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화 > 지은이랑 헤어져 주세요 대신.. (2)
이지은은 거짓말을 잘 못 한다. 중학생 때부터 알고 지냈던 관계였음에도 최근에서야 깨달은 사실이었다.
거짓말을 할 일 자체가 없었으니까. 자신 쪽에서 이지은이 거부감을 느낄 만한 화제는 거의 꺼내지 않은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지은이라는 사람 자체가 거짓말이라는 행위 자체를 떠올리지 않는 성격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지은이, 가장 친한 친구인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 정혜수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서운함과 약간의 짜증. 서운함은 이지은을 향한 것이었고, 짜증은 사태의 원인을 제공한 최민석을 향한 감정이었다.
며칠 전부터 수상한 거동을 보였던 이지은의 모습에 정혜수는 그만뒀던 미행을 다시 한번 시작했고, 어제와 오늘 두 사람이 조금 빠르게 데이트를 끝마치고 모텔에서 2시간 정도를 보내다 나오는 것을 확인했다.
두 남녀가 해도 저물지 않은 시간에 모텔에 가서 할 일이야 뻔하다.
때문에 이지은의 행동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이지은은 그런 화제에 면역이 없었으니까. 솔직하게 말하기에는 부끄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지은의 서투른 거짓말에 자연스럽게 동조한 최민석에게는 좋지 않은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것 역시 프라이버시의 영역임을 생각하면 제 3자인 자신이 화낼 만한 일은 아니다. 그러니까, 우선은 확인이 필요했다.
어디까지 진도를 나갔느냐는 말은 하지 못하더라도 사귀게 됐다는 말까지 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두 사람이 사귀는 사이인가 아닌가. 이것만큼은 친한 친구로서 확인이 필요한 일이었다.
'사귀기로 했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최민석이 지은이의 몸을 노리고 접근했다.. 라고 생각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애초에 먼저 접근한 쪽은 지은이였고, 최민석은 가볍게 어울려줬을 뿐이다.
어울리다 보니 그럴 마음이 들어서 그랬다? 이건 조금 그럴듯했지만 그랬다면 연인 사이가 되지 않을 이유가 있나? 어차피 진지하게 사귈 마음이 없다면 사귀자는 공수표쯤은 얼마든지 뿌려도 상관없을 테고, 그편이 더 가지고 놀기 쉬웠을 텐데.
"후우.."
카페 앞에 선 정혜수는 짧게 한숨을 쉬며 사방팔방 뻗어 나가는 생각을 잠시 접어뒀다.
직접 확인해보면 될 일이다. 본래라면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차분하게 확인하려고 했겠지만 이번에는 노골적으로 굴었다.
지은이가 택시를 타고 떠나자마자 메세지를 보냈다. 생각이 있다면 당연히 이상하다고 의심할 만한 타이밍이었고, 미행했다는 속내를 밝혀서라도 빠르게 답을 얻고 싶었다.
친구가 걱정돼서.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카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한쪽 구석진 자리에 앉아있던 최민석이 이쪽을 발견하고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여유로운 눈빛. 얼마 전까지만 해도 편안함을 느꼈던 그 눈빛이 조금 불편하게 느껴졌다.
*
허리까지 올라오는 짧은 하이웨이 스커트와 검은 스타킹. 이지은보다 큰 가슴을 강조하는 듯 몸에 착 달라붙어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는 회색 목 폴라티와 얇은 갈색 코트.
최근 이지은이 입고 다니는 패션이 누구의 센스인지를 짐작하게 하는 노출이 적으면서도 '여성'을 강조하는 옷차림이다.
'속옷은 조금 귀여웠는데. 이쪽도 마찬가지려나?'
하얀색과 연한 분홍색이 어우러진 귀여운 디자인의 속옷은 그것대로 예쁘긴 했지만 섹시한 느낌과는 조금 거리가 멀었다.
그런 잡생각을 떠올리는 사이에 조금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정혜수가 말없이 맞은편에 앉아 이쪽을 노려보고.. 있다. 완전히 적의를 품은 눈빛은 아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한다는 감정만큼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무슨 일로 만나자고 한 거야?"
"지은이 일이에요. 빙빙 돌려 말하는 것도 싫으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요. 오빠, 지은이랑 사귀고 있는 거예요?"
본인이 말한 대로 돌려 말하지 않는 직구 그 자체인 질문이다.
'이건 확실하게 알고 있다고 봐야겠네.'
우연히 본 건지 나와 이지은을 몰래 따라다니며 알아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보이는 정황도 그렇고, 지금 보이는 추궁하는 듯한 태도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일 태도는 아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어차피 조만간 한 번쯤 건드려볼 생각이었지만 예정에 전혀 없던 상황인 만큼 아직 제대로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나에 대한 호감을 품고 있었다면 일이 쉽게 풀렸겠지만, 지금은 의심과 적대감이 나에 대한 감정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 저쪽에서 날 좋아하게 하는 건 아무래도 손해가 너무 컸다.
"나랑 지은이 문제라고 해도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지?"
"정말로 둘이 사귀는 사이라면 일단은 그냥 넘어갈 생각이에요. 서로 좋아서 그러는 거라면 제가 끼어들 이유는 없으니까요."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대답이다.
결국 일단은 넘어가더라도 앞으로 지켜보겠다는 말이고,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면 끼어들 이유가 있다는 뜻이니까.
적당히 잡아떼고 의심을 푸는 건 쉽다. 하지만 그건 그냥 시간만 버는 방법에 불과했고, 결국 이지은을 통해 계속 거짓말을 하게 만들면 의심은 계속해서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할게. 지은이가 사귀자고 고백했는데, 내 쪽에서 거절했어."
"..그럼 같이 모텔에 들어가는 이유는요?"
눈동자가 살짝 떨리긴 했지만 정혜수는 무턱대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차분하게 이유를 추궁했다. 하지만 나에 대한 감정이 더 나빠진 것은 알 수 있었다.
"꼭 말할 필요가 있어? 그거야말로 진짜 사생활 문제인데."
"친한 친구가 사귀지도 않는 남자랑 모텔에 들어간다면 친구로서 걱정할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요. 방금 사귀고 있다는 대답이 나왔다면 저도 이렇게 추궁하진 않았을 거예요."
"지은이가 걱정돼서 그렇다는 거지?"
"당연하죠."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 이 부분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지은과 정혜수는 정말 단짝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사이가 좋아 보였고, 특히 정혜수 쪽은 내게 별다른 감정도 없으면서도 이지은을 위해 내게 여러 가지를 물어보고, 여러 가지를 떠보곤 했으니까.
'그렇게 친구가 걱정된다면야. 당연히 섹파 같은 관계는 용납 못 하겠지.'
불안이나 걱정, 짜증 같은 쉽게 떨쳐내기 힘든 부정적인 감정이야말로 최면으로 유도하기에 좋은 요소다. 그런 요소가 이렇게까지 겉으로 드러나 있다면 써먹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정혜수를 적당히 속여넘기고, 호감을 사려는 플랜은 취소다.
나는 일단 나와 이지은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정혜수에게 사실대로 털어놨다.
이지은이 술자리에서 폭주해서 내게 노골적으로 굴었던 일, 그날은 한번 밀어냈지만 그 다음 날에도 울 것처럼 매달려 결국에는 모텔까지 갔던 일.
상황을 그렇게 유도한 최면에 관해서는 당연히 숨겼지만 상황 자체가 워낙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기도 했고, 이지은의 성격과도 거의 어긋나지 않는 일이었으니 이상하다고 생각할 만한 여지는 거의 없었다.
"하아아.."
얘기를 끝까지 들은 정혜수는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 땅이 눈을 질끈 감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푹 숙여지는 머리를 막기 위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상황은.. 대강 알겠어요. 지은이치고는 너무 막 나가긴 했는데, 그거야 처음부터 그랬으니까요. 그래도 그렇지, 한 번 더 거절하실 수도 있었잖아요."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말하는데 마냥 무시하기도 힘들었어. 내가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할 만큼은 했다고 생각해."
"아무리 그래도.."
내 대답에 정혜수는 무어라 더 말하려다가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당연히, 그냥 넘어가려는 모습은 아니다. 뭐가 됐든 날 이지은에게서 떨어뜨리고 싶은 불만 가득한 표정. 지금쯤 머릿속으로는 날 설득할 만한 말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이성적인 대화. 좋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필요하지 않았다.
[최민석은 결국 이지은과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할 마음이 없다. 자신은 할 만큼 했으니 이제 마음 편하게 이지은의 몸을 가지고 놀 생각이다. 결국 최민석도 이지은의 몸 밖에 관심이 없는 쓰레기 같은 남자다. 최대한 빨리 이지은에게서 떨어지게 만들어야 한다.]
가뜩이나 나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정혜수의 마음을 부채질하는 최면. 거기에 최대한 빨리 이지은에게서 떨어지게 만들어야 한다는 최면은 그냥 정혜수의 본심이나 다름없다. 그냥 '최대한 빨리'라는 조건이 붙었을 뿐이다.
째릿. 정혜수의 눈빛이 알기 쉬울 정도로 적대감으로 물들어 내 쪽을 노려본다. 이런 눈빛은 한창 날 괴롭혀대던 유서연에게서나 느꼈던 건데. 조금 반가운 기분이었다.
"..지은이랑 헤어져 주세요."
"애초에 사귀고 있지도 않다니까."
"저도 그런 말이 아니에요. 말 그대로 지금 만나는 것도 그만두고, 그냥 엮이지 말아 달라는 거예요."
정혜수는 떠오른 생각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내뱉었다. 그만큼 최면이 잘 먹혀들었고, 진심이라는 뜻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갑자기는 무리지. 나도 당장은 면허를 따야 하니까 어디 숨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렇게 갑자기 딱 끊어서 무시해버리면 지은이는 더 상처받을 걸."
"그건.."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내뱉었던 만큼 그 뒤에 벌어질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할 틈이 없었던 정혜수는 내 말에 그대로 멈칫하고 다시 말을 멈췄다.
당연히, 여기서도 차분하게 생각할 틈 같은 걸 줄 이유는 없었다.
[최민석은 이지은의 감정을 방패로 삼아 이대로 계속해서 이지은의 몸을 가지고 놀 생각이다. 결국은 절대 이지은의 마음을 받아줄 생각이 없다.]
나라는 인간을 완벽하게 쓰레기로 만드는 최면. 그리고 여기서 다른 방향을 막아두기 위해 최면을 하나 더 추가한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헤어지게 만든다면 이지은이 크게 상처받을 것도 확실하다. 최민석이라는 인간에 대해 사실대로 밝힌다고 해도 콩깍지가 제대로 씌인 이지은은 절대 믿지 않을 것이고, 믿더라도 상처만 더 받을 것이다. 조금 시간을 들이더라도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만들어 이지은이 받을 상처를 최대한 줄여야한다.]
최면이 스며들수록 정혜수의 눈빛이 진지하게 변해간다. 명백하게 최면으로 유도된 사고였지만 정황과 거의 어긋나지 않는 최면들이라 정기의 소모는 적었다.
"..알았어요. 그럼 일단 당장 헤어지지는 말고, 면허를 따고 적당히 바쁘다는 핑계로 조금씩 거리를 둬 주세요. 그렇게 하다가 나중에.."
"안 돼."
"네?"
"안 된다고. 지은이는 진심인데 그걸 네 멋대로 결정하고 헤어지게 만드는 건 아니지. 나도 이게 잘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지은이가 스스로 결정하고 포기할 때까지는 어울려줄 생각이야."
"이, 이..!"
당당한 대답에 정혜수의 눈빛에 쌍심지가 켜지고, 입술을 달싹거리며 무언가를 내뱉으려다가 간신히 삼켜낸다.
나는 속으로 낄낄 웃음을 터트리며 새로운 최면을 흘려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