어나 있다. 하지만 이거야말로 내가 의도한 결과 그 자체였다.
정혜수에게 뭐라도 하나 양보하고, 도와주고 싶은 이지은과 성욕을 참지 못하고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내게 안겼던 정혜수. 중간중간 최면을 덧붙인 설정이긴 했지만 결국은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순간이었다.
"지, 지은아..? 난 그렇게까지 안 해줘도 괜찮으니까.."
"그보다, 내 의견은..?"
상황이 이상하게 굴러감을 느끼고 최대한 에둘러서 거절하려는 정혜수의 말을 뚝 끊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오빠는.. 음.. 제대로 거절 못 해서 미안하다고 했으니까 사과하는 셈 치고 셋이서 해요! 따지고 보면 오빠가 저도 혜수도 제대로 거절 못 해서 이렇게 된 거잖아요!"
처음부터 적당히 튕기는 척만 하다 받아들일 생각이긴 했지만 예상외로 이지은의 태도가 강경하다. 하기야, 처음부터 최면이 이상하게 잘 먹힌다 싶을 정도로 한번 결정한 건 곧바로 밀어붙이는 성격이긴 했었다.
"너는 괜찮고? 셋이서 하면 우리가 하는 거 혜수한테 다 보여주게 되는 건데. 부끄럽지도 않아?"
이번에는 정혜수 쪽에서 움찔 몸을 떨었다. 상황이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서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지, 정혜수는 지금 이지은이 어떤 모습으로 섹스를 하는지가 신경 쓰여 참기 힘든 상태였으니까.
"부끄럽긴 한데.. 괜찮을 것 같아요. 내가 못보는 데서 하는 게 더 싫기도 하구, 어차피 알몸 정도는 같이 수영장이나 목욕탕 갔을 때 다 봤는데요 뭘."
"에휴. 그래. 지은이는 됐다고 치고, 혜수 너는? 괜찮아?"
"그, 그게.."
고민하고 있다. 언제 죄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양 어디로 갈지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굴러가는 눈동자와 희미하게 달아오른 뺨만 봐도 욕망과 이성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는 게 뻔히 들여다보였다.
"아무리 미안해도 억지로 좋다고 할 필요는 없어. 사실 아무리 사이가 좋아도 셋이서 하는 건 조금 이상하잖아. 응?"
"......"
내 쪽에서 자기편을 들어주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이리저리 굴러가던 정혜수의 눈동자가 내 쪽으로 향하며 딱 마주친다.
거기서 구태여 말을 덧붙이지 않고, 눈을 마주치며 살짝 웃어주는 걸로 내 의사를 전달했다.
"진짜.."
자신이 내게 협박당하는 입장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정혜수의 입장에서 이 웃음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뻔했다.
"알았어.. 그럼 하고 싶을 때는 셋이서.."
"지금!"
"어, 어..?"
"솔직히 나도 나중에 보면 부끄러울 것 같으니까, 지금 확 해버리자구. 어차피 지금 분위기에서 데이트하러 가는 것도 웃기구. 시간도 많이 남았잖아. 괜찮지?"
이쯤 되면 이지은이 처음부터 내 속내를 읽고 도와주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훌륭한 어시스트였다.
"에휴. 그래. 난 이제 모르겠으니까 둘이서 결정해."
내가 다 내려놓은 척 힘 빠진 목소리로 받아들이자 정혜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진다.
나와 이지은이 결정을 내린 시점에서 정혜수에게는 선택권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