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화 > 저도 몽마 할래요! (4)
오후 2시 50분. 퇴근 시간까지는 아직 10분이 남은 시간이었지만 유서연은 당당하게 창고를 정리하는 직원들을 지나쳐 주차장으로 향했다.
"다들 수고하세요."
"아, 예. 수고하셨습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인사를 건네는 유서연의 태도에 직원들 쪽에서 살살 눈치를 보며 살짝 고개를 숙인다.
최민석과 함께 살게 된 뒤로는 함께 집으로 가기 위해 시간 맞춰 퇴근하게 됐었지만, 유서연에게는 원래 이쪽이 당연한 생활방식이었다.
퇴근 후에는 집으로 향하지 않고 곧바로 친가 쪽으로 향했다.
왕복만 서너 시간은 걸리는 길이었지만 앞으로 여유로운 생활을 보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
한참을 달려 집에 도착해 벨을 누르자 이내 안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무슨 일이니? 연락도 없이 갑자기."
"아버지한테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문 열어주세요."
가족 중에서는 유일하게 자신과 사이가 좋다고 할 수 있는 어머니.
그래도 가족에게 최면을 거는 일이니 조금 죄책감이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막상 목소리를 들어도 아무 감흥이 없는 걸 보니 괜찮을 듯했다.
'어차피 누가 피해 보는 것도 아니고.'
맞선을 취소하는 일? 상대 쪽 집안도 그럭저럭 잘 살 테니 서로 이어지면 이득이긴 하겠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유서연의 집안은 충분히 잘살고 있다.
가족에게 최면을 거는 일 역시. 최면을 걸어서 뭔가 이상한 일을 시키는 것도 아니었으니 나쁜 짓이라고 할 것도 없지 않은가.
'..잠깐.'
굳이 맞선만 취소하고, 자신을 내버려 두게 하는 최면만 걸 필요가 있나?
어차피 집안에 썩어나는 게 돈이고 작정하고 갖다 버리지 않는 이상 평생 다 쓰지도 못할 텐데. 자신이 조금 갖다 써도 되는 것 아닌가? 어차피 아버지도 날 생판 모르는 남자랑 결혼 시키고 돈이든 인맥이든 원하는 걸 챙기려고 하고 있는 판에.
새삼스럽게 돈 욕심 따위가 생긴 건 아니다. 그저 최민석에게 조금이라도 득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어차피 내께 다 주인님 건데.'
마음이 바뀌었다.
어젯밤 최민석이 가득 채워준 정기는 거의 소모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고, 이 정도 정기라면 제법 강한 최면도 걸 수 있으리라.
짧은 시간 사이에 생각을 정리한 유서연은 잠금장치가 풀린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냥 전화로 하면 될 걸 집까지 찾아오고. 중요한 일이니? 맞선 문제면 미안하지만 엄마도 못 도와줄 거야."
"다른 얘기에요. 아버지 오시면 같이 말씀드릴게요. 아버지는 아직 안 오셨을 테고, 혜연이는요?"
유혜연은 유서연의 여동생의 이름이었다.
보통 형제자매가 티격태격하고 지내는 게 보통이라고는 하지만, 유혜연과 유서연은 조금 험악한 수준으로 사이가 좋지 않다.
정확히는 유혜연이 일방적으로 유서연을 싫어하는 것뿐이지만, 유서연 역시 자길 싫어하는 동생에게 딱히 정을 줄 마음은 없었기에 지금은 서로 거의 말도 섞지 않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혜연이? 여행 갔지. 이번에 대학 입학하기 전에 해외여행 한 번 갔다 온다고 했었잖니. 친구들이랑 유럽에 간다고 했었나?"
처음 들었다.
애초에 서로 어디로 여행을 간다느니 시시콜콜 떠드는 사이는 아니었으니 기분 나쁠 일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되면 유혜연에게는 최면을 걸 수 없지 않은가.
'..나중에 하면 되겠지.'
어차피 부모님이 일방적으로 맞선이 취소됐다는 말을 전해도 집안에서 별다른 발언권이 없는 유혜연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알았어요. 일단 방에 가서 쉬고 있을게요."
"밥은 먹었고?"
"아버지 오시면 같이 먹을게요."
결국 집안의 결정권자는 아버지였으니 아버지가 오기 전까지는 적당히 시간이나 보낼 생각으로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일단은 맞선은 무조건 취소하고, 크게 잘못하긴 했지만 마지막으로 한번 기회를 준다는 생각으로 한동안 지켜본다. 일단 그렇게 해두면 돼.'
그렇게 하면 맞선은 취소되고, 한동안은 집안에서 간섭하는 일도 없어진다.
그리고 집에서 돈을 받아 가기 위해서는..
'그냥 정기로 밀어붙이는 게 낫겠지.'
몇십, 몇백 정도야 급하다고 달라고 하면 받을 수 있겠지만 단위가 그 위로 올라가기 시작하면 아버지도 당연히 의심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돈에 관해서는 예민한 성격이었으니 사소한 최면으로는 어림도 없을 테고, 그냥 돈에 관해서는 의심하지 않고 믿어준다는 최면을 세게 걸어버리는 게 나으리라.
'근데 그렇게 되면 정기 소모가 너무 많아질 텐데.'
물론 이번에 받은 정기는 일이 어려워질 것 같으면 다 써버려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지만 돈에 관해서는 자신의 독단이었으니 제대로 허락을 받는 게 맞았다.
[유서연 : 주인님.]
[최민석 : 왜. 무슨 일 있어?]
다행히 메세지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돌아왔다.
[유서연 : 혹시 아버지한테 다른 최면도 걸어도 괜찮을까요?]
[최민석 : 무슨 최면을 걸려고?]
[유서연 : 제가 돈이 필요하다고 할 때마다 필요한 만큼 보내주는 최면을 걸면 좋을 것 같아서요.]
[최민석 : 필요하다 싶으면 마음대로 해.]
답장이 오기까지 약간 텀이 길긴 했지만 결국은 허락도 받았다.
뜬금없는 상황에서도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허락해줬다는 건 그만큼 자신을 믿고 있다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며 실실 웃음이 흘러나왔다.
*
"평소엔 불러도 안 오더니, 이번에는 부르지도 않았는데 왔구나. 맞선 얘기라면.."
"일단 들어보세요."
인사도 하기 전에 바로 싹을 자르려는 아버지 덕분에 그나마 남아있던 찜찜한 기분마저 날아가 곧바로 최면을 걸었다.
"아무리 그래도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랑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싶지는 않아요. 맞선은 취소해 주세요."
"..그러마."
생각보다 정기의 소모가 크긴 했지만 최면은 제대로 통했다.
옆에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어머니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지만 달리 참견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저한테 실망하셨다는 건 건 알고 있어요. 그래도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예전처럼 문제 일으키는 일은 없을 거예요."
"......"
이번 최면 역시 아무런 저항도 느끼지 않고 간단하게 통했다.
구구절절 설명을 늘어놓을 필요도 없이 살짝 숙이고 들어가 필요한 용건만 말했을 뿐인데도 필요한 정기의 양도 줄어들었다.
결국 최면에 얼마나 거부감과 위화감을 느끼는가의 차이일 뿐이지. 필요한 만큼의 정기만 사용한다면 평범한 사람은 최면에 저항할 방법 자체가 없었다.
"알았다. 최근에는 얌전하게 지내고 있는 것 같고. 너도 여러모로 생각이 있는 거겠지. 네가 원치 않으니 맞선은 일단 취소해두마. 그리고, 이후에 어떻게 할지는 한동안 더 지켜보고 결정하마."
지켜본다고는 말했지만, 1팀장에게 연락을 받는 것 외에는 따로 감시를 붙인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1팀장에게 보고 받는 것 외에는 따로 감시할 필요가 없다고 최면을 걸어뒀으니까.
'이런 기분이구나.'
1팀장에게 최면을 쓸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냥 편하게 사람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막상 그동안 눈치만 보던 상대를 손 위에 올려두고 마음대로 주무르는 상황이 오니 속이 시원했다.
"믿어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이만 가볼게요."
"밥은 안 먹고 가니?"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집에 가서 푹 쉬고 싶어서요. 저녁은 집에 가서 먹을게요."
어머니에게는 간단하게 아버지의 결정을 믿고 지지한다는 정도로만 최면을 걸어뒀다.
애초에 집안에서 가장 큰 결정권을 가진 사람이 아버지였으니 아버지에게만 최면을 걸어두면 충분했다.
'그리고 남은 정기는 전부..'
[유서연이 돈이 필요하다고 하면 어지간해서는 의심하지 않고 준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액수라면 집으로 불러서 추궁해본다.]
이 최면에 때려 박았다.
최면 자체는 강제성이 큰 최면이 아니라 필요한 정기가 얼마 들지 않았지만 정기를 많이 사용할수록 최면은 견고해진다.
예를 들어, 이상하다고 생각할 만한 액수가 천만 원이라면 정기를 많이 넣을수록 의심하지 않는 액수의 한도가 늘어날 것이다.
거기에 그 행동을 이상하다고 의심하는 일 역시 줄어들 테고, 의심하게 되더라도 깊게 생각하는 것보다 자신을 불러서 추궁하는 행동이 우선시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때 다시 찾아와서 최면을 강화하면 될 일이다.
최면을 써본 건 이제 겨우 두 번째였지만 최민석에게 효율적으로 최면을 거는 요령을 이것저것 들어두기도 했고, 이게 되나? 싶은 생각이 들 때면 자연스럽게 해답이 떠오르는 덕분에 능숙하게 최면을 사용할 수 있었다.
"으으읏..!"
집 밖으로 나온 유서연은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켜고는 그대로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귀찮은 일은 제대로 해결했지만 정기를 다 써버린 탓에 개운하기는커녕 컨디션이 나빠진 기분이다.
빨리 집에 가서 최민석에게 정기를 주입받고 싶다. 아니, 본심은 그저 잘했다고 칭찬받으며 밤새도록 안기고 싶을 뿐이었다.
*
"얘도 확실히 정상은 아니라니까."
유서연의 인간성이야 지겹도록 굴려졌을 때부터 알고 있긴 했지만 자기가 먼저 나서서 다른 최면까지 걸겠다고 할 줄은 몰랐다.
자신도 가족이라고 해봤자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가족애가 없긴 했지만 유서연 역시 평범한 성향과는 확실히 거리가 멀었다.
[유서연 : 최면 거느라 정기를 다 써서 너무 피곤한데. 오늘도 정기 잔뜩 넣어주실 거죠? ♥♥]
유서연이 보낸 메세지를 확인하자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렇다고 이걸 미워할 수도 없고."
성격이 얼마나 이상하고 지랄맞던 간에 나한테만 잘한다면 아무래도 좋다. 거기에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았으니 기분이 묘하면서도 오히려 귀여워해 줄 요소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최민석 : 더는 못 먹겠다고 할 때까지 넣어줄 테니까 기대해.]
어차피 임예진은 잠들어 있으니 오늘도 유서연과 함께 자야 했다. 오히려 집에 돌아오지 않고 외박이라도 했다면 내 쪽에서 아쉬웠을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유서연은 개인으로 봐도 돈이 많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부자였을 뿐이다.
고급 아파트 전세에 외제 차 한 대. 그리고 1억 남짓한 통장 잔고. 이것만으로도 부자라고 하기엔 충분한 재산이었지만 '진짜' 부자라고 하기엔 또 애매하다.
당장 떠오르는 경우를 생각해보자면 게임에서 뭔가 패치가 될 때마다 몇억, 혹은 몇십억씩 당연하다는 듯이 지르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그동안은 돈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별로 느끼지 못한 탓에 유서연의 집이 얼마나 부자인지 신경 쓰지 않았지만 아마 유서연의 아버지 역시 그런 생활이 가능한 수준의 부자가 아닐까 싶었다.
"일단 차부터 한 대 뽑으면 되려나."
안 그래도 이제 운전면허부터 딸 예정이었으니 합격하면 기념으로 차나 한 대 뽑으면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