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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큐버스 시스템-174화 (174/775)

< 174화 >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도 비밀은 있다 (1)

딱 한 번뿐이긴 하지만, 이지은은 연애를 경험해본 경력이 있었다.

당시에는 서로 바쁜 고등학생이었던 때라 주말에 가끔 영화도 보고, 카페도 가고, 방학 때는 시간을 내서 놀이공원 같은 곳에 놀러 갔던 게 전부긴 하지만 애초에 연애라는 게 그런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하게 돼버렸다.

연애는 결국 호감이 있는, 좋아하는 사람과 하는 일이다. 전 남자친구에게 호감이 없었냐고 묻는다면 그런 건 아니겠지만, 이성으로서 두근거리는 마음을 품고 있지는 않았다.

그저 호기심. 연애라는 행위에 대한 호기심에 고백을 받아들였을 뿐. 실상은 그냥 연인이 아닌 남자인 친구와 영화도 보고, 카페도 가고, 놀이공원에 갔을 뿐이었다.

그건 연애가 아니었다.

생에 첫 연애, 아니 이걸 연애라고 부를 수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자신은 분명히 최민석에게 연애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최민석 역시 그런가?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했던 질문이었지만 이지은은 이 질문에 도저히 긍정적인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데이트 내내 긴장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주체하기 힘든 자신과 달리, 최민석은 늘 여유로웠고 편안해 보였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눈치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런 자신으로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최민석이 자신을 보는 눈빛에는 별다른 감정이 담겨있지 않았다.

기껏해야 귀여운 동생을 보는 정도의 시선. 번호를 따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사귀자는 말을 주고받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잘 쳐줘도 요즘 말로 가볍게 썸 타는 정도의 관계 이상은 생각할 수 없었다.

"내가 봐도 그렇긴 해."

최민석과의 데이트를 마치고, 정혜수와 만나 며칠간 했던 고민을 털어놓자 정혜수는 평소처럼 잠시 말없이 생각을 정리하고는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역시 그래?"

"처음부터 그런 느낌이긴 했어. 번호 따였다고 좋아하는 분위기도 아니었고,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 받아준 느낌?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안달 난 그런 느낌은 전혀 없었으니까."

적어도 정혜수가 보기엔 그랬다. 친해지고 싶어서 안달 난 쪽은 오히려 이지은 쪽이었고, 최민석은 그냥 조금 긴장했을 뿐 별다른 감정은 드러나지 않았었다.

"그래도 번호까지 줬는데, 요즘은 데이트할 때마다 그냥 애 취급받는 기분이란 말야. 겨우 네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살짝 삐진 듯 투털거리는 말투에는 드물게도 초조한 기색이 묻어나온다.

이지은과는 꽤 오래 알고 지냈지만 그녀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일은 거의 없었기에 살짝 걱정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오빠랑 사귀었으면.. 아, 아니.. 최소한 애 취급은 받기 싫어. 그래도 이제 스무 살인데, 의식 정도는 해줬으면 좋겠다구."

"결국 지금처럼 애매한 사이가 아니라 제대로 사귀고 싶다는 거네."

"그, 그렇지."

"하아.."

오래 어울린 사이인 만큼 부끄러워하면서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본심을 드러낸 대답에 정혜수는 힘없이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말하면 별로 가망이 없어 보인다.

네 살 차이. 그렇게 많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최민석의 입장에서 본다면 스무 살이면 이제 막 고등학생을 벗어났을 뿐인 나이였으니 어리게 보인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이제 데이트에는 따라가지 않고 있었지만 여전히 운전 학원에서는 꾸준히 마주치고 있었기에 최민석이 이지은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대강 알 수 있었다.

지금 느껴지는 분위기로는 이지은이 원하는 달달한 연인 같은 관계는 절대 무리였다.

"도대체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이러는 건지."

"그냥 좋은걸 어떡하라구.."

결국 이지은이 최민석에게 가지는 호감의 이유는 잘생긴 얼굴과 자신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특유의 '분위기' 뿐이다.

수입이 어떻고, 학벌이 어떻고, 재산이 어떻고, 그런 걸 따지지 않는 게 이지은답다면 다운 일이지만 결국은 얼굴만 보고 반한 얼빠라는 소리기도 했다.

'확실한 정보가 없는 게 아쉬워.'

부모님이 뭔가 사업을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들었지만 집안이 얼마나 풍족한 건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게다가 고졸. 공부는 그럭저럭했다고는 하지만 결국 중위권 수준이었다고 본인이 확실하게 밝혔다.

'그래도 조건만 놓고 보면 나쁘지 않긴 해.'

어쨌든 돈도 많고, 얼굴도 잘생기고, 성격도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 아닌가. 당장 결혼까지 생각할 것도 아니고, 연애 상대로는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 일단 옷부터 좀 다르게 입어보는 건 어때?"

"옷?"

"지금도 나쁘지 않긴 한데, 너무 평범하잖아. 대놓고 싼 티 나게 입으라는 건 아니어도 조금 더 얇게, 노출도 좀 있는 옷으로 입으라는 거지."

이지은의 센스가 나쁜 건 아니었지만 여자끼리 만날 때와 남자와 만날 때 입는 옷은 아무래도 차이가 있는 법이다.

그것도 상대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남자와 만날 때는 바지보다는 치마가 낫다. 치마도 이지은이 자주 입는 무릎까지 닿는 치마가 아니라, 허벅지가 살짝 드러날 정도가 되는 짧은 스커트가 나을 것이다.

옷도 하늘하늘하고 편안한 것보다는 조금씩이라도 몸매의 라인이 드러나는 옷을 입어야 한 번이라도 더 시선을 받을 것 아닌가.

본래라면 친구에게 권하고 싶은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무작정 남자를 꼬시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 보여주고 싶은 상대가 정해져 있다면 괜찮을 것이다.

"그, 그래도 이상하게 보면.."

"이상하게 봐줬으면 좋겠어서 상담한 거면서 뭘 그래? 지금..은 시간이 애매하고. 내일은 데이트하러 가지 말고 옷이나 사러 가자. 알았지?"

"으응.."

당장 나부터가 연애 경험이 없는데 이런 도움을 줘야 한다니. 스스로가 생각해도 우스운 일이었지만 친구를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분위기가 변했네?'

정확하게 말하면 이지은 본인은 그대로고, 옷을 입은 스타일이 바뀐 탓에 분위기가 달라 보였다.

눈으로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짧아져 허벅지가 반쯤 드러난 스커트에 평소에 입던 살색과는 대조되는 옅은 검은색 스타킹, 늘 입던 하얀 패딩이 아니라 얇은 갈색 코트에 몸매 라인이 드러나는 얇은 베이지색 스웨터까지.

노출이 거의 없으면서도 옷차림만으로도 '여자'라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게 썩 나쁘지 않은 옷차림이었다.

'그래도 나쁘진 않네.'

이런 변화는 예상 못 하긴 했지만 좋은 의미로 예상을 벗어난 변화였으니 딱히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이미 이지은에게는 '자기가 애처럼 보여서 연애 상대 취급을 못 받는 것 같다'라고 최면을 걸어뒀다. 그리고 점점 초조하게 만드는 최면을 걸다가 자기 쪽에서 먼저 날 모텔로 끌고 가게 만드는 게 현재의 계획이었다.

옷이 바뀐 것 정도는 계획에 별 차질을 주지 않는다. 그래도, 그저께 최면을 걸었는데 어제 하루 데이트를 거르고, 옷차림을 확 바꿔 왔다는 건 그만큼 최면이 효과가 있었다는 말이겠지만..

"어때요?"

이지은의 바뀐 옷차림에 대한 감상을 정혜수 쪽에서 묻는다. 이미 반쯤 예상하고 있긴 했지만, 옷차림을 바꾼다는 건 아마 정혜수의 아이디어였을 것이다.

그동안 내가 봐온 이지은은 굉장히 부끄러움이 많아서 이런 식으로 자기 몸을 무기로 쓸 생각은 하지 않았을 테니까.

지금도, 크게 노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치마만 조금 짧아지고 몸매 라인만 살짝 드러났을 뿐인데도 얼굴이 빨개져서 시선을 피하고 있지 않은가.

"예쁘네. 분위기가 확 달라졌는데?"

"그럼 전에는 안 예뻤고요?"

"예뻤지. 지금은 더 예뻐졌고."

더 해보라는 듯 살짝 밀어붙이는 정혜수의 질문에 살짝 살을 붙여 대답해주자 이지은의 얼굴이 한층 더 새빨갛게 물든다.

그래도 이제 일주일 넘게 어울려 다니면서 부끄러워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는데, 지금은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온 것처럼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상태가 돼버렸다.

하지만 그보다 신경 쓰이는 건 정혜수 쪽이다.

'신경 쓸 필요가 있어.'

이지은에게 최면을 건지 하루. 아니, 데이트가 끝나고 바로 만났다고 가정하면 반나절 만에 고민을 상담했고, 저렇게 부끄러워할 옷을 입도록 설득까지 마쳤다는 뜻이다.

아무리 사이가 좋다지만 고민을 털어놓는 게 너무 빠르다. 이대로 이지은이 날 몸으로 유혹하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는 최면을 걸었다면 그 방법에 대해서도 분명 정혜수에게 이야기를 꺼냈으리라.

그리고, 정혜수가 제정신이라면 친구가 만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남자에게 다리를 벌리는 걸 허락할 리가 없다. 당연히 안 된다고 막겠지.

정혜수가 아무리 안 된다고 해도 최면을 걸다보면 결국 자기 의지로 몸을 내주긴 하겠지만 굳이 방해를 받고, 굳이 정기를 더 쓸 이유는 없었다.

'미리 알아서 다행이야.'

내가 모르고 있었다면 모를까, 이미 알게 된 이상 정혜수는 이제 이지은을 내 손아귀에서 지켜낼 수 없게 돼버렸다.

"지은이는 아예 말이 없어졌네?"

"이, 이렇게 입은 건 처음이라 어색해서.."

평소보다 확 짧아진 치마가 신경 쓰이는 걸까. 대답하는 와중에도 아래쪽을 힐끔거리며 치맛단을 붙잡아 살짝 내리려다가 손을 멈춘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어울리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네에.."

칭찬에 대한 기쁨과 부끄러움이 뒤섞인 표정이 가학심을 마구 자극하고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넘어갔다.

원래 이런 건 참을 만큼 참았다가 침대 위에서 터트리는 게 제맛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최민석의 속을 전혀 모르는 정혜수는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최민석에 대한 평가를 단단히 다졌다.

'역시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남자라면 어쩔 수 없이 보게 되는 반응. 짧아진 치마와 매끈한 검은색 스타킹, 허리와 가슴 라인이 드러나는 얇은 스웨터.

이 모든 요소들을 눈으로 빠르게 훑어내렸음에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반응이 없다.

음심이 있는 남자라면 이지은의 바뀐 옷차림에 조금 더 호들갑을 떨면서 칭찬하고, 더 노골적으로 본심을 드러냈을 텐데 말이다.

정혜수는 분명 눈치가 빠르고 남의 속내를 잘 읽었지만, 그간 경험해온 남자들이 한창 왕성해진 성욕을 조절하기 힘든 중학생, 고등학생뿐이었기에 결국엔 자신이 다 잡아먹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진 사냥꾼의 여유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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