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화 > 운전 학원에서 번호 따인 썰 (2)
정혜수와 저녁때까지 놀고 집으로 돌아온 이지은은 침대에 엎드려 핸드폰을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10분이 넘어가도록 노려만 보고 있는 핸드폰 화면에는 아직 아무런 대화도 주고받지 않은 깨끗한 메세지 창이 띄워져 있다.
운전 학원에서 본 최민석은 잘생긴 것도 잘생긴 거였지만 뭔가 풍기는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쿵쿵 뛰어대는 느낌이 들어서 도저히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지켜보고 있었더니 옆에 앉은 정혜수가 그렇게 마음에 들면 번호라도 한번 따보라고 농담조로 말했고, 평소라면 농담으로 받아들였을 말을 핑계 삼아 눈 딱 감고 도전해 번호를 받아냈다.
그렇게 기세 좋게 번호를 딴 것까지는 좋았는데.
"아으으.. 뭐라고 보내지..?"
고등학교 때는 남녀공학을 다녀서 그런지 사귀자고 다가오는 남자애들이 여럿 있었고, 재미 삼아 가볍게 사귀어본 상대도 있었지만 자기 쪽에서 먼저 남자에게 대쉬해 본 건 처음이었다.
고백도 남자 쪽에서, 말문을 트는 것도 남자 쪽에서, 데이트 코스를 정하는 것도 남자 쪽에서만 해준 탓에 이지은은 주도적으로 연애하는 법은 전혀 몰랐다.
덕분에 어떻게 먼저 말을 걸어야 할지도 결정하지 못하고 10분 내내 화면만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답답한 마음에 다시 화면을 돌려 정혜수와 주고받은 메세지를 확인한다.
[정혜수 : 어차피 민석 오빠도 경험은 별로 없을 테니까 그냥 아무 말이나 보내.]
고작 십분 남짓 대화한 것 치고는 지나치게 확신에 찬 추측이었지만 중학생 때부터 같이 어울리며 본 정혜수는 신기할 정도로 사람 보는 눈이 정확했다.
'얘기해 보니까 아예 쑥맥은 아닌데 여자 쪽에서 먼저 다가오는 상황이 어색한 것 같더라. 여자한테 인기가 없을 얼굴은 절대 아니니까 남중 남고 군대 루트만 타서 여자랑 엮일 일 자체가 거의 없던 게 아닐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지만 학원에서 본 최민석의 태도는 분명 그런 느낌이 강했다. 확실하게 할 말은 다 하지만 뭔가 어색해하는 느낌이었지.
하지만 최민석이 경험이 없는 것과 아무 말이나 보내도 된다는 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오히려, 상대 쪽이 경험이 없다면 그나마 연애 경험이라도 있는 자신이 더 신경 써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최민석과의 메세지 창으로 화면을 돌리고 열심히 머리를 굴린다.
'일단은 인사부터 해야 하니까 안녕하세요라고 하면 되려나? 그리고.. 저 지은이에요? 처음부터 너무 친한 척하는 것 같으니까 이지은이라고 해야 될까? 그리고? 뭐라고 말하지? 일단 영화관에 가긴 할 건데, 다짜고짜 데이트 신청부터 해도 괜찮나..?'
"아으으..! 몰라..!"
어차피 그냥 인사만 하는 건데!
이지은은 결국 한참을 고민하다 머리가 아플 정도가 되어서야 자포자기한 듯 되는대로 화면을 두드려 메세지를 보냈다.
[이지은 : 민석 오빠! 저 지은이에요! 번호 제대로 주신 거 맞죠?]
프로필에 확실하게 최민석이라고 이름이 써 있긴 하지만 그 흔한 셀카 사진 한 장 없는 기본 프로필 사진을 보며 던진 농담이었다.
메세지를 보내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기를 잠시. 이내 최민석에게서 답장이 돌아왔다.
[최민석 : 진짜 연락할 줄은 몰랐는데. 내 번호 맞으니까 걱정하지 마.]
"꺄악!"
고작 답장 하나에 또 기분이 좋아진 이지은은 발을 동동 구르며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이제 겨우 말 한마디씩 주고받았을 뿐인데. 벌써부터 입꼬리가 제멋대로 올라가고 심장이 쿵쿵 뛰어대고 있었다.
[이지은 : 지금 뭐 하고 있어요?]
[최민석 : 운동하고 있어.]
"운동.."
딱히 신경 쓸 점도 없는 평범한 답장이었지만 운동이라는 두 글자에 반사적으로 낮에 봤던 최민석의 몸이 떠오른다.
'..어깨 엄청 넓었지.'
옷을 두껍게 입어서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큰 키에 맞게 어깨가 굉장히 넓었다.
지나치게 넓어서 떡대라고 할 정도는 아니고, 딱 보기 좋을 정도로 벌어진 어깨는 조금 듬직한 인상이 남을 정도로 신경 쓰였다.
'복근..도 있을까..?'
남자의 알몸을 직접 본 적이 없어서 상상이 잘 가지 않는다. TV나 인터넷에서 심심치 않게 남자 연예인들이 상의를 벗은 모습이 나오기는 하지만 뭔가 확 꽂히는 느낌은 없었다.
'조금 보고 싶을지도..'
정작 이지은 본인이 해본 연애라곤 같이 손잡고 여기저기 놀러 다니는 정도였고, 스킨십도 볼에 뽀뽀 정도가 최대였지만 상상 속에서는 한참이나 진도가 앞서 나가고 있었다.
"미쳤어 진짜..!"
한참을 망상의 나래를 펼치다가 번뜩 정신을 차린 이지은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끼며 다시 메세지를 보냈다.
[이지은 : 내일 안 바쁘시면 같이 영화 보러 갈래요?]
"아! 이, 이게 아닌데..!"
분명 영화 보러 가자고 꼬셔볼 계획은 있었지만 좀 더 이것저것 얘기를 나누고 어느 정도 거리감이 줄어든 다음에 말하려고 했는데.
할 말도 정해놓지 않고 충동적으로 메세지를 보낸 탓에 다짜고짜 용건만 전해버렸다.
다행히도, 최민석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인지, 금방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답장이 돌아왔다.
[최민석 : 무슨 영화?]
[이지은 : 같이 정해요! 좋아하는 장르 있어요?]
[최민석 : 영화는 거의 안 봐서 잘 모르겠는데. 네가 골라주면 안 될까?]
"아.."
최악이다. 최소한 좋아하는 장르라도 정해줬으면 모를까. 저렇게 '아무거나'를 요구하면 골라주는 사람 입장만 곤란하지 않은가.
정작 이지은 본인도 그런 식으로 남자친구를 곤란하게 했던 전적이 상당히 많았지만, 스스로는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일이었다.
그래도 정말 '아무거나'를 골라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최소한의 취향 정도는 파악해두고 싶었기에 다시 한번 메세지를 보냈다.
[이지은 : 그럼, 재밌게 봤던 영화 같은 건 없어요?]
[최민석 : 착X아리?]
"아......"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할 말을 잃고 침묵해버렸다.
이제는 고전 수준을 넘어 유물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옛날 영화였지만 이름만큼은 유명한 공포 영화였다.
공포 영화는 이지은이 가장 싫어하는, 아니 기피하는 장르였다.
*
[이지은 : 내일 안 바쁘시면 같이 영화 보러 갈래요?]
"다짜고짜 데이트 신청부터 하네. 나야 빨라서 좋긴 한데. 길에서 번호 따이면 원래 이렇게 진행이 빨라?"
"음.. 애초에 서로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어서 번호도 교환한 거니까 괜찮긴 한데. 그래도 어느 정도 대화는 해야지. 이럴 거면 그냥 그 자리에서 데이트 신청하는 거랑 다를 것도 없네요."
같이 핸드폰을 보고 있던 유서연은 내 질문에 곧바로 신랄하게 비판을 늘어놨다. 물론 나도 어느 정도 같은 생각이긴 했다.
같이 식사를 마친 뒤에 한참 동안 '운동'을 즐기고, 한숨 돌릴 겸 나란히 누워 유서연의 가슴을 주무르는 사이에 연락이 오길래 같이 메세지를 보는 중이었다.
"그래도 연습 정도는 되겠지. 원래 이런 연습은 서연이랑 했어야 했는데. 그치?"
"아쉬워요.."
유서연은 정말로 아쉬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한탄하듯 대답했다.
하지만 유서연이랑 데이트를 간다고 해봤자 결국엔 유서연이 내게 다 맞추고, 나는 아무런 눈치도 보지 않을 테니 사실상 그냥 놀러 가는 일밖에 되지 않으리라.
"질투도 해?"
"조금은요.. 그래도 정기를 얻으려면 필요한 일이니까 최대한 신경 안 쓰려고요."
"솔직해서 좋네."
"하아앙..♡"
한쪽 손으로는 유서연의 가슴을 마음껏 주무르며 답장을 보낸다.
예전 같았으면 우울한 티를 숨기지 못하고 솔직하게 질투한다고 대답했을 텐데. 몽마가 되면서 섹스에 대한 개념이 바뀐 덕분에 대답이 조금 달라졌다.
단순한 식사로도 정기를 얻는 게 가능하긴 하지만 그래서야 그냥 평범한 인간이랑 다를 바 없는 수준의 정기밖에 얻지 못한다.
몽마가 몽마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결국 섹스를 통해 정기를 얻을 필요가 있었고, 몽마 끼리는 정기를 주고받는 게 가능할 뿐 서로 정기를 만들어내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다른 인간과 몸을 섞을 수밖에 없다.
내 경우에는 단순히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하고 있을 뿐이지만 거기에 유서연이나 임예진처럼 정을 주느냐 마느냐는 다른 문제였으니까.
유서연으로서는 오히려 정기를 위한 먹이와 자신 같은 소유물의 구분이 확실해졌으니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는 모양이었다.
[이지은 : 같이 정해요! 좋아하는 장르 있어요?]
'없는데.'
옛날부터 집에서 TV를 볼 일은 전혀 없었고, 돈도 없는 탓에 영화관에 가지도 못해 영화를 볼 일 자체가 거의 없었으니 취향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이지은 : 그럼 재밌게 봤던 영화 같은 건 없어요?]
내가 봤던 영화는 전부 학교에서 학기 말에 틀어줬던 것들밖에 없다.
제목도 기억 안 나는 서양 영화는 제외하고, 떠오르는 영화들은..
'소X축구. 두X부일체. 화X고..'
자연스럽게 고전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정도로 옛날 영화뿐이다. 무엇보다, 아무리 내가 센스가 없다고 해도 여자랑 데이트하는데 저딴 영화를 고를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공포 영화는 여자들도 좋아하지 않나?'
"공포 영화는 어떻게 생각해?"
"호불호가 확실히 갈리긴 하는데, 나쁘진 않을 것 같아요. 같이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손잡거나 껴안게 될 수도 있고요."
"나쁘지 않네."
솔직히 말하면 난 공포영화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보고 있으면 조마조마한 기분이 들긴 하지만 결국은 화면 너머의 일이라는 생각 탓에 무섭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차라리 한밤중에 가로등 하나 없는 산동네를 돌아다니는 게 훨씬 무서운 경험이었다.
결국은 내가 학교에서 틀어줬던 공포 영화 제목을 보냈다.
[이지은 : 그럼 공포 영화 중에서 괜찮은 걸로 알아볼게요.]
"얘도 싫지는 않은가 보네?"
"그럴 수도 있고, 그냥 주인님한테 맞춰주는 걸지도 몰라요. 남녀 관계는 결국 아쉬운 쪽이 맞춰주는 거니까요."
단순하면서도 부정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확한 말이다.
유서연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조언을 덧붙였다.
"지금은 주인님이 우위에 있으니까 억지로 맞춰주실 필요는 없어요. 필요하면 어느 정도 맞춰줘도 상관은 없겠지만, 마지막에는 주인님이 갑의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걸 꼭 기억해주세요."
내 앞에서는 항상 웃는 표정만 짓던 유서연으로서는 처음 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진지한 표정과 말투였다.
"어차피 침대까지만 가면 내가 이기게 돼 있어."
"꺄앗..!"
내일 만날 약속 장소를 정하는 메세지를 마지막으로 내일 보자는 인사를 주고받으며 대화를 끝마친 순간 그대로 유서연을 자빠뜨리며 말했다.
"일단 서연이부터 이겨볼까?"
"흐아앙..♡ 항복.. 항복이에요오..♡"
유서연은 자지가 깊게 쑤셔박힌 순간 곧바로 잔뜩 녹아내린 목소리로 항복을 외쳤지만 내가 만족할 때까지 멈춰줄 생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