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화 > 운전 학원에서 번호 따인 썰 (3)
운전면허 필기시험 같은 경우에는 수강생이 따로 시험을 합격하고 와야 하는 구조였기에 만나는 김에 같이 시험도 볼 겸 약속 장소를 시험장 쪽으로 잡았다.
"어려워졌다고 하더니, 문제가 너무 쉬웠어요."
"그러게. 난 혹시 몰라서 기출 문제도 풀어보고 왔는데."
"아! 저도요! 혼자만 떨어지면 창피할 것 같아서 공부해 왔는데."
다행히 시험은 셋 다 합격했다.
애초에 문제 자체가 너무 쉬워서 표지판 정도만 외워두면 초등학교 도덕 시험이랑 별반 차이도 없을 정도라 오히려 불합격하는 게 이상했다.
"그럼 바로 영화 보러 갈까? 아, 혜수는.."
"데이트하는 데 따라가서 뭐하겠어요."
그래도 셋이 모인 상황에서 두고 가려니 조금 신경 쓰였는데. 정혜수는 쿨하게 넘어갔다.
내심 정혜수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당장 여자 둘을 끼고 다니기에는 내 경험이 너무 부족하다.
최면만 쓴다면야 어떻게든 되겠지만 이번 목적은 섹스 외의 여자관계에도 익숙해지는 거였으니 우선은 한 명에게 집중하는 게 나았다.
'그래도 기회가 되면 먹겠지만.'
애초에 내 취향만 따지자면 이지은보다는 정혜수가 더 스트라이크 존에 가깝다.
밝고 활발한 이지은과는 달리 전체적으로 차분하면서도 장난기도 있는 게 기가 셀 것 같은 인상이었으니까.
'가슴도 크고.'
옷 위로 보이는 것만 치자면 정혜수의 가슴은 이지은보다 컸다. 여전히 컵 사이즈를 재는 법은 애매했지만 평균 키보다 조금 작은 체구에 저 정도 가슴이면 여유롭게 C컵 정도는 되리라.
유서연 덕분에 내 기준이 높아졌을 뿐이지, 정혜수 정도면 한국인 중에서는 그럭저럭 상위권이라고 할 정도는 됐다.
"저는 따로 택시 불러뒀으니까 먼저 가세요."
미리 택시까지 불러둔 걸 보면 처음부터 눈치껏 빠져줄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야 뭐. 우리 먼저 갈게."
"나중에 연락할게!"
마침 타이밍 좋게 택시도 잡힌 덕분에 이미 우리에게서 시선을 떼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정혜수를 뒤로하고 차에 올랐다.
차만 있었으면 더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었을 텐데.
여자들도 차 있는 남자를 더 선호하니 호감도를 얻기도 쉬울 테고.
어차피 면허만 따면 차는 바로 구할 수 있을 테니 불평할 필요는 없었지만 당장 필요한 상황에서 차가 없으니 여러모로 아쉬웠다.
"저기.."
"어, 왜?"
차가 출발하고, 옆자리에 앉은 이지은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정혜수와 셋이 있을 때는 괜찮아 보이더니, 다시 둘이 되자마자 어제처럼 우물쭈물하는 모습으로 돌아와 버렸다.
'이것도 귀여워서 괜찮긴 한데..'
이지은이 대화를 이끌고, 내가 그걸 보면서 배웠으면 편했을 텐데. 당장 나도 경험이 없어서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는 판에 상대까지 저러고 있으니 분위기가 너무 어색했다.
"혜수랑은 많이 친한가 봐? 졸업했는데도 같이 붙어 다닐 정도면."
"아, 네! 중학생 때부터 친구였거든요. 학원도 같은 데 다녔고, 고등학교도 맞춰서 갔고. 고등학교 때는 3년 내내 같은 반이기까지 해서 완전 베프에요."
열심히 떠올린 질문이 나쁘지 않은 모양인지, 우물쭈물하고 있던 이지은의 표정이 확 밝아지며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나보다도 쑥맥이나 다름없는 모습에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이지은 역시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고민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신기하네. 3년 내내 같은 반이라니."
"그쵸? 보통 새 학기에는 모르는 애들만 있어서 어색한데. 그런 것도 없어서 엄청 좋았어요."
이번 질문으로 발동이 걸린 이지은은 내가 물어보지 않아도 정혜수와 같이 다니며 있었던 일화를 얘기하거나 정혜수는 공부는 잘하는데 운동을 잘 못 한다거나, 분위기가 어른스러워서 부럽다는 등 온갖 얘기를 떠들어댔다.
사실 나로서는 별로 관심 없는 일이긴 했지만 덕분에 분위기가 확 풀어졌으니 적당히 맞장구만 쳐줘도 돼서 편했다.
"오빠는요?"
"응?"
"오빠는 공부 잘 했어요?"
이제 슬슬 꺼낼 만한 에피소드가 없었는지, 이지은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화제를 내 쪽으로 넘겼다.
"그냥저냥 중간 정도만 했지."
"운동은요? 키도 크고 어깨..도 넓은 거 보니까 운동은 좀 하셨죠?"
"학교 다닐 땐 안 했어. 최근에 헬스 좀 하면서 몸만 만든 거야."
학원 같은 건 당연히 꿈도 못 꿨고, 집도 공부할 만한 환경은 아니라 그냥 학교 수업만 열심히 따라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축구나 농구 같은 건 땀 흘리기 싫어서 안 했고.
"그럼 취미 같은 건요?"
섹스. 반사적으로 그렇게 대답하려다가 멈칫했다.
"운동이랑 게임 정도? 그 외엔 딱히 취미랄 건 없네."
"으음.. 그럼 좋아하는 음식!"
"밥류면 다 좋아해."
이지은은 어제 못했던 질문을 다 풀어내려는 듯 멈추지 않고 질문을 쏟아냈지만 나로서는 일방적으로 호구조사만 당하는 것 같아서 재밌진 않았다.
"대학은 어디 다녀요?"
"안 다니는데?"
"아.."
"신경 안 써도 돼. 내가 가기 싫어서 안 간 거거든."
이지은은 자기가 지뢰라도 밟은 것처럼 움찔하며 말을 멈췄지만 나로서는 딱히 기분 나쁠 것도 없는 일이다.
공부를 그렇게 잘한 편은 아니라 좋은 대학은 못 갔어도 가려고 했으면 갈 만한 대학은 얼마든지 있었다.
이것저것 장학금 제도도 많았고, 알바까지 하면 돈 문제도 그럭저럭 넘길 수 있었겠지만 그럴 바엔 일찌감치 군대나 갔다 오고 아무 데나 빨리 취직해서 돈이나 벌자는 생각이었다.
당시에는 결혼이나 연애 생각도 없이 나 혼자만 먹고살면 충분하다는 생각에 그랬었다.
"너랑 혜수는? 대학도 같은 데로 갔어?"
"..대학은 혜수가 너무 좋은데 붙어서 제가 못 따라갔어요."
다시 한번 분위기를 환기시킬 겸 화제를 돌렸지만 여전히 눈치를 보고 있다.
"어디 붙었길래?"
"고대요. 너무하지 않아요? 분명 중학생 때부터 같이 공부하고 같이 놀았는데 누구는 SKY 붙고 누구는 아랫급으로 떨어지고. 진짜 머리도 타고난 사람이 있긴 한가 봐요."
너무하다는 말과는 달리 말투는 자기 친구가 대단하다고 자랑하고 있는 투다.
처음부터 베프라고 하더니, 정말로 사이가 좋긴 한 모양이었다.
"대단하긴 하네."
나야 학벌에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이번에도 적당히 맞장구치며 화제를 넘겼다.
그렇게 대부분은 이지은이 내게 질문하고, 내가 적당히 맞장구쳐주며 가끔 질문하는 식으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뭐 볼지는 정해뒀어?"
"그게.. 최근에 나온 공포 영화 중에서 평가가 좋은 걸로 골랐어요. 제목이.. 아, 저거에요."
내 질문에 핸드폰을 꺼내 영화를 검색하려던 이지은은 잠시 멈칫하더니 매표소 위쪽에 있는 전광판을 가리켰다.
딱 봐도 '나 공포 영화입니다.'라고 광고하는 듯한 어둡고 시퍼런 배경에 사람들이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있는 덕분에 뭘 가리켰는지 헷갈릴 일도 없었다.
"잠깐 기다리고 있어. 표 사올게."
"아, 네!"
예전 같으면 영화는 같이 보는데 왜 내가 돈을 다 내야 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봤겠지만 지금은 당연하다는 듯이 자진해서 매표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내가 이지은과 진지하게 사귈 것도 아니고, 목적이 확실한 이상 표값이나 식사비 같은 사소한 돈 정도는 아까울 것도 없었다.
"좌석은 커플석으로 해드릴까요?"
연휴도 지난 평일 대낮이라 사람이 없는 덕분인지, 뒤쪽에서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이지은을 발견한 직원이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물었다.
"그렇게 해주세요."
여기 올 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느낌이 없었는데, 커플석이라는 말을 들으니 확실히 내가 연애 체험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확 든다.
그렇다고 해서 가슴이 두근거린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팝콘이나 콜라도 사갈까?"
"저는 괜찮을 것 같은데.."
"그럼 나도 됐어. 시간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미리 들어가 있자."
"..네."
택시에서는 그렇게 텐션이 높더니. 그새 또 긴장했는지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래도 이제는 영화만 보면 됐으니 굳이 분위기를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상영관으로 들어가 자리를 찾아 앉았다.
"커플석은 이렇게 생겼구나."
애초에 직접 영화관에 와본 것도 처음이었지만 자리가 칸마다 사이사이에 팔걸이가 자리 잡은 일반석과는 달리 커플석은 두 명이 앉을 자리가 소파처럼 이어져 가운데 팔걸이도 없었다.
"커플석.."
이지은 역시 커플석은 처음인 걸까. 뺨이 살짝 달아오른 채로 작게 중얼거리며 커플석을 내려다보고 있다.
"일단 앉자."
"아, 네!"
멍하니 서 있는 이지은의 어깨를 툭 치며 의자 쪽으로 살짝 끌어당기자 이지은은 깜짝 놀라면서도 내가 이끄는 대로 끌려와 내 옆에 앉았다.
"아으.."
어깨를 살짝 움츠린 채로 시선을 피하고 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그새 또 부끄러움 증이 올라온 모양.
이미 알고 있긴 했지만 이지은은 나 이상으로 이성에 대한 면역이 없었다.
'연애도 처음인 것 같고.'
연애 경험이 있었으면 이렇게까지 긴장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인기가 없을 비주얼은 절대 아니긴 했지만 예쁘다고 무조건 연애 경험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었으니 이해 못 할 일까진 아니다.
아무튼, 모처럼 영화관에 오게 됐으니 간만에 재밌게 영화를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오, 오빠..! 갔어요? 귀신 갔어요!?"
"이제 갔네."
"꺄악..! 다시 나오잖아아요..!"
유서연이 했던 예상이 맞았다.
이지은은 공포 영화를 싫어한다. 싫어하는 수준을 넘어서 아예 질색을 하는 수준이지만 내가 공포 영화가 좋다고 하니 무서운 걸 참고 공포 영화를 고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감동하거나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으.. 몰라아.."
거의 내 팔에 매달리듯이 달라붙어 꽉 붙잡고, 벌벌 떨면서도 어떻게든 영화는 봐야겠는지 화면을 힐끔힐끔 보다가도 조금만 무서운 장면이 나오는 순간 필사적으로 소리를 죽인 비명과 함께 눈을 질끈 감고 꽉 붙잡은 팔뚝에 고개를 파묻는 모습이 장난 아니게 귀엽다.
그동안 내가 안은 여자들은 대부분이 기가 센 편이기도 했고, 조금 성격이 유약한 타입이라도 이런 모습을 볼만한 상황은 없었으니 상당히 신선한 느낌이었다.
'..조금만 참자.'
마음 같아서는 영화고 뭐고 이대로 끌고 나가 모텔이든 어디든 가서 바로 박아버리고 싶을 정도.
연습이라는 제대로 된 목적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쯤 최면 한두 개는 걸고 밑밥을 치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충분히 연습이 됐다고 판단되는 순간 이 귀여운 얼굴을 밤새도록 앙앙대게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