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화 > 절친은 침대 위에서도 사이가 좋다 (1)
이지은과 정혜수는 사이가 좋다.
이지은이야 원래 사람을 상대하면서 편견이나 벽이 없는 성격이었고, 정혜수는 그런 이지은과 함께 지내는 게 가장 편안하다고 느끼기 때문이었다.
엄밀하게 따지면 이지은은 그냥 자신과 오래, 친하게 지낸 만큼 정혜수를 좋아할 뿐이고, 정혜수 쪽이 이지은에게 은근한 집착을 보이는 관계였다.
덕분에 정혜수를 바라보는 이지은의 시선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이전보다 더 호의적으로, 친근하게 변하긴 했지만 결국은 친한 친구를 바라보는 정도의 시선일 뿐이었다.
[정혜수는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가장 친한 친구다. 정혜수가 자신을 많이 신경 써주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자신도 정혜수가 원하는 게 있다면 가능한 양보 하고, 도와주고 싶다.]
이지은에게 새롭게 걸린 최면이었다. 원래 가지고 있던 호의가 조금 더 늘어났을 뿐인 만큼 정기의 소모도 적었다.
반면, 정혜수에게 걸린 최면은 약간의 걱정과 호의뿐인 시선을 조금 달라지게 만들었다.
[평소에는 순수한 이지은이 최민석과의 잠자리에서는 어떤 모습을 보일지 궁금하다.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번은 꼭 보고 싶고, 자신처럼 쾌락에 빠져 몸부림치는 이지은을 상상할수록 몸이 달아올라 흥분된다.]
평소 정혜수는 이지은과 함께 지내면서 시선 따위를 신경 써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대로 눈을 마주쳐도 괜찮은지,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지를 몰라 묘하게 안절부절못하는 태도였다.
'하여튼 알기 쉽다니까.'
남의 표정, 안색, 눈빛은 잘 살피는 주제에 자기 표정을 숨기는 게 서투르다. 아니,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려보면 원래는 그것도 잘했을지 모르겠지만 나와 함께 지내면서 알기 쉽게 변해버렸다.
"그럼 내일 봐!"
"아, 응. 잘 놀다 와."
이지은의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인사에 정혜수는 살짝 흠칫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답을 돌려줬다.
"오빠."
"응?"
"혜수 말이에요. 요즘 표정이 조금 안 좋은 것 같지 않아요? 곤란한 일이 있으면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는데.."
정혜수에게 최면을 걸어둔 지도 오늘로 닷새째. 이지은이 이런 말을 할 정도면 이젠 확실히 티가 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정혜수의 이야기를 하면서 우울한 표정을 짓는 이지은을 보니 이쪽 역시 최면이 확실하게 자리 잡은 게 느껴졌다.
"많이 걱정돼?"
"당연히 걱정되죠!"
뭘 당연한 걸 묻냐는 듯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목소리 높여 대답하는 이지은의 눈빛에 다른 마음은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
"사실 너한텐 비밀로 해야 하긴 하는데.."
"알고 있어요!?"
이지은은 살짝 던진 미끼를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확 물어버린다. 속내를 숨길 생각은 조금도 없는 정직한 반응. 정혜수가 이지은을 걱정하는 이유를 알 만도 하다.
"너무 서운해하지는 마. 너한테 알리기엔 너무 미안한 일이라 그랬던 거거든."
"..도대체 뭐길래요?"
"조금 앉았다 갈까?"
남들이 들을 수도 있는 카페에서 떠들기엔 조금 시끄러워질 수도 있는 일이라, 천천히 길을 걷다가 근처에 있는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꺼냈다.
"혜수가.. 우리가 모텔에서 나오는 걸 봤나 보더라고.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고 있었다는데, 운이 나빴지."
"아..?"
시작부터 완전히 예상 밖인 이야기였는지 이지은은 입을 살짝 벌리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은 이지은이 걱정돼서, 미행을 했다는 게 원인이었지만 굳이 쓸데없는 설명을 늘릴 바에는 우연이라고 적당히 넘어가는 게 나았다.
"그, 그래서요..?"
"네가 먼저 말을 안 해주니까 섭섭했나보더라고. 그래도 뭔가 이유가 있겠지 하고 나한테 따로 연락해서 사귀기로 한 거냐고 물어본 거야. 그래서 뭐.. 사실대로 말했지. 사귀지도 않는데 사귄다고 말하는 것도 미안하니까."
"아, 아으.."
당황으로 물들어있던 이지은의 얼굴이 이번에는 부끄러움으로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을 보니 어지간히도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럼 제가 걱정 돼서..?"
"그것도 있긴 한데, 들킨 지는 사실 꽤 됐어. 지금 혜수가 저러는 건 다른 이유야."
"..뭔데요?"
푹 숙이고 있던 머리가 다시 슬그머니 위로 올라온다. 부끄러운 것도 부끄러운 거지만 다른 이유가 있다니 또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거겠지.
"처음에는 엄청 화냈었는데, 사정을 잘 설명하니까 어쨌든 넘어가 주긴 했어. 문제는 그다음이었지. 너랑 혜수가 워낙 친하잖아?"
"그, 그렇죠..?"
"그러니까, 네가 혼자만.. 음.. 어른이 된 것 같아서? 앞서나가는 것 같아서? 좀 불안했나 봐. 자기도 빨리 쫓아가고 싶은데, 상대가 없고 아무나 좋은 건 아니니까 나한테 부탁을 했거든."
"설마.."
이지은의 눈빛에 경악이 서린다. 막장 드라마에서도 개연성이 안 맞아 못 써먹을 전개였지만 최면을 이용한다면 이런 상황 정도는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었다.
"다른 감정은 전혀 없고, 그냥 자기 첫 경험만 하게 해달라고하더라고. 나도 거절하긴 했는데, 정 안되면 그냥 아무 남자나 낚아서 해버리겠다는데, 어떡하겠어. 어떤 사람일지도 모르는 사람이랑 하는 것보다는 내가 하는 게 문제 생길 일은 없는 거잖아."
"자, 잠깐만요."
이지은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내 말을 끊고 말없이 손끝을 가늘게 떨었다.
나름대로 정혜수에게 최대한 호의적으로 만들어두긴 했는데, 그래도 이런 상황을 갑작스럽게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냥 최면도 아니고, 중학생 때부터 베프로 지낸 친구 사이를 최면으로 강화시킨 상황이다 보니 이지은은 슬퍼하거나 분노하기보다는 최대한 상황을 이해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래서.. 혜수도 오빠랑 했고, 그래서 저한테 미안해하고 있는 거예요..?"
"일단은 그래. 문제는.."
"뭐가 또 있어요..?"
이제 당황보다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에 잠시 말을 멈췄다.
조금 더 시간을 길게 들여서 이런저런 준비를 했다면 모를까, 정혜수의 난입이 워낙 갑작스러웠던 탓에 제대로 밑밥을 깔아두지 못하고 최면을 걸어둔 탓이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뭐.'
정기가 아깝기는 해도 최면을 좀 더 세게 걸거나, 정 안 될 것 같으면 포기해버리면 그만이다. 어차피 이지은과 정혜수는 잠깐 즐기는 관계에 불과했으니 머리 아프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짧게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나랑 했던 게 너무 좋았대. 한 번 하고 나니까 성욕이 도저히 자위로는 해결이 안 돼서, 너랑 사귈 때까지만 만나 달라고 했어. 물론 우리가 사귀기로 하면 그때는 확실하게 그만두는 조건으로."
"......"
지금 이지은이 짓는 표정을 도대체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최대한 이해해보려고 해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는, 그래도 화는 내고 싶지 않아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어쩔 수 없나?'
조금 더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미리 걸어뒀던 정혜수를 향한 호감에 관한 최면을 조금씩 강화시켰다.
최면이 강해질수록 이지은의 눈빛에서 혼란스러운 기색이 조금씩 줄어들어 간다. 하지만 이걸로는 조금 부족했다.
[사귀는 것만 아니라면 정혜수에게 최민석을 조금은 양보해줄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두 사람이 만나는 건 불안하다. 셋이 함께, 자신이 보는 앞에서라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치 대안이라도 되는 양 방법을 떠오르게 만드는 최면. 이런 식으로 최면을 걸어두면 거기에 사로잡혀 그 외의 방법은 쉽게 떠올리지 못하게 되는 만큼 편리한 방법이었다. 정기 소모가 조금 심하긴 했지만, 두 사람과 3P는 꼭 해보고 싶었기에 그냥 써 버리기로 했다.
새로운 최면이 스며들자마자, 이지은은 잠시 눈살을 찌푸리며 골똘히 고민하다가 이내 표정을 풀고 무언가를 내려놓은 것처럼 힘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런 고민이 있으면 저한테 먼저 말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 오, 오빠랑 하고 싶었으면 한 번만 해봐도 되냐고.. 먼저 물어보든가."
"너무 그러지 마. 지은이 너도 나랑 사귀지도 않으면서 이렇게 된 거, 혜수한테 숨겼었잖아. 아무리 친구 사이라도 말하기 힘든 일은 있는 거지. 이번에 제대로 화해하고 더 친하게 지내봐. 응?"
"..그럴게요."
최면으로 다 해소되지 않은 감정은 자신에게 먼저 솔직하게 사실을 밝히지 않은 정혜수에 대한 섭섭함으로 변한 모양인지, 이지은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삐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분위기에서 데이트 하기에는 조금 그렇고, 차라리 지금 혜수를 불러서 셋이 얘기 좀 해보자. 내 입장에서 보면 너도 혜수도 너무 막무가내거든? 술 먹었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 기억하고 있지?"
"아, 알아요."
판은 내가 다 짜놓고 이런 소리를 하고 있으니 정말 어디까지 쓰레기가 되려는 건지 내심 찔리긴 했지만 잠깐 떠오른 생각일 뿐이었다.
정혜수에게 함부로 감정을 쏟아내지 않도록 자신이 술자리에서 보였던 모습을 떠오르게 만들고,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혜수한테는 내가 연락해서 상황 설명할게. 지은이 너는 만나서 어떻게 얘기할지 생각하고 있어. 무조건 화부터 내려고 하지 말고."
"알았다니깐요.."
"그래, 그래. 그럼 지금 연락하고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네."
마지막으로 이지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고는 소리가 닿지 않도록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핸드폰을 꺼내 정혜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예요?]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들려오는 짜증 섞인 목소리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온다.
조금 전까지 이지은의 멘탈을 케어하느라 나름 애쓰고 있었는데, 정혜수의 이런 태도를 보니 가소롭고 귀여운 느낌이 마음이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지금 어디야?"
[알 필요 없잖아요. 시간 되면 알아서 나갈 거니까 신경..]
"그게 아니라, 지금 만나야 해서 그래."
[네? 지은이는.. 무슨 일 있어요?]
지금 만나야 한다고 말했을 뿐인데, 곧바로 이지은에게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걱정부터 하는 모습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역시 정혜수가 이지은보다 훨씬 다루기 편했다.
"다른 건 아니고, 지은이한테 우리 관계를 들켰거든. 그래서 지금 셋이서 얼굴 좀 보고 얘기해야 돼서 그래."
[......]
덤덤한 목소리로 지금 상황을 전하자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다른 소리가 안 들리는 걸 보면 핸드폰을 집어던진 것 같지는 않고, 통화도 아직 연결돼 있으니 끊은 것도 아니었다.
"여보세요? 혜수야?"
[미친놈아!!]
잠깐의 정적 끝에 핸드폰 너머에서 거의 악을 쓰며 다해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개새끼, 변태 새끼, 나쁜 새끼에 이어 조금 더 직설적인 욕설 컬렉션을 수집한 기분이라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