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 노예계약 (7)
간만에 자가용이 아닌 버스를 타고 이동하니 감회가 새롭다.
학교에 다닐 때도 버스비가 없어서 걸어 다니고, 고시원에서 지낼 때도 번잡한 게 싫어서 한겨울을 제외하면 40분씩 걸어서 출근하곤 했으니까.
'이 시간에도 사람이 많긴 하네.'
아침 일찍 출근하는 직장인에 등교 중인 학생들.
이제 막 연휴가 끝난 첫날인 탓인지 버스에 탄 이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생기가 없이 피로에 찌들어있다.
'그리고 정기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하나같이 그냥 공짜로 준다고 해도 안 먹을 정도로 탁한 정기밖에 보이지 않는다.
오늘만이 아니라 몽마가 된 이후로밖에 다닐 때는 주변 사람들의 정기를 살폈었는데, 아슬아슬하게나마 합격점을 줄 만했던 상대가 한수영 이외에는 없었던 걸 생각하면 확실히 내가 만족할 만한 수준의 여자는 찾기 힘들 것 같았다.
'찾으려고 하면 아예 못 찾을 건 없겠지만.'
결국은 얼굴이 예쁘면 정기의 질도 높을 확률이 높아지는 거니까. 어디가 됐든 예쁜 여자들이 모일 만한 곳에 가면 먹잇감을 찾는 것 정도는 문제 없으리라.
"후우.."
버스에서 내려 짧게 한숨을 쉬며 백화점 물류 창고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 민석이 왔냐."
"아, 팀장님."
안 그래도 찾아가려고 했는데. 안에 들어가기도 전에 입구에서 마주쳤다.
"연휴는 잘 쉬었고?"
"저야 혼자 사니까 평소랑 똑같았죠 뭐."
"가족들은 보러 안 갔고?"
"그냥 쉬었어요. 어차피 친척들 보러 내려가봤자 대학도 안 가고 물류 일이나 하고 있다고 좋은 소리도 못 들을 것 같아서요."
반쯤 자동으로 거짓말이 튀어나왔지만 애초에 가족관계에 대해서는 괜한 시선을 받고 싶지 않은 탓에 처음부터 따로 살고 있다는 정도로만 말해놨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보다, 유서연 팀장님은 휴가 내셨다면서요?"
"어? 어. 그랬지. 어떻게 알았냐?"
"그냥 우연히 들었어요."
1팀장에게 있던 용건은 이걸로 해결됐다.
[유서연은 개인 사정으로 휴가를 신청했고 이는 이미 허락받은 일이기 때문에 따로 보고할 필요는 없다. 직원들에게도 적당히 휴가를 신청했다고만 설명하면 된다.]
물론 유서연이 실제로 휴가를 신청한 건 아니지만 그거야 미리 챙겨온 유서연의 사원증으로 출근만 찍어두면 그만이다.
유서연이야 어차피 어지간해서는 여성 휴게실에서 지내고 있으니 다른 직원들이 오가면서 모습을 보지 못하더라도 딱히 이상하게 여기지 않으리라.
'어차피 일어나기만 하면 가족 문제도 다 해결될 테고.'
당장 가족이 찾아올 만한 일은 방지해야 했으니 기다리겠지만, 유서연이 일어나기만 하면 일도 그만둘 생각이었다.
*
이건 꿈이다.
최민석이 그랬듯이, 유서연 역시 누가 알려줄 필요조차 없이 자신이 처한 상황이 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꿈이라는 걸 안다고 해서, 느껴지는 쾌락이 줄어드는 건 아니었다.
쮸걱! 쮸걱! 쮸걱!
"흐긋..! 읏..! 응오옷..!"
온몸이 무언가에 구속당한 것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로 마구 범해지고 있다.
상대는? 누구인지 확인해볼 필요조차 없다.
안쪽을 가득 채우다 못해 우악스럽게 벌리며 당연하다는 듯이 가장 깊은 곳을 마구 쑤셔대는 크기와 달군 쇳덩이처럼 뜨겁고 단단한 자지는 단 하나뿐이니까.
하지만 거기에 평소와 같은 친밀감이나 짖궃은 괴롭힘 따위는 없다.
그저 상대를 억누르고 엉망으로 범해대기만 하는, 철저하게 자신의 욕구 해소에만 치우쳐진 강간이나 다름없는 움직임.
마치 최민석에게 처음 범해졌을 때를 연상시키는 강압적인 섹스다.
쮸봅, 쮸봅, 쮸봅♡
"히익..! 응앗, 흐아앙..!"
딱딱한 귀두가 자궁을 마구 밀어붙이며 어떻게든 안쪽으로 들어오려는 듯 꾹꾹 짓누르며 문질러진다.
꿈에서 나가야 하는데. 내 꿈인 게 확실한데. 무언가에 막힌 듯이 나갈 수가 없다.
거기에 자신이 몇 번을 기절해도 멈추지 않는 폭력적인 쾌감까지 더해져 지금은 이대로 미쳐버릴 때까지 이 안에 있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지경까지 와버렸다.
'그래도..'
나가야한다.
아무리 기분이 좋더라도, 아무리 자신의 취향에 맞춘 강압적인 플레이라도 결국은 꿈일 뿐이니까.
꿈에서 깨어나 밖으로 나가면 진짜 주인님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단조롭게 범하기만 하지 않고 때로는 부드럽게, 짖궂게, 온갖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지배하며 행복하게 해줄 진짜가 말이다.
처음에는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보이지 않는 벽도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얇아지고 있는 게 느껴진다.
그리고 마침내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를 긴 시간을 버텨낸 끝에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든 순간.
'나갈 거야..!'
멈추지 않고 자신을 범하고 있던 최민석이 사라지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던 구속마저도 완전히 사라졌다.
"도대체 뭐였던 거야?"
무기력했던 조금 전과는 달리 이제는 이 꿈속 공간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됐다는 확신이 느껴진다.
최민석에게 처음 범해졌던 백화점 물류창고의 여성 휴게실. 그때와 상황이 비슷하다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정말로 그때의 꿈을 꾸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래봤자 가짜면서 말이야. 할 거면 리얼하게 재연해 주던가."
분명 기분은 좋았지만 아무런 감정도 없이 퍽퍽 박아대기만 하는 탓에 정신적인 흥분은 훨씬 덜했다.
달아오른 몸을 미칠 듯이 몰아붙이던 쾌락이 사라진 것에 대한 아쉬움은 조금도 없다. 꿈에서 나가면 더 훌륭한 '진짜'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렇게 확신을 가지며, 유서연은 망설임 없이 눈을 감았다.
"..진짜 꿈이었네."
지금도 꿈속이 아닐까 싶은 의심이 들 정도로 리얼한 꿈이었지만 잠깐 눈을 감았다 뜬 사이에 주변의 풍경이 여성 휴게실에서 최민석의 방으로 바뀌어 있었다.
"......"
유서연은 곧장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고 눈을 다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몽마가 됐다. 받아들이려고 의식할 필요조차 없이 자연스럽게 확신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최민석에게 들었던 최면 역시 사용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고, 몸속에 담겨 있는 정기 역시 선명하게 느껴졌다.
'...너무 적어.'
분명히 정기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은 커다란데, 남아 있는 정기는 텅텅 비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조금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최면과 정기. 당장 체감할 수 있는 건 이 두 가지 뿐이다.
생각을 정리한 유서연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다가.
"어..?"
옷 안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에 흠칫 몸을 움츠렸다.
"뭐지..?"
가만히 누워 있느라 몰랐는데. 입고 있던 브라 끈이 끊어져 버렸다.
옷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어 끊어진 브라를 옆에 내려놓고,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와 거울 앞에 섰다.
"가슴이.."
커졌다. 그것도 옷 위로도 확실하게 체감이 될 정도로.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대로 윗옷까지 훌렁 벗어버리고 다시 한번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다.
"이것도 몽마가 된 영향.. 이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진작에 성장기를 지난 몸이 자랄 리가 없지 않은가. 그것도 가슴만.
"..나쁘지 않은데?"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유서연의 반응은 담백했다.
가슴이 커졌다고는 해도 다른 부분이 살이 찐 것도 아니고, 모양 역시 여전히 스스로 봐도 마음에 들 정도로 예쁘게 형태가 잡혀 있었으니까.
지금까지 이상으로 몸매가 훌륭해진 것은 물론이고, 거유를 좋아하는 최민석의 취향에도 들어맞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마음에 들지 않을 이유는 조금도 없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한층 굴곡이 늘어난 자신의 몸을 가볍게 훑어보고 만족스럽게 웃음을 흘린 유서연은 벗었던 옷을 다시 입고 거실로 나왔다.
"어? 언니 일어났어?"
"응. 간만에 푹 잤네."
소파 위에서 핸드폰을 보며 빈둥거리고 있던 임예진이 곧장 일어나 헤헤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최면에 걸려있어.'
무슨 내용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최민석이 걸어둔 최면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정기가 거의 메말라 있는 자신과는 달리 임예진의 몸 안에는 최민석의 기운이 진하게 묻어나는 정기가 가득 차 있는 것 역시 선명하게 보였다.
"나 얼마나 자고 있었어?"
"얼마나..? 음.. 그게.."
"아, 아니다. 오늘이 며칠이지?"
자신이 얼마나 잤느냐는 질문에 걸려있던 최면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고 급하게 질문을 바꾸자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잘은 몰라도 자신이 잠들어 있던 것과 관계가 있는 최면일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2월 5일..?"
2월 5일이면 꼬박 3일은 잠들어 있었다는 말이다.
"주인님은?"
"방에 계셔."
"식사는?"
"아까 같이 배달시켜서 드셨어."
자신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별다른 일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구나. 그럼 나 잠깐 주인님이랑 얘기 좀 하고 올게."
특별한 용건이 없는 이상 최민석의 개인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그 특별한 용건이 생긴 상황이었으니 어쩔 수 없다.
유서연은 작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의식하며 최민석의 방문 앞에 서서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어. 들어와."
다행히 따로 뭔가를 하는 중은 아니었는지, 안에서 곧바로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 아, 일어났어?"
"......"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가 의자에 앉아있는 최민석을 본 순간.
안부를 묻는 질문에 대답할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하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몽마가 되고, 최면을 쓸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처럼 본능적인 깨달음이었다.
그동안 느꼈던 진한 애정을 넘어선 무언가가 가슴 안쪽에서부터 거세게 벅차오른다.
이 사람에게 안기고 싶다. 복종하고 싶다. 내 모든 걸, 전부 바치고 싶다. 그저 상대가 눈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각은 유서연이 평생 느껴본 그 어떤 감정보다도 강렬했다.
"주인님..♡"
"왜, 무슨 문제 있어?"
뜬금없는 중얼거림에 살짝 당황하는 모습도. 희미하게 걱정 섞인 시선을 보내오는 모습도. 미칠 정도로 사랑스러워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그동안의 꾸준한 교육이 없었다면, 주인이고 뭐고 당장 달려들어 덮쳐버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사람의 소유물이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렇게 확신하며 목덜미가 오싹할 정도의 흥분에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