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화 > 운전 학원에서 번호 따인 썰 (4)
이지은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내 팔에 매달린 자세 그대로 달라붙어 걸어 나왔다.
"히잉.. 오늘 잠은 다 잤다.."
"무서운 거 싫어하면 미리 말하지 그랬어."
"혹시 오빠 취향에 안 맞는 영화면 미안하잖아요. 제가 같이 보자고 꼬신 건데."
"괜찮으니까 다음에는 네가 좋아하는 걸로 보러 가자."
"다, 다음이요?"
그냥 생각 없이 권한 말이었는데, 이지은은 생각도 못 한 말을 들은 양 깜짝 놀라며 이쪽을 올려다봤다.
"애초에 영화 자체를 거의 안 보고 살았거든. 그래도 간만에 보니까 재밌더라. 이번에는 내가 좋아하는 걸로 봤으니까 다음에는 네가 좋아하는 장르로 하나 골라서 보자. 난 잘 모르니까 재밌는 걸로 골라줘."
"그럴게요!"
사실 굳이 다시 보고 싶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렇게 말해야 좋아할 것 같아서 한 말이었는데, 생각보다 좋은 멘트였던 모양인지 이지은의 표정이 확 밝아지며 기운찬 대답이 돌아왔다.
'인싸라는 게 사실 다 이런 걸 수도 있고.'
사람이 어떻게 무조건 남들이랑 친하게, 그것도 많은 사람이랑 어울리며 지내겠는가.
직장에서의 상하 관계처럼 마냥 굽힐 필요는 없음에도 적당히 상대에게 맞춰주고, 마음에도 없는 좋은 소리를 해주며 친구 사이에서도 사회생활을 하는 게 인싸들의 행동 원리일지도 몰랐다.
친구 사이에 좋은 건 좋고, 싫은 건 싫다고 딱 잘라 말하지 못하는 게 조금 이상하기는 해도, 그렇게 해서 이렇게 예쁜 여자들을 따먹을 수 있는 거라면 충분히 감수할 만한 일이었다.
"그럼 이제 영화도 봤고, 다음은 어디로 갈까?"
"으음.. 밥 먹기엔 너무 이르고, 노래방은 마지막에 가고 싶은데. 아, 볼링이나 스케이트도 괜찮겠다."
남자끼리 모였으면 그냥 피씨방이나 가면 일정이 끝났을 텐데. 노래방이야 나도 생각했었지만 볼링이나 스케이트장 같은 장소는 나로서는 생각도 못 했던 장소였다.
"아!"
팔짱을 끼고 걸으면서도 이런저런 데이트 코스를 조잘거리던 이지은은 갑자기 뭔가 떠올랐는지 짝 소리가 나게 박수를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카페 가서 같이 내일 볼 영화 정할래요? 저 혼자 고르는 것보다 오빠도 같이 고르는 게 좋잖아요."
"오..?"
영화 보기도 아니고 영화 고르기를 데이트 코스로 쓴다니.
이번에는 나도 모르게 '이게 인싸..?'하고 생각해버릴 정도로 신선한 제안이었다.
"어때요? 괜찮죠?"
"그래. 괜찮네."
"히히. 그럼 카페로 가요!"
이지은은 빨리 가자는 듯 앞장서 걸으며 내 팔을 이끌었다.
"우웅.. 이번에는 내가 사려고 했는데."
"애들이 무슨 돈이 있다고. 그냥 사줄 때 맛있게 먹어."
"치. 용돈 받은 거 있거든요?"
이지은은 애 취급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입술을 삐죽 내밀었지만 오히려 이런 모습 때문에 더 애처럼 느껴진다.
"오빠는 핫초코 좋아해요? 어린애 입맛이네?"
"괜히 폼 잡는다고 맛도 모르는 커피 먹는 것보단 낫지. 난 아직도 커피 맛은 모르겠더라."
솔직히 말하면 돈 낭비 같아서 몇 번 먹어보지도 않았고.
유서연이랑 동거하기 전까지는 식당에서 공짜로 나오는 자판기 커피 외에는 먹어본 적도 없었다.
"하긴. 저도 처음에 커피 먹을 땐 왠지 어른 같아서 맛도 모르고 먹었었는데."
"지금은 맛있고?"
"음.. 그렇게 맛있진 않은데 왠지 땡기는 맛?"
"그럴 거면 그냥 처음부터 맛있는 거 먹는 게 낫지."
"히. 그래도요."
그래도 이렇게 편하게 얘기를 주고받고 있으니 처음에 비해 확실히 뭔가 익숙해진 기분이다.
자리에 앉아 본격적으로 내가 기억하는 영화들을 쭉 나열해 주자 이지은의 표정이 빠르게 황당함으로 물들어갔다.
"아니, 저도 모르는 영화는 아닌데.. 다 너무 옛날 영화들 아니에요?"
"그렇긴 하지. 지은이 너는 무슨 장르 좋아하는데? 요즘 영화들이라고 하면 다 깡패 검사 형사 나와서 치고받는 거 아닌가?"
"에이. 그런 영화는 다 광고를 쎄게 해서 많이 아는 거지, 다른 영화들도 많이 나와요. 그 왜, 최근에는 오징어 게임도 난리였고, 설국열차나 기생충 같은 것도 엄청 떴었잖아요."
듣고 보니 다 어디서 들어본 제목들이긴 하다.
"저는 그거 되게 재밌게 봤어요. 세 얼간이. 그래서 한동안 인도 영화만 엄청 찾아봤었는데. 걔들은 꼭 분위기 좋아지면 춤추고 노래하는 거 알아요?"
"그건 들어본 것 같네. 학기 말에 다른 반은 그거 틀어줬었는데, 우리 반은 안 틀어줘서 못 봤지만."
"아, 그건 꼭 봐야 하는데! 영화관.. 에서는 이제 안 하겠네. 차라리 다음에 DVD방에 가서 같이 볼까요?"
"..DVD방?"
"네. 영화 안 보셨으면 DVD방도 모르시려나? 피씨방처럼 가게에서 직접 DVD도 빌리고 바로 볼 수 있는 방도 있어서.."
"알아알아. 가본 적은 없긴 해도."
DVD방을 몰라서가 아니라 다른 생각이 들어서 멈칫했다.
내가 아는 DVD방은 그냥 커플들끼리 들어가서 가게 몰래 물고 빨고 하는 장소였으니까.
모텔에 가면 될 걸 굳이 왜 하지 말란 곳에 가서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DVD방이라고 하면 그런 이미지만 떠올랐다.
'그러자고 꼬시는 건 아니겠지만.'
아직 그럴 만한 단계도 아니고, 분위기도 없다.
그냥 순수하게 나랑 영화가 보고 싶어서 한 말이겠지.
"나야 괜찮긴 한데, 넌 이미 본 거라 재미없을 텐데."
"명장면이 많은 영화라 괜찮아요. 원래 진짜 재밌는 건 두 번 세 번씩 봐도 재밌거든요. 괜히 명작 소리 듣는 영화가 있는 게 아니에요."
"그렇다면야 뭐. 가자. DVD방. 지금 바로 갈 거야?"
"생각보다 빨리 정했으니까 이것만 마시고 바로 가요!"
그래도 조금은 의식할 법도 한데. 얘는 남자랑 DVD방에 간다는 상황 자체에 아무런 생각도 없는 모양이다.
"그래도 조금 아쉽긴 하네."
"네? 뭐가요?"
"공포 영화도 한 편 더 보면 좋겠다 싶었는데."
"그, 그렇게 재밌었어요..?"
"그게 아니라. 지은이가 무서워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어서 또 보고 싶었거든."
"모, 몰라요..! 이제 공포 영화 싫어하는 거 들켰으니까 절대 안 볼 거예요!"
내심 말하면서도 너무 오글거리지 않나 싶었는데,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홱 돌리면서도 입꼬리가 움찔거리는 게 영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얼굴이 잘생겨져서 그런 걸 수도 있고.'
결국 돈 많고 잘생긴 놈들이 다 해 먹는 법이니까.
이후에는 DVD방에 가서 세 얼간이를 보고, 연달아서 이지은의 추천 영화를 한 편 더 보고 나서야 밖으로 나와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내일부터는 다시 운전 학원에서 만날 테고, 수업이 끝나면 다시 놀러 가자는 약속도 잡아뒀다.
딱히 노린 부분은 아니었지만, 주 5일 단위로 학원에서 매일 마주치게 되면 매일 데이트를 하게 될 수도 있을 테니 이지은을 자빠뜨릴 날이 빨리 찾아오게 될지도 몰랐다.
*
[그래서, 민석 오빠랑 영화관에 갔다가 DVD방에 가서 영화 두 편을 연속으로 보고 왔다고?]
"응응. 나야 이미 본 영화라 그렇게 재밌진 않았는데. 오빠는 재밌게 보더라구. 이럴 거면 공포 영화 말고 다른 거 골랐어도 괜찮았을 텐데. 아, 그래도 덕분에 오빠한테 귀엽다는 소리도 들었다?"
최민석과 헤어져 바로 집으로 돌아온 이지은은 곧바로 정혜수에게 연락해 오늘 있었던 데이트 내용을 자랑했다.
솔직히 말하면 시간 내내 영화만 봤으니 특별할 것도 없는 시간이긴 했지만, 그 상대가 최민석이라 그런 건지, 예전 남자친구와 여기저기 놀러 다닐 때보다 훨씬 더 즐거웠다.
[..DVD방에서는 별일 없었어?]
"응? 무슨 일?"
[그 왜, 있잖아. 학교다닐 때도 커플끼리 DVD방에 가면..]
"가면..? 아..!"
정혜수의 불안한 목소리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것도 잠시. 이내 그녀가 하려는 말을 눈치 챈 이지은의 얼굴이 사과처럼 새빨갛게 익어 들어간다.
"어, 없었어! 그냥 영화만 봤어! 데이트 첫 날부터 무슨..!"
[그래도 조심해. 겉으로는 다 아닌 척해도 그런 거 싫어하는 남자는 없어. 그렇게 무방비하게 굴다가 언제 큰일 날지 모른다?]
"미, 민석 오빠는 안 그래!"
[이제 겨우 하루 만났으면서 벌써 확신할 수 있어? 그리고, 민석 오빠가 널 보고 그런 생각을 조금도 안 했으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 아니야? 너한테 매력을 전혀 못 느꼈다는 소린데.]
"그런..가..?"
반사적으로 아니라고 소리치긴 했지만 정혜수의 말대로 정말 그런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면 그건 그것대로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다.
그동안 자신에게 다가왔던 남자들은 다들 조금씩 음흉한 기색이 느껴졌고, 그나마 흑심이 없었던 남자 친구도 가끔은 그런 시선을 느꼈었는데, 오늘 본 최민석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으니까.
[뭘 또 아쉬워하고 있어? 아무튼, 너무 무방비하게 있지 말라는 거야. 민석 오빠가 안 그래서 다행이지. 데이트 첫날부터 DVD방에 갔다가 그런 일이라도 생겼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안 생겼으면 된 거지 뭐. 오히려 오빠가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검증된 거 아니야?"
[철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나도 오빠가 나쁜 사람이라고는 생각 안 하는데,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거야. 이번에는 괜찮았다고 해도 다음에는 오빠 쪽에서 못 참고 널 덮칠 수도 있는 거고.]
"......"
왜일까. 정혜수의 진지한 충고에도 위기감이랄 만한 기분이 전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최민석에게 덮쳐지면 어떻게 될까. 그런 생각이 떠오른 순간 다시 한번 얼굴이 화악 달아오르고 방이 더워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야, 듣고 있어?]
"으응. 듣고 있어. 조심할게. 그래도 내일은 같이 스케이트 타러 가기로 해서 괜찮을 거야. 원래는 저녁 먹고 더 놀고 싶었는데 오빠가 늦지 않게 들어가라고 먼저 보내주기도 했고."
[..에휴. 그래. 얘기만 들어보면 나쁜 사람 같지는 않더라. 그래도 너무 무방비하게 있지 마. 알았어?]
"알았어. 알았어. 그럼 끊는다?"
[그래. 내일 보자.]
"응. 잘자! ..하아."
마지막으로 밝게 인사를 마치고 전화를 끊은 이지은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괜히 이상한 말만 해서.."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차라리 듣지 않는 게 나았다는 생각이 든다.
공포 영화 때부터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흐르는 대로 행동한 탓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던 것들이 떠오른다.
양팔로 매달렸을 때 느껴졌던 최민석의 탄탄한 팔 근육. 조금 뜨거운 체온. 묘하게 달콤한 체취. 영화에 집중하다가도 가끔 마주치는 시선.. 그런 것들을 떠올릴 때마다 방이 더워지는 것만 같다.
아니, 사실은 자신의 몸이 뜨거워지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안되는데에.."
안 된다고 한다는 말과는 달리 몸은 솔직하게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잠그고 불을 끄고, 다시 침대 위로 올라와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쓴다.
자위는 거의 하지 않는 편인데. 지금은 어째서인지 몸이 달아올라서 참을 수가 없었다.
..찌걱.
"아으.. 몰라아.."
치마 안쪽으로 살짝 손을 넣어보니 희미하게 질척한 습기가 느껴진다.
하기 전부터 이렇게 젖은 건 처음인데. 낯선 자신의 몸 상태에 당황하면서도 손가락 끝을 적신 애액을 조심스럽게 위로 옮겨 클리토리스에 바른다.
"하응..♡"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진한 흥분과 최민석을 떠올리며 한다는 행위에 대한 죄책감이 뒤섞인 자위는 여태 해왔던 자위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기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