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서큐버스 시스템-168화 (168/775)

< 168화 > 운전 학원에서 번호 따인 썰 (5)

[응. 잘자!]

"..하아."

평소보다 묘하게 텐션이 높은 인사와 함께 전화가 끊긴 것을 확인한 정혜수는 잠시 연결이 끊어진 화면을 내려보다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이걸 뭐라고 할 수도 없고."

굳이 이지은에게 데이트 내용을 보고받지 않았어도 오늘 두 사람이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오늘 하루 종일 두 사람을 미행, 아니 따라다녔으니까.

두 사람이 오늘 어디서, 무슨 영화를 보기로 했는지는 전날 이지은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고, 미리 불러둔 택시를 타고 조금 늦게 영화관에 따라 들어갔다.

영화에는 별로 관심도 없었고, 행여나 최민석이 이상한 짓을 하지는 않을까 두 사람의 동태를 예의주시했지만 자신이 걱정할 만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영화관에서 나와서도, 카페에 들어간 두 사람은 분위기가 나쁘지 않아 보였고, DVD방에 들어갔을 때는 내심 철렁했지만 옆방에서 소리를 엿들어보니 엄한 짓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뭐라도 일이 있었다면 지은이의 표정에서 뭔가 티가 났을 텐데. 방에서 나왔을 때 표정을 보고 아무 일도 없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도 역시 한마디 해야겠어."

처음에는 최민석이 꼬셔서 DVD방에 간 줄 알았는데, 자기 쪽에서 가자고 했을지 누가 알았겠는가.

결과적으로 아무런 일도 없었을 뿐이지, 오늘 지은이가 보인 행동은 아무리 생각해도 당장 덮쳐졌어도 할 말이 없는, 남자를 오해하게 하기에 충분한 행동이었다.

"이제 애도 아니니까."

중학생 때 처음 만난 이지은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여러모로 눈에 띄는 타입이었다.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한다. 공부는 자신이 더 잘하기는 했지만, 이지은은 워낙 밝고 벽이 없는 성격이라 반 아이들과도 원만하게 지냈다.

친하게 지낼 만 하다.

어릴 때부터 눈치 좋고 영악한 성격이었던 정혜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기본적으로 물리적인 괴롭힘이 주를 이루는 남자들과는 달리 여자아이들의 괴롭힘은 은근하면서도 노골적이다.

자기들보다 예쁘고, 머리 좋은 상대를 목표로 이뤄지는 괴롭힘은 뒤에서 재수 없다고 까내리는 건 기본이고, 온갖 근본 없는 소문을 퍼트려 자연스럽게 주변에서 욕먹고 기피당하게 만든다.

유치원생, 초등학생 때부터 예쁘장하고 공부도 잘했던 정혜수는 그런 류의 괴롭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류의 괴롭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좋은 아군을 만들어둘 필요가 있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고, 그 대상에 딱 걸맞는 게 이지은이었을 뿐이다.

외모나 성적으로 사람을 판단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왕이면 예쁘고, 공부도 잘하는 애와 어울리는 게 좋았고, 이지은은 그런 조건들까지 훌륭하게 충족하고 있었으니까.

사이가 좋아지는 건 간단했다.

마침 서로가 어색한 학기 초부터 짝궁이었던 덕분에 자신이 노력할 것도 없이 이지은 쪽에서 먼저 조잘거리며 다가왔으니까.

처음에는 그냥 나쁜 인상을 심어줄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적당히 받아주며 친분을 쌓았고, 이지은에 대한 판단이 끝난 뒤에는 자신 쪽에서도 친근함을 드러내며 사이좋게 지냈다.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다면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이지은이 벽이 없고 순수한 성격이었다는 것뿐이다.

편했다. 상대의 생각을 읽으려고 하고,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서도 득실을 계산하는 건 타고난 성격이라 어쩔 수 없었지만 이지은과 함께 있을 때는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와 달리 그런 생각을 거의 하지 않을 수 있었다.

1학년이 끝나고, 2학년이 되며 반이 갈렸을 때는 이지은 쪽에서도 굉장히 아쉬워했지만 아마 자신이 몇 배는 더 아쉬웠을 것이다.

평생 혼자만 잘났다고 생각하며 지냈던 정혜수에게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반이 갈린 뒤에도 종종 이지은의 반을 찾아가 친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3학년 때 같은 반이 됐을 때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문제는 고등학교에 올라간 뒤부터 생겼다.

여자들만 모여 있던 중학교와는 달리 이지은과 함께 진학한 고등학교는 공학. 그러니까 여자 외에도 남자라는 새로운 문제점이 생겨났다.

자신도 이지은도 예쁜 얼굴 덕분에 남자애들과 척을 질 일은 없었지만 다른 의미로 일이 귀찮아졌다.

한창 몸도 자라고 성욕이 왕성한 시기의 남자들이 예쁜 여학생을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었으니까.

대부분의 남학생들은 자기들끼리 노느라 바빴지만 어딜 가나 튀는 녀석들은 한둘씩 있는 법이었고, 그런 녀석들은 자신이나 이지은을 어떻게 한번 해보겠다고 질리지도 않고 달라붙어 귀찮게 굴었다.

자신이야 그런 놈들한테 절대 넘어가지 않겠지만, 경계심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이지은은 그런 녀석들이 다가와도 경계하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려고 들었다.

'내가 지켜줘야 해.'

유일하게 절친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이지은이 그런 녀석들에게 고백까지 받고 있었으니 당연히 드는 생각이었다.

애초에 공부하러 온 학교에서, 고등학생이라는 중요한 시기에 연애나 하려는 놈들이니 하는 생각이야 뻔하다.

사소한 말투, 눈빛, 행동거지 하나하나에서 성욕과 골 빈 티가 나는 놈들을 걸러내는 건 쉬운 일이었다.

정작 중요한 건 본인의 의사긴 했지만 이지은 역시 자신을 믿는 덕분에 사귀자는 고백을 받을 때마다 은근한 관심을 보이면서도 자신에게 꼭 상의하곤 했기 때문에 설득 역시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1년, 2년을 함께 보내고, 다른 골 빈 녀석들과는 달리 열심히 공부하는 범생이 타입에 순수하게 이지은에게 반해서 사귀자는 상대가 나왔기에 괜찮을 것 같다고, 선택권을 넘겼다.

물론 둘이 사귀게 된 뒤로는 따로 이것저것 뒷조사도 해보고, 지금처럼 데이트에 몰래 따라가 보긴 했지만 아무런 일도 없었고, 결국엔 3학년이 되고 수능이 가까워지면서 자연스럽게 헤어졌으니 나쁠 게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은 갈렸지만 서로 만족할 만한 대학에 들어가 수험생 신분을 벗어났다.

본격적인 대학 생활이 시작되기 전에 뭘 할까 하다가 같이 면허라도 따놓자는 제안에 가벼운 마음으로 학원을 신청했다.

거기서 최민석을 만났다.

'저기 저 사람. 엄청 잘생겼다. 응? 그치?'

평소에는 남자 연예인에도 별 관심이 없던 이지은이 호들갑까지 떨어가며 관심을 보인 남자는 남들은 다 핸드폰이나 만지고 멍때리기 바쁜 와중에 재미도 없는 안전 교육을 열심히 보고 있었다.

'응. 잘생기긴 했네.'

보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눈을 깜빡이며 다시 한번 얼굴을 확인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은 연예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고, 여태 봐왔던 또래 애들과는 달리 어른스러운 분위기가 풍겼다.

분명 감탄할 정도는 되지만 남자에 별 관심이 없는 자신으로서는 감탄 한번 하고 끝날 일이다. 그건 분명 이지은도 마찬가지였을 텐데.

'와아..'

이번에는 뭔가가 팍 꽃힌 모양인지, 살짝 발그레해진 얼굴로 홀린 듯 남자를 쳐다보고 있다.

'저렇게 잘생겼으면 당연히 여자친구도 있겠지?'

'비율도 엄청 좋아. 키도 크겠다.'

'눈빛도 뭔가 조금.. 세, 섹시한 것 같고..'

잘생긴 건 알겠지만 그냥 TV, 컴퓨터만 켜도 잘생긴 남자가 넘쳐나는 세상에 이렇게까지 호들갑 떨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이지은은 어지간히도 그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렇게 마음에 들면 번호라도 달라고 해보지 그래?'

그냥 농담 삼아 던져본 말이었다.

연애 경험이라고는 애들 장난 수준밖에 없는 이지은이 생판 처음 보는 남자한테 번호를 달라고 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게 실제로 일어날 줄 알았으면 말하지 않았을 텐데.

최민석이 이지은에게 번호를 건네준 순간부터 정혜수는 빠르게 최민석을 관찰하며 어떤 성격인지 파악했다.

나이는 스물넷. 잘생긴 외모와는 달리 연애 경험이 거의 없어 보였다.

말을 걸린 순간 자연스럽게 이지은을 위에서 아래로 훑는 시선은 조금 거슬렸지만 남자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오히려 이지은의 외모를 확인한 뒤에도 갑자기 태도가 호의적으로 변하거나 음흉한 시선을 보내지는 않았으니 첫인상은 좋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의 데이트까지 지켜본 결과. 최민석은 이지은에게 큰 호감은 없이 가볍게 만나고 있을 뿐이지만 동시에 한창때의 욕구불만 남자애들처럼 욕구를 참지 못하고 일을 벌일 타입은 아닌 걸로 보였다.

'며칠만 더 지켜보고 문제없으면 손 떼도 괜찮겠지.'

정혜수의 시선은 대체로 정확했다.

최민석은 연애 경험이 없었으며, 여자 쪽에서 다가오는 상황에 익숙하지 않았고, 욕구 불만도 아닌 데다가 이지은에게 그렇게 큰 호감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그런 주제에 섹스 경험은 많고, 이지은에게 큰 호감은 가지고 있지 않아도 결국엔 따먹을 수는 있을 거라는 확신에 안달 낼 이유조차 없다는 걸 눈치 채지 못했을 뿐이다.

최민석에게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맛있는 요리를 눈앞에 뒀다는 정도의 인식밖에 없다. 정혜수가 최민석이라는 인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원인이었다.

*

"웅웁.. 쮸룹.. 쮸웁.. 쯉.."

"이제 좀 살겠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유서연에게 펠라를 받으며 느긋하게 피로를 풀었다.

일정 자체는 별거 없었지만 데이트라는 상황 자체가 처음인지라 이것저것 생각하고 신경 쓰느라 피곤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언제든지 먹을 수 있다고는 해도 당장 눈앞에 있는 먹잇감을 안 먹고 참는 것도 나름 힘들었고.

"예진이는 언제 일어나려나."

"후아.. 저도 깨어나는 데 나흘은 걸렸으니까 예진이도 그쯤 걸리지 않을까요?"

"그렇게 되면 내일이나 모레쯤에는 일어나겠네."

유서연 같은 경우에는 나처럼 바로 꿈속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아무리 깨어나려고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깨어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추측일 뿐이긴 하지만, 서큐버스 시스템을 얻고 길게 시간을 들여서 꾸준히 몸이 변했던 나와는 달리 갑작스럽게 몽마가 되면서 급하게 몸을 변화시킬 시간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싶었다.

과연 임예진은 원했던 만큼 가슴이 커질 수 있을까.

임예진이 잠든 이후로 몸 위에 이불만 덮어주고 한 번도 손을 대지 않은 탓에 임예진의 몸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 확인할 수도 없다.

이미 유서연의 변화를 한 번 체험한 뒤라 임예진이 어떻게 변할지 역시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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