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화 >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도 비밀은 있다 (2)
이지은은 옷차림을 바꾸기 시작한 뒤부터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들의 시선이 바뀐 것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평소라면 힐끔 눈이 마주치며 살짝 위아래로 움직이기만 했던 시선들이 중간중간 특정 부위에서 머무르며 힐끔 이라는 수준을 넘어선 탓에 모를 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부끄러워..'
그 변화의 원인이 자신의 옷차림이라는 걸 아는 이지은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그런데, 유독 최민석의 반응만이 변하질 않는다. 아니, 이제는 다른 남자들처럼 조금씩 힐끔거리는 시선이 생겨나긴 했지만 결국 자신을 애 취급하는 태도만큼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옷을 더 과감하게 입어야 하나?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혜수도 너무 싸 보이는 옷은 안 된다고 랬구..'
노출이 많다고 해서 무조건 싸 보인다는 건 아니지만, 하의를 아예 안 입은 것 같고, 배를 넘어서 복부를 훤히 드러내고, 아슬아슬하게 골반까지 드러내는 그런 옷은 도저히 입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계속 애로만 보이는 것도 싫구..'
조금, 조금 많이 부끄럽긴 하지만 최민석 한 명에게만이라면 부끄러운 모습이라도 보여줄 수도 있다. 아니, 조금 보여지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 한 명에게만 다르게 보이는 옷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속옷..?'
모두에게 똑같이 보이지만 내가 보여주고 싶은 사람에게만 보여줄 수 있는 옷.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이지은의 얼굴이 불이라도 난 것처럼 화끈 달아올랐다.
도대체 무슨 수로 최민석에게 속옷을 보여준단 말인가. 남녀 사이에 속옷을 보여줄 일이라고는 그, 그런 일 밖에는 없지 않은가.
"아으으.."
이지은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넘어 펑 터져버릴 것만 같은 열기에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침대 위로 발을 동동 굴러댔다.
보건 수업 때 배운 지식 정도는 있다. 거기에,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호기심에 야동을 찾아본 경험도 있는 이지은이었기에 최민석과의 그러한 일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두 남녀가 침대 위에서 알몸이 되어서.. 그러니까, 자신 역시 옷을 완전히 벗은 채로 최민석과 마주해 몸을 겹치고, 남성의 '물건'을 몸으로 받아들이고 사정할 때까지 움직인다.
배경으로 써먹을 지식이 너무 부족한 탓에 이지은의 상상은 조잡하기 짝이 없었지만 동시에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핑핑 돌 정도로 자극적이기도 했다.
남자마다 크기가 다르다는데, 오빠는 클까? 처음에는 아프다고 했는데, 작았으면.. 아니, 그것도 좀 아닌 것 같다. 여자들이 가슴 크기에 신경을 쓰듯, 남자들 역시 물건의 크기가 중요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데이트 중에 몇 번인가 찰싹 달라붙으면서, 최민석의 몸이 단순히 키가 크고 어깨만 넓은 것이 아니라 몸 곳곳에 탄탄한 근육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 역시 떠올렸다.
그 감촉을 처음 느꼈던 날은.. 부끄럽게도 이불속에 들어가 다시 자위에 빠져들어 버렸다.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한 번 떠오른 생각이 도저히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아 다른 방법을 떠올릴 수가 없다.
애초에, 최민석과 처음 데이트를 했던 날부터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며 자위에 빠져들었던 이지은은 이미 최민석을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 오빠랑 그걸.."
차마 섹스라는 단어를 입에 담지 못하고 순화 시켜 중얼거리는 것만으로도 몸 안에서 무언가가 찌잉 하고 울리는 것만 같다.
쉽게 입에 담을 수 없는 일인 만큼 부끄럽고, 처음 해보는 일인 만큼 부끄러웠지만 분명히 해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아니, 지분을 따져 보자면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가장 클지도 모른다.
"나 변태인가 봐.."
성욕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거의 의식하지 않고 지냈을 정도로 적은 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저 마땅한 상대가 없었을 뿐이었다. 최민석과 만난 뒤로는 집에 돌아와 근질거리는 기분을 애써 무시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렇게 애 취급만 받다가 면허를 따고 지금처럼 매일 만날 기회마저 없어지면 그건 또 어떻게 한단 말인가.
최민석과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지만, 지금처럼 매일 만나 주지는 않을 것이다. 당장 이지은 본인도 3월부터는 대학 생활이 시작될 테니 바빠질 텐데.
매일 만나는 지금도 여자로 봐주지 않는 상황인데, 만나는 횟수까지 줄어들게 된다면 결국 최민석과 사귄다는 일은 요원해질 것이다.
생각이 점점 결론을 향해 나아간다.
최민석에게 어린 동생이 아닌 여자로 보여지고 싶다. 최민석과 그.. 성관계를 하고 싶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생각이었지만 이 두 가지는 결국 한 가지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해버리면 된다. 최민석과 하고 싶다는 생각은 그냥 해버리는 걸로 해결이 되고, 직접 몸까지 섞는다면 최민석도 더 이상 자신을 어린 동생이 아닌 한 명의 여자로 보게 될 것이다.
"으으으.."
알고 있다.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지나칠 정도로 성급한 결론이다.
하지만 이 말도 안 되는 방법이 문제의 해결과 욕구의 해소. 그리고 최민석과의 사이가 더 가까워진다는 것까지 생각이 미치자 거기에 사로잡혀 도저히 다른 생각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이, 일단 혜수한테.."
상담하기 위해 핸드폰으로 손을 뻗으려다 멈칫한다.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지만 이런 부끄러운 일까지 상담하는 건 너무 부끄럽다. 게다가, 굳이 상담하지 않아도 혜수라면 당연히 안 된다고 말할 게 뻔하기도 했다.
이미 대답이 결정된 상대에게 고민을 말하는 건 상담이 아니라 설득이나 다름없다. 이지은은 괜히 부끄러운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도 않았고, 정혜수와 이런 일로 말싸움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
"혹시 오늘 무슨 일 있어?"
"네, 네?"
카페 의자 맞은편에 앉아 손가락을 꼼지락대고 있던 이지은은 내 질문에 어깨를 움찔 떨며 놀란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오늘은 계속 표정이 안 좋아 보이길래.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싶어서."
"아, 아니에요."
이지은은 내가 본 여자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거짓말이 서투르다. 입으로는 아니라고 하고 있지만 불안해하고 내 눈치를 살피고 있다는 게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게 아니더라도, 다시 한번 새로운 최면을 걸어뒀으니 저렇게 고민하고 있는 것도 당연했다.
'최민석에게 애 취급받지 않기 위해서는 섹스를 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부끄러운 방법이지만 하기만 한다면 최민석이 자신을 여자로 봐주는 것은 확실하고, 한층 더 사이가 가까워지는 것 역시 확실하다.'
'해야 한다'가 아닌 '좋은 방법이다'라고 생각을 유도하는 방식은 여러모로 써먹기 좋은 방법이다.
강제성이 아닌 만큼 정기의 소모가 적고, 그러면서도 그 생각만이 계속 떠오르는 탓에 어지간해서는 유도한 방향으로 결론이 나버리게 되니까.
그렇게 스스로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위화감도 적다. 고민이 이상했을 뿐, 결론은 스스로 내린 것이니까. 약간의 실패 가능성과 시간이 조금 걸린다는 단점을 뺀다면 정기의 소모를 줄이면서도 강하게 최면을 걸 수 있는 방법이었다.
당연히, '정혜수에게 상담하기엔 부끄럽다. 상담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라는 최면 역시 걸어둔 덕분에 이지은 밤새 혼자 끙끙거리며 고민했고, 지금 역시도 고민하고 있기에 저러고 있는 것이리라.
"뭔지는 몰라도 고민 있으면 나한테 말해도 돼. 해결해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들어주는 건 할 수 있으니까."
"..네에."
털어놓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여기서 대뜸 나랑 섹스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성격이었다면 애초에 내가 최면을 걸 필요조차 없었을 테니까.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놀고 갈까?"
"버, 벌써요? 아직 5시밖에 안 됐는데."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으니까 일찍 가서 푹 쉬어. 그리고 너무 늦게까지 돌아다니면 부모님도 걱정하시잖아."
"우으.."
노골적인 애 취급에 이지은이 살짝 발끈했다가 금세 우울한 표정을 짓는다. 우스울 정도로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표정이라 재밌기까지 할 정도였다.
"피곤해 보이는데, 오늘은 택시 타고 갈래?"
"아, 아니에요."
"그럼.. 아직 저녁 먹기엔 조금 이르긴 한데, 맛있는 거라도 먹으러 갈까?"
"배도 아직.."
어린애를 달래는 듯한 말투가 이어질수록 이지은의 표정이 시무룩해져 간다. 얼마 들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데이트에 들어가는 비용은 전부 내가 부담했고, 시간이 조금만 늦어도 늦게 돌아다니면 안 된다는 이유로 택시까지 태워 보냈다.
그 모든 게 자신을 애 취급한다는 최면을 위한 밑 준비였다. 그동안은 배려로 느껴졌던 일들 역시 지금은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기 때문에 나온 행동이라고 느끼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우리 지은이 기분이 좋아질까."
"그, 그럼.."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같이.. 술 마셔줄 수 있어요?"
"술?"
이지은의 성격상 당장 모텔로 가자는 말은 하지 않을 게 뻔했고, 며칠은 더 고민하다가 폭주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뜬금없이 예상 밖의 제안이 튀어나왔다.
"..아, 안 내시키면 그냥.."
"마시는 거야 괜찮은데. 갑자기 왠 술이야?"
"그냥.. 혜수랑은 한번 마셔 봤는데 다른 사람이랑은 안 마셔봐서요. 오빠랑도 한 번 마셔보면 좋을 것 같아서.."
나쁜 제안은 아니다. 술에 취하면 평소보다 이성이 흐려지고 그만큼 속내를 드러내거나 사고를 치기 쉬워지니까.
'술은 별론데.'
부모님이 예전부터 술을 달고 살아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있고, 마셔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맛도 없고 취하는 느낌도 없어서 내 입장에선 그냥 비싸고 쓴 물이랑 다를 게 없었다.
그래도, 지금은 술이 목적이 아니었으니 가볍게 한두 잔 마셔주는 것 정도는 나쁘지 않으리라.
"시간이 조금 이르긴 한데, 그럼 조금만 마시고 집에 가자. 알았지?"
"..네에."
마지막까지 이지은을 어르는 말투를 잊지 않고 툭 던져 놓고는 그대로 일어나 함께 카페를 나섰다.
초저녁인 만큼 술집에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조용한 가게로 고르는 게 좋다. 당장 나와의 섹스로 머리가 복잡한 이지은이 취하면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르는 일이니까.
잔뜩 긴장해 팔짱을 끼고 말이 없어진 이지은을 이끌고 거리를 천천히 걸어다니며 간판을 살피다가 잔잔한 노래가 흘러나오는 술집으로 들어왔다.
일본어로 적힌 간판을 보니 일본식 술집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런 분위기의 가게라면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튀김 정도면 안주로 괜찮겠지.‘
같이 술을 마신다고 해도 바로 내가 원하는 일이 벌어질 거라는 확신도 없고, 안주라도 맛있는 걸로 먹자는 생각은 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