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화 >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도 비밀은 있다 (4)
취했다. 이지은은 그 사실을 부정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원래부터 술이 센 것도 아니었고, 정혜수와 마실 때처럼 안주도 먹고, 잡담도 나누며 천천히 마신 게 아니라 중간부터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식히기 위해 물처럼 벌컥벌컥 삼켜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는 취하지는 않았다. 많이 마시긴 했지만 처음 먹어보는 사케가 소주보다 도수가 약했던 덕분이었다.
차라리 완전히 취해서 다 잊어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속으로는 안 된다고 비명을 지르면서도 최민석에게 온갖 부끄러운 헛소리들을 쏟아내고, 결국은 모텔에 가서, 하자는 말도 안 되는 제안까지 해버렸다.
얼마 마시지도 않은 술에 취해 미친 듯이 날뛰어버린 자신과는 달리 최민석은 정말 어른스럽게 대처했다.
처음부터 가벼운 만남이었음에도 가벼운 마음으로 만나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자신의 마음에도 진지하게 대답해주며 다시 제대로 생각해보라며 취한 자신을 집까지 바래다줬다.
이것 역시 이지은이 심하게 취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택시를 타면서 최민석에게 집 주소를 말해준 것도 자신이었고, 택시에서 내려 아파트 호수를 말해준 것도 자신이었으니까.
그 모든 과정에서 이지은의 정신은 조금 알딸딸하긴 해도 사리 분별은 될 정도로 깨어 있었다.
"지은아. 집 다 왔다."
"네에.."
최민석의 부축을 받아 엘리베이터까지 타고 올라와, 문 앞에 선 이지은은 취한 척 몸을 살짝 비틀거리며 서서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그럼 푹 쉬어."
"..오빠도 고생하셨어요."
오늘따라 유독 짧은 인사조차도 자신을 배려하는 것처럼 느껴져 부끄럽다. 터질 것처럼 달아오른 얼굴을 최대한 의식하지 않으며 대답하고는 문을 닫았다.
삐빅-! 삑-!
시끄러운 전자음과 함께 철컥, 문이 잠긴 순간. 이지은은 그대로 현관에 주저앉아 화끈거리는 얼굴을 손으로 뒤덮었다.
"아우우.. 미쳤어 진짜아.."
도대체 왜 그랬을까. 술 때문에? 정말로 그랬다면 마음속으로 필사적으로 안 된다고 소리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마디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그 소리를 뿌리치기 위해 별로 쓰지도 않은 술을 잔에 따라 벌컥벌컥 삼켜댔다. 술은 핑계일 뿐이고, 스스로가 원해서 그렇게 행동했다는 뜻이다.
집까지 돌아오는 것도 혼자 할 수 있으면서, 굳이 최민석의 부축을 받아 함께 택시를 타고, 택시에서 내려서도 걷기 힘든 척 다시 부축을 받아 문 앞까지 도착했다.
그렇게 흑역사를 만들어놓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최민석이 걱정해주는 게 좋아서, 부축받으며 달라붙는 게 좋아서 그 상황을 즐겨버렸단 말이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자신을 부축하면서 힘이 잔뜩 들어간 팔근육과 탄탄한 어깨, 짧게 흘러나오는 숨소리에 다른 의미로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다.
"......"
무언가, 마가 낀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상황에서도 가슴이 두근거리며 쿵쿵 뛰어댈 리가 없다.
부모님은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다. 최민석은 항상 6시까지는 자신을 집에 돌려보냈고,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님이 오시려면, 아직 30분 정도는 시간에 여유가 있었다.
언제까지고 현관에서 엎드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지은은 살짝 비틀거리며 일어나 신발을 벗고 터덜터덜 걸어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잠그고, 불은 켜지도 않고 그대로 침대로 다가가 쓰러지듯 풀썩 드러누웠다.
'나 어떡해..'
차였다. 분명히 차였는데, 도저히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를 않는다. 오히려, 사귀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해진 것 같았다.
대학이 갈리면서 정혜수에게 남자에 대해 얼마나 많은 주의를 들었던가. 술자리를 조심해라, 가볍게 다가오는 남자도 조심해라, 착한 척 다가와도 결국은 어떻게 한 번 해보려는 남자일 가능성이 크다.
무슨 소리인지는 안다. 신경을 많이 쓰지 않았을 뿐이지, 이지은 역시 알 만한 건 다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최민석은, 자신 쪽에서 먼저 꼬셨음에도 넘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진지하게 생각해보라며 밀어냈다.
그 진지한 눈빛, 표정, 목소리가 떠오를 때마다 가슴이 쿵쿵 뛰어대서 얼굴만이 아니라 몸 전체가 화끈거렸다.
가뜩이나 취기로 덥고 나른한 몸이 달아오르는 느낌에 이지은은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문이 잠긴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
다음날. 자연스럽게 운전 학원에서 만난 이지은은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어깨를 흠칫 떨며 얼굴을 붉혔지만 의외로 눈은 피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시선을 맞췄다.
"뭐야. 어제 무슨 일 있었어요?"
"어제 지은이랑 술 마셨거든."
"그건 저도 듣긴 했는데, 별일 없었다고 했었는데?"
"별일은 없었는데, 지은이가 흑역사는 조금 생겼지."
"오, 오빠..!"
이지은의 반응에 뭔가 이상을 느낀 정혜수의 질문에 장난스럽게 대답하며 이지은과 살짝 시선을 맞추자 이지은이 제발 하지 말라는 듯 필사적인 시선을 보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맞은편에 앉아 있다가 옆자리에 달라붙어서 애교를 엄청 부리더라고."
"흐응.. 아무 일 없었다더니, 그런 짓을 하셨어?"
"모, 몰라아.."
정혜수는 내 적당한 거짓말에 한 건 잡았다는 양 짓궂게 웃으며 이지은을 살살 놀렸고, 이지은은 진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정혜수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평소처럼 실습이 끝나고, 학원 밖으로 나온 이지은은 최대한 평소처럼 행동하려는 듯 내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와 정혜수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내일 봐."
"그래. 설마 오늘도 술 마시는 건 아니지? 오빠, 지은이 또 취해서 애교 부리면 동영상 찍어놨다가 저한테도 보내줘야 돼요?"
"아, 안 마실 거거든!?"
"혹시라도 또 마시려고 하면 이번엔 제대로 찍어서 보내줄게."
"오빠아..!"
거짓말도 서툰 주제에 이지은은 필사적으로 부끄러운 척, 하지 말라는 듯 어깨를 찰싹찰싹 쳐댄다. 여전히 어색한 연기긴 했지만 그냥 부끄러워서 어색하게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모습도 아니었다.
정혜수를 먼저 보내고, 어디로 갈까 하다가 분위기부터 환기시킬 겸 팔짱을 낀 이지은을 천천히 잡아끌며 거리를 걸었다.
"어제는 많이 취했던 것 같은데, 몸은 좀 괜찮아?"
"..괜찮아요."
이지은은 '어제'라는 단어에 깜짝 놀란 것처럼 어깨를 흠칫 떨었다가 짧게 심호흡하며 대답했다.
"오빠는 어제 일 신경 안 쓰니까 너무.."
"아, 안 돼요."
"응?"
"..제대로 신경 써주셔야 된다고요."
최면이 생각 외로 효과가 잘 먹혀들었던 걸까. 일단은 다시 살짝 거리를 벌려 이지은을 안달 나게 만들 생각이었는데. 지금 눈빛을 보니 하루 만에 제대로 마음을 다잡은 것 같았다.
"지은아."
"..들어주세요. 오빠한테 제가 어린애처럼 보인다는 것도 알았고, 오빠가 당장 연애할 생각이 없다는 것도 알았어요. 그래도 제가 무조건 포기해야 한다는 건 아니잖아요."
개인적으로 말을 따박따박 말 끊어먹는 건 좋아하는 행동이 아니었지만 이렇게 '당해주는' 상황이라면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었다.
"어제, 술 깨고 다시 생각해보라고 했었죠? 다시 생각해봐도 저는 상관없어요. 오빠랑 그, 그런 거.. 해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섹스라고 제대로 말도 못 하고 부끄러워서 얼굴이 새빨개진 주제에 말은 잘한다. 필사적인 모습이 기특해서 당장이라도 쓰다듬어주고 싶을 정도였다.
"괜찮은 거랑 좋은 건 달라 지은아. 아무리 그래도 사귀지도 않는 사이에 그러는 건 아니야."
"..그렇게라도 안 하면 방법이 없잖아요. 안 사귀면 어때요. 그래도 서로 그, 그렇게 하다 보면 정도 들고, 어린애처럼도 안 보일 거예요. 그러다가 나중에 마음이 변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결국은 사귀지 않아도 좋다는 말까지 나와버렸다. 이 정도면 일단 내가 원하는 단계까지는 충분히 왔다고 할 수 있었다.
"안 변하면? 그땐 포기할 수 있어? 정말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그건.."
"그리고, 지금이야 오빠가 일도 그만두고 면허 딴다고 쉬느라 이렇게 매일 만나고 있는 거지, 면허 따고 나면 다시 바빠져서 지금처럼 매일 만나지도 못해. 주말에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네가 원하는 대로 되는 건 더 힘들어져."
거짓말이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이상 내가 다시 일자리를 구할 일은 없을 테고, 내 시간은 전부 내가 즐기기 위해 쓸 생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지은에게 원치 않는 시간을 쓸 생각은 없었다. 내가 만나고 싶으면 만나고, 만나고 싶지 않으면 만나지 않는, 그런 관계를 원했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진짜 쓰레기네.'
알 게 뭔가. 양심은 처음 최면을 쓰기로 하면서 버렸고, 지금은 그런 게 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결국은 나만 편하면 그만이었다.
최면에 걸린 이지은은 결국 나를 포기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부릴 수 있는 배짱이었다.
아예 대놓고 빨리 포기하라며 내뱉는 말에도 이지은은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내 눈을 똑바로 보고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상관없어요. 어차피 저도 대학 생활 시작하면 바빠질 테고, 서로 시간 날 때 만나면 되는 거잖아요. 오히려 지금처럼 매일 만나는 게 이상한 거 아니에요? 저는 상관없어요. 오빠한테 다른 여자라도 생기는 거 아니면 포기 안 할래요."
"하아.."
해냈다.
머리가 아프다는 듯 지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지만 본심은 드디어 해냈다는 생각에 춤이라도 추고 싶을 지경이었다.
"..알았어. 그렇게까지 말하면 거절하는 쪽이 더 나쁘겠지. 그래도, 나중에 조금이라도 아니다 싶으면 바로 그만둘 테니까 말해. 알았어?"
"..알았어요."
"그럼 가자."
"어, 어딜요..?"
"모텔. 가서 해보자고 했잖아. 왜, 막상 하려고 하니까 무서워? 무서우면 말해. 오빠는 안 해도 상관없어."
"아, 안 무섭거든요!? 그냥 너무 갑작스러워서 놀란 거예요! 가요!"
살짝 도발하듯 말하는 것만으로도, 발끈해버린 이지은은 오히려 자기 쪽에서 내 팔을 붙잡고 앞으로 끌어당겨 걸음을 재촉했다.
당장 이쪽 방향에 모텔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디가 됐든 다음 목적지가 모텔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