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서큐버스 시스템-164화 (164/775)

< 164화 > 운전 학원에서 번호 따인 썰 (1)

솔직히 말하면 나는 면허를 딸 생각이 없었다.

있으면 여러모로 편하다는 거야 알고 있지만 굳이 차를 살 생각도 없었고, 기껏해야 남의 차나 운전할 때 필요할 텐데. 그럴 바엔 그냥 없는 편이 낫겠다 싶었으니까.

일자리 같은 경우에도 금방 구해진 탓에 더더욱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도 했었고.

그랬던 주제에 이제는 여기저기 편하게 돌아다니고 싶다는 생각으로 면허를 따려고 하고 있다.

내가 생각해도 확실히 사람이 변했다 싶을 정도의 변화였다.

'변한 거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더럽게 재미없네.

나름대로 의욕에 넘쳐서 학원에 찾아와 등록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안전교육인지 뭔지 하는 재미도 없는 영상을 틀어주는 바람에 첫날부터 집에 가고 싶어졌다.

'도대체 이딴 영상은 왜 만드는 거야?'

그냥 상식만 있으면 당연히 알 것들을 거듭 강조하는 쓸데없는 영상은 군대에서 틀어주던 안보 교육 영상과 하등 다를 게 없다.

그때도 널럴한 간부가 감독하고 있으면 다들 자느라 바빴고, 빡빡한 간부가 감독하고 있으면 다들 졸음을 참느라 바빴다.

뭐가 됐든 영상에는 관심도 없는 건 똑같았지.

그래도 이번에는 면허만 따면 바로 차를 타고 다닐 예정이었기에 지루함을 참고 열심히 영상을 시청했다.

"으으읏..!"

장장 한 시간에 걸친 지루한 시간을 끝마치고, 기지개를 쭉 켜며 몸을 늘어뜨렸다.

돈은 돈대로 받아 처먹은 주제에 오늘 과정은 동영상 시청 한 번이 끝이다.

이 뒤에 신체검사가 남아있긴 했지만 미리 알아본 바로는 그냥 간단한 시력 검사 정도만 하는 모양이고.

"저, 저기요."

"네?"

우르르 빠져나가는 인파가 줄어들기를 기다리며 잠시 멍하니 앉아있던 도중.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살짝 고개를 돌리며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순간 눈에 들어온 상대가 여자라는 걸 확인하고, 자연스럽게 눈동자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여자의 외모를 체크했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평균 키. 살짝 웨이브를 넣고 갈색으로 염색한 긴 머리에 아직 어린 티가 묻어나는 앳된 얼굴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눈이 확 뜨이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상급은 되는 외모였다.

'거기에 정기도 깨끗한 편이고.'

사실 예쁘기만 하면 정기가 깨끗하든 말든 상관없지만, 몽마로 살아가게 된 이상 정기는 많이 모을수록 좋았다.

여자에 대한 평가는 순식간에 끝났다.

하지만 정작 말을 건 장본인이 우물쭈물하며 용건을 말하질 않는다.

"저기요? 왜 부르신.."

"번호 좀 주세요!"

"......?"

밑도 끝도 없이 핸드폰을 내밀며 힘을 줘 외치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벙 쪄버렸다.

동시에 교실을 빠져나가던 사람 중 몇몇이 재밌는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듯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쳐다본다.

'뭐야 이거.'

설마 이게 그 길 가다 모르는 사람한테 번호 따이는 상황인 건가?

엄밀히 따지면 길이 아니긴 하지만 장소가 어디가 됐든 잘생긴, 혹은 예쁜 인싸들만 겪을 수 있는 상황이다.

"음.. 혹시 벌칙 게임 같은 건가요?"

아무래도 처음 겪어보는 상황이다 보니 조금 당황한 나머지 주위를 둘러보다가 뒤쪽에서 킥킥 웃으면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다른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그 왜, 여자한테 번호를 따여서 열심히 행복회로를 돌렸는데 벌칙 게임이었다며 사과를 받았다는 불쌍한 썰도 있고.

"아, 아니에요! 쟤는 제 친구긴 한데. 벌칙 게임은 아니고, 그, 너무 잘생기셔서 한 번.."

"......"

이거 기분 참 묘하네.

서큐버스 시스템을 얻은 뒤로 예전보다 잘생겨진 건 사실이었지만 설마 이런 상황이 찾아올 줄은 몰랐다.

어쨌든 기분이 나쁜 것도 아니고. 여자 쪽에서 먼저 잡아먹어 주십쇼 하고 다가온 상황을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다.

물론 못생겼다면 가차 없이 거절했겠지만.

"안되나요..?"

"아니에요. 드리죠 뭐."

"꺄악!"

도대체 뭐가 그렇게 좋은지. 내가 핸드폰을 받아들고 번호를 찍어주자 어린애처럼 꺅꺅 소리를 질러댄다.

"집에 가서 연락할게요! 빨리 가자!"

그러고는 핸드폰을 돌려받자마자 휙 돌아서 뒤에 서 있던 친구를 잡아끌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는 문밖에서 다시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이름은 이지은이니까 나중에 톡 받으면 무시하지 말고 답장해주셔야 돼요!"

자기 이름만 밝히고는 다시 문 뒤로 사라지며 타다닥 뛰어가는 발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허, 참."

너무 상황이 휘리릭 지나간 탓에 다시 혼자가 된 뒤에도 잠시 멍하니 앉아 헛웃음을 흘리다가 몸을 일으켰다.

나도 이제 적극적으로 여자를 먹고 다닐 생각이긴 했지만 여자 쪽에서 적극적으로 다가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교육 전에 미리 공지 받았던 신체검사실로 걸음을 옮기며 다시 한번 아까 훑어내렸던 이지은의 모습을 떠올렸다.

전체적으로 어린 티가 나는 앳된 얼굴에 전체적으로 선이 가는 몸매. 옷에 가려져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옷 위로 봉긋 솟은 가슴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래도 기껏해야 B컵 정도겠지만.'

이렇게 생각하니 가슴 크기에 집착하던 임예진의 태도가 조금은 이해가 간다.

내가 유서연의 가슴에 익숙해져서 눈이 높아진 것도 있겠지만, B컵이라는 사이즈 자체가 평균적으로 봐도 크다고 할 수도 없고, 벗겨놓고 봐도 확 시선을 빼앗길 정도도 아니었으니까.

임예진이야 몸매가 워낙 좋고 비율이 사기적이라 커버됐을 뿐이었다.

*

"다시 보네요?"

애초에 내가 들었던 안전교육 자체가 학원에 등록하고 가장 먼저 진행되는 과정이었으니 같은 교육을 받은 이지은 역시 오늘 학원에 등록했다는 의미다.

그러니 당연히 교육이 끝나고 신체검사를 받으러 가는 경로 역시 겹칠 수밖에 없었다.

"아, 하하하.."

이지은은 얼굴이 살짝 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한다.

하기야, 그렇게 기세 좋게 번호를 따고 후다닥 도망쳤는데 5분도 되지 않아서 다시 얼굴을 마주치고 같이 줄까지 서는 상황이었으니 부끄러울 만도 했다.

"아까는 그렇게 신나 하더니.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됐네."

"그게에.."

"아까는 그냥 기세로 밀어붙인 거예요. 교육받는 내내 영상은 안 보고 오빠만 보면서 잘 생겼다고 노래를 하길래 장난삼아 번호라도 따보자고 꼬셨든요. 벌칙 게임 같은 건 아니고 되면 좋고, 안되면 말고 하는 느낌?"

이지은이 우물쭈물하며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옆에서 보고 있던 친구가 답답하다는 듯 대신 설명했다.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괜히 있는 건 아닌지, 친구 쪽도 평균 이상이다. 이지은이 조금 귀여운 상이라면 이쪽은 검은 긴 생머리에 고양이처럼 약간 장난기가 느껴지고 느껴지는 상이었다.

"그래요? 저는 너무 당당하길래 익숙한 줄 알았는데."

"그러면 저러겠어요? 사귀자는 남자애들은 있었어도 자기가 먼저 좋다고 이러는 건 처음이니까 적응을 못 하는 거죠."

"야아..!"

친구의 설명에 살금살금 눈치만 살피던 이지은이 하지 말라는 듯 친구의 어깨를 팍팍 친다.

"나이는 몇 살이에요?"

"스물넷. 너희는?"

"스무 살이요. 어쩐지 느낌이 연상 같더라. 오빠라고 불러도 되죠?“

스무 살이면 작년까지는 고등학생이었다는 뜻이다. 어쩐지 둘 다 어려 보이더라니.

"편한 대로 불러."

솔직한 심정은 방금 만난 사이에 이렇게 친근하게 구는 게 어색했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이런 것도 익숙해져야지.'

최면도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섹스까지는 어떻게든 갈 수는 있겠지만 미리 호감을 쌓아둘 수 있다면 일이 더 편해진다.

아무리 몽마가 되면서 최면에 필요한 정기의 효율이 좋아졌다고는 해도 아낄 수 있는 건 아끼는 게 좋지 않겠는가.

"일단 지은이는 이름 들었으니까 알겠고. 너는.. 편하게 불러도 괜찮지?"

"괜찮아요. 정혜수예요. 편하게 부르기로 했으니까 혜수야. 하고 한번 불러주실래요?"

"어, 응?"

"빨리요. 혜수야아. 하고 불러주세요."

"..혜수야."

"히히. 연상한테 이름 불리니까 신선하네요."

정혜수는 내가 이름을 불러주자 이지은을 향해 보란 듯이 장난기 어린 웃음을 흘리며 말한다.

이지은 역시 그녀가 뭘 노리고 이렇게 행동하는지 눈치챈 것 같았지만 그래도 뭐라고 말은 꺼내지 못하고 눈에 정혜수를 살짝 노려보기만 하고 있었다.

"학교 선생님들도 이름 불러주잖아."

"에이. 선생님은 제외해야죠. 느낌부터가 다른데."

나도 적당히 분위기에 맞춰줄 겸 이지은을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말을 걸어주는 정혜수와 시시덕거리자 이지은의 표정이 점점 불만으로 뒤덮여간다.

그러면서도 신체검사가 끝날 때까지 말 한마디 못 하다가 학원 앞에서 헤어질 때가 되어서야 간신히 인사만 건네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여담으로, 시력은 양쪽 1.5로 예전보다 훨씬 좋아져 있었다.

*

집으로 돌아와 적당히 시간을 보내고, 일을 마치고 돌아온 유서연과 저녁을 먹으면서 질문을 던졌다.

"서연이는 번호 따여본 적 많지?"

"음.. 대학 다닐 때 많이 있었어요."

"줘본 적도 있어?"

"한 명도 없어요."

"정말로?"

"..정말로요. 제가 조금.. 문란하게 놀기는 했어도 연애는 생각이 없었어요. 어차피 결국은 다 제 몸 아니면 돈 보고 매달리는 게 뻔히 보이기도 했고요."

같은 질문이 다시 이어지자 유서연은 결백을 증명하려는 것처럼 살짝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빠르게 변명을 늘어놓는다.

딱히 뭔가 추궁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자기 혼자 불안해하는 걸 보니 괜히 또 괴롭혀주고 싶었다.

"나도 서연이 몸 보고 노린 건데? 이제는 돈도 받아 쓸 예정이고."

"주, 주인님은 예외에요."

이건 평소 이상으로 짓궂은 질문이긴 했다.

시작이야 결국 내가 자기를 만족시켜줄 수 있는 남자라는 게 이유였겠지만 같이 지내면서 정도 붙었고, 이제는 완전히 내 소유물이 돼버렸으니 유서연의 말대로 나는 예외일 수밖에 없으니까.

나야 처음부터 별로 신경도 쓰지 않던 일이었지만 유서연은 자기가 옛날에 몸을 막 굴렸던 게 마냥 걸리는지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다.

다행히 유서연의 기분을 풀어주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몸 막 굴렸던 게 후회돼?"

"..후회되요."

"그러니까 앞으론 조심해. 몽마 됐다고 다른 남자한테 정기 얻을 생각 절대 하지 말고. 이젠 평생 내 전용인 거 알지?"

"아..♡"

살짝 경고하는 말투였음에도 유서연의 표정이 단숨에 풀어졌다. 단순한 위로성 멘트든 뭐든 간에 유서연은 내가 이렇게 자신에게 소유욕을 드러내는 걸 좋아했다.

실제로 내 껄 다른 남자가 맛보게 할 생각은 절대 없었으니 거짓말도 아니었다.

"서연이 몸이 누구 꺼라고?"

"주인님 꺼에요..♡"

언제 울상을 지었냐는 듯 행복한 표정을 짓는 유서연의 모습에 하반신이 불끈거린다. 몽마가 된 이후로는 은근히 색기까지 풍겨대는 탓에 더 참기 힘들었다.

식후에 바로 운동하는 건 별로인데. 아무래도 오늘은 곧바로 땀 좀 빼야 할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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