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화 >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도 비밀은 있다 (3)
가게 안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은 이지은은 가게 안의 조용한 풍경에 긴장하던 것도 잊고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빙 둘러봤다.
"이런 가게는 처음 와봐요."
"혜수랑 한 번 마셔 봤다고 했었지? 그때는 어디서 마셨는데?"
"그냥 편의점에서 소주랑 과자 이것저것 사서 먹었죠. 술 마시는 게 궁금하기도 했고, 같이 주량 파악해보자고 마셔본 거였거든요."
"주량? 얼마나 되는데?"
"저는 반병 정도 먹으니까 알딸딸하더라구요. 일단 한 병씩만 먹으려고 두 병 사 갔었는데, 혜수는 한 병 반 먹을 때까지도 얼굴만 조금 빨개지고 괜찮았어요."
정혜수의 한 병 반은 조금 의외였지만 이지은은 술이 약하다는 뜻이다.
나는.. 솔직히 내 주량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겠다. 군대 가기 전에 친구들이랑 먹었던 게 마지막이었던가? 술에는 거의 손도 안 대고 안주만 집어 먹었었다.
두잔? 세잔? 그쯤 먹었던 것 같은데. 그 이후로는 술에 손도 대지 않았다. 맛이 없다는 건 그때 알았고, 세상에 먹을 건 많았으니 굳이 마실 필요를 느끼지 못했으니까.
'사케? 소주랑은 다른 건가?'
한창 일하러 다닐 때는 유서연과 이것저것 먹으러 다니긴 했지만 일하는 도중이기도 하고, 내가 술을 안 좋아하는 것도 있어서 술을 마신 적은 없었다.
어쨌든, 술을 마시러 왔으니 사케 하나에 제일 비싼 모듬 튀김을 주문했고, 그 사이에 다시 긴장 모드로 들어가 버린 이지은과 어색하게 잡담을 주고받는 사이에 술과 안주가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처음 먹어보는 사케는 소주보다는 맛있었다. 마냥 씁쓸하기만 한 소주와 달리 부드럽고, 은은한 단맛도 느껴졌다. 그래도, 굳이 이런 걸 마실 바에는 사이다나 한 캔 마시는 게 낫다는 게 결론이었다.
"..소주는 그냥 쓰기만 해서 맛없었는데. 이건 좀 괜찮은 것 같아요."
이지은 역시 잔에 따른 술을 조심스럽게 입 안에 흘려 삼키고는 조금 풀어진 표정으로 같은 결론을 내렸다.
"난 그냥 콜라나 사이다 같은 게 나은 것 같은데."
"그게 뭐에요. 애 같아."
"뭐, 술 좋아하면 어른인가? 오히려 그런 생각이 더 애 같은 거야. 괜히 나이도 안 찼으면서 몰래 술 사 먹는 애들이 어른스러워 보이지는 않잖아? 오히려 철없어 보이지."
"......"
별생각 없이 던진 말에 이지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런가?' 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럼.."
"응?"
"..오빠는 어떤 게 어른스러운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뜻밖의 직구다. 처음 데이트했을 때처럼 긴장하는 일도 없어졌고, 흐름을 생각하지 않고 적당히 대답해버렸더니 이런 요망한 질문이 되돌아와 버렸다.
딱히 잘못은 아니지만 내 입장에서는 컨닝 같은 질문이라, 그대로 본심을 들려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글쎄. 자기 행동에 책임만 질 수 있으면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애처럼 구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고, 힘들게 자라서 어른 뺨치게, 오히려 어지간한 어른보다 똑 부러진 애들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책임.."
이지은은 한결 진지해진 표정으로 책임이라는 단어를 중얼거렸지만 당장 어떻게 책임감을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 대답으로는 자신이 애가 아니라는 걸 의식시킬 방법을 떠올리기 힘들 것이다.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냥 살다 보면 그렇게 되는 거니까. 애가 책임감 있게, 어른처럼 행동하는 것도 마냥 좋은 일은 아니니까. 애들은 애들답게 행동하는 게 좋은 거야."
"치이.."
이지은에게 이 문제를 신경 쓰지 말라고 한다는 것 자체가 본인을 애 취급하고 있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이지은 역시 내가 은근하게 비친 뉘앙스를 읽어냈는지, 다시 표정이 침울해지는 게 보였다.
그리고는, 분을 삭이려는 것처럼 조그마한 잔에 다시 술을 따라 입에 털어 넣고는 그대로 꿀꺽 삼켜버렸다.
'도수가 낮아서 금방 취할 것 같지는 않은데.'
지금의 술자리는 계획에 없던 일인 만큼 이지은이 취하건 말건 계획에는 별 지장이 없겠지만, 그래도 이지은이 취해서 어떤 행동을 할지는 나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취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정도는 하고 있었다.
"..오빠는요?"
"나?"
"오빠는 스스로가 어른이라고 생각해요?"
"글쎄. 직장 생활도 해보고, 부모님한테 손 벌린 적 없이 살긴 했는데. 이런 걸로 딱 잘라 어른이라고 하는 것도 또 웃기긴 하네. 지은이가 보기엔 어떤데? 내가 어른 같아?"
"..그런 것 같아요."
이런 오글거리는 대화는 영 익숙치 않은데, 그래도 일단은 태연하게 대답하며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내 자연스러운 대답에 이지은은 잠시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다시 한번 잔에 술을 따라 그대로 입 안에 털어 넣고는 취하지도 않고 용기를 얻은 것처럼 입을 열었다.
"그럼 저는 어때요..? 어른 같아요?"
아까와 마찬가지로 직구나 다름없는 질문이긴 했지만 이번에는 나한테 유리한 질문인지라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글쎄. 그냥 귀여운 동생 같은 느낌?"
"우으.."
결국은 내 입으로 직접 어른처럼 보이지는 않는다는 대답을 들은 이지은의 표정이 침울한 수준을 넘어 땅을 파고 들어갈 것처럼 우울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지은은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뜨더니, 그대로 다시 술을 한잔 따라 꿀꺽 삼키고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오빠, 그거 알아요?"
"뭔데?"
"남자들은 군대 가서도 키가 크기도 하는데, 여자들은 보통 중학생 2, 3학년 정도면 성장판이 닫힌대요. 아무리 늦어도 어지간하면 고등학생 1, 2학년 때쯤에는 성장기가 끝나고요."
"그래?"
그럼 유서연은 고등학생 때 이미 가슴이 E컵이었다는 걸까. 아니면 가슴은 더 자랄 수 있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미성년자까지 건드릴 생각은 없지만, E컵 고등학생이라는 단어가 가져다주는 충격은 확실히 대단했다.
"그러니까, 저도 이미 몸은 다 자랐다는 거예요. 지금이나 오빠처럼 스물넷이 됐을 때나, 큰 차이는 없다는 거죠."
"그렇겠네."
이지은이 하려는 말은 대강 이해했지만, 적당히 술을 한잔 삼키며 모르는 척 적당히 넘어갔다. 외모가 크게 변하지 않더라도 분위기는 점점 성숙해진다. 그 부분 역시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내 시큰둥한 대답에 이지은은 다시 한번 술을 따라 벌컥 삼킨다. 이걸로 다섯 잔째. 아무리 소주보다 도수가 약하다지만 이렇게 몇 마디 하고 한잔 씩 삼키며 빠르게 마신다면 금방 취할 수밖에 없다.
'조금만 더 끌면 취하겠네.'
내 쪽에서 어떻게 유도할 필요도 없이, 자기 스스로 벌컥벌컥 술을 마시며 취기를 늘려가는 이지은 덕분에 나는 튀김이나 집어 먹으며 적당히 대꾸해주는 것만으로도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었다.
"오빠느은.."
취했다. 혀가 구불구불해진 정도는 아니지만, 살짝 발음이 풀어지고 바짝 힘을 주고 있던 눈에서 힘이 빠져나간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취했다고 알 수 있는 상태였다.
"제가 여자로 안 보이죠..?"
"그건 또 무슨 소리래? 이렇게 예쁜데, 당연히 여자로 보이지."
"그런 게 아니라아..! 보고 있으면 막 두근거리구, 껴안구 싶구.. 그런 거 있잖아요.."
애 취급은 그냥 최면의 방향성으로 정해놓은 설정일 뿐인데, 지금 늘어놓는 표현들을 보니 확실히 애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진짜 애도 아니고, 스무 살이나 돼서 드는 예시가 두근거리고, 껴안고 싶은 기분이라니. 이건 애 취급을 받아도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물론, 본인의 주장대로 몸은 충분히 자랐으니 따먹고 싶은 마음이 어디로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더 꼴리는 느낌도 있네.'
겨우 저런 말로도 얼굴이 새빨개지는데, 옷을 홀딱 벗겨 침대 위에 눕혀놓으면 무슨 표정을 지을지, 눈앞에 자지를 들이밀어 빨게 만들고, 자지를 자궁까지 닿을 정도로 깊게 쑤셔 박아 느끼게 만들면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했다.
"좀 취한 것 같은데, 오늘은.."
"안 취했거든여!?"
살짝 풀어진 발음으로 발끈하는 모습은 누가 봐도 취한 사람이 하는 대사였지만 본인은 진지할 것이다. 애초에 이지은이 내 말을 부정하면서 이렇게 목소리를 높인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오빠아, 솔직히 말해 봐여. 저랑 같이 다니면서 그런 기분 한 번도 없었어여? 진짜로? 그냥 애로만 보이냐구요. 저도 이제 성인인데에.."
그렇게 도수가 센 것도 아니고, 그런 술을 기껏해야 한 병 조금 넘게 마셔놓고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취한 것도 있겠지만 그동안 애 취급받았다는 최면에 걸려 마음속에 쌓아놓은 감정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예 없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아직 어린 애한테 그러면 안 되니까.."
"애 아니라구여. 저도 이제 성인이자나여. 민증 보여줄까여?"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라.."
"똑같거든여? 몸도 다 컸구, 법적으로도 성인인데, 애 취급하면 안 댄다구여. 네?"
급발진이 장난이 아니다. 이제는 자기 스스로도 브레이크를 걸 마음이 완전히 사라졌는지, 멈추지 않고 새로 시킨 술병을 집어 들고 잔에 따라 시원스럽게 원샷해버린다.
"제가 제대로 어른인 거 보여줄까여? 지금 바로, 네? 모텔에 가서, 마악..! 저도 할 수 있다구여..!"
'차라리 시끄러운 가게로 갈 걸 그랬나?'
술집에 들어오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아직 가게에는 손님이 없었지만 주방 쪽에서 흥미 가득한 시선으로 이쪽을 구경하고 있는 가게 직원은 있었다.
딱히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아니니 남들이 안다고 해서 문제 될 일은 없었지만 가능하면 아무도 모르게 일을 진행하고 싶었던지라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지은아."
"네..?"
"정말로 오빠랑 그런 거 하고 싶어? 그래도 괜찮아?"
"괘, 괜찮거든여..?"
그런 것 치고는 대답하는 목소리가 슬금슬금 기어들어 가고 있다.
자기 쪽에서 멋대로 기세를 타고 떠들 때는 괜찮았지만, 막상 이쪽에서 정색하고 따지고 들어오니 취기로 올라왔던 기세가 주춤하고 있는 것이다.
"지은이가 예쁘지 않아서, 어른 같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라, 오빠는 아직 연애를 할 마음이 없어서 그래. 그래서 지은이가 하고 싶은 대로 못 해주는 거야. 실망하게 해서 미안하지만 오빠는 그래."
내가 한 말이 어지간히도 충격적이었는지, 이지은은 헛숨을 삼키며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은 일단 집까지 데려다줄 테니까. 어떻게 하고 싶은지는 집에 가서 푹 자고, 내일 술 깨고 나서 생각해봐. 사람 감정은 마음대로 못 하는 거니까. 그래도, 이렇게 술에 잔뜩 취해서 그렇게 행동하는 건 안 되는 거야. 알았지? 자, 일어나자."
"으으.."
이번에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의자에서 일어나 몸에 힘이 빠진 이지은을 일으켜 부축하고, 그대로 계산을 마치고 가게를 나서 택시를 잡았다.
본래라면 태워서 보내야겠지만 지금은 이지은이 많이 취하기도 했고, 도저히 멀쩡한 상태라고 볼 수는 없어서 이지은이 사는 아파트까지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태워 보냈다.
그리고, 어느새 반쯤 잠이 들어 꾸벅꾸벅 졸고 있는 이지은에게 새로운 최면을 거는 것 역시 잊어버리지 않았다.
‘차였지만 아직 포기하고 싶지 않다. 오빠가 날 여자로 의식하고 있다는 건 알았으니, 몸으로라도 유혹하고 싶다.’
당연히, 정혜수에게는 비밀이라는 전제 조건이 붙은 최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