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화 > 노예계약 (1)
덜컹.
"하아아..."
차에서 내린 유서연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모처럼의 설 연휴를 최민석이 아닌 사이가 좋지도 않은 가족들과 보내야 했다.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가 생겨버렸다.
'어떡하지?'
원래라면 며칠 동안 보지 못했던 쓸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당장이라도 집에 들어가고 싶었을 텐데.
차는 이미 주차장에 세워뒀음에도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이 상황을 최민석에게 어떻게 설명하고, 어떻게 해결한단 말인가. 적어도 자신의 상식 안에서는 해결법이랄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임예진 : 그냥 주인님한테 솔직히 말하세요. 숨긴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요.]
어젯밤 임예진과 주고받은 대화는 저렇게 끝을 맺었다.
임예진과의 관계도 이제는 익숙해져서, 질투하는 일도 거의 없이 친해진 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저렇게 남 일이라는 듯이 말하는 모습은 조금 얄미웠다.
그렇다고 해서 틀린 말도 아니라는 것도 지금의 불편한 감정을 한몫 거들었다.
[17층입니다.]
죄라도 지은 것처럼 바닥만 내려다보는 사이에 엘리베이터가 집까지 도착했고, 유서연은 멍하니 열린 문을 바라보다가 문이 닫히기 직전이 되어서야 다시 열림 버튼을 누르고 문 밖으로 나왔다.
'...버려질지도 몰라.'
최민석은 자신이나 임예진 말고도 여러 여자들과 관계를 맺었지만, 그들 중에서는 자신이 가장 오래된 사이일 것이다.
거의 1년을 같은 집에서 함께 생활하기도 했고, 노예를 자처하고 그를 성심껏 모시며 나름 귀여움을 받기도 했지만 둘 사이에 정말 유대라고 할 만한 감정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도... 말해야겠지.'
적어도 숨겼다가 일이 터지고 나서 들키는 것보다는 미리 밝히고 매달리는 편이 버려지지 않을 가능성이 컸으니까.
각오했다기보다는 이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기에 내린 결론이었다.
유서연은 불안감으로 거칠게 뛰어대는 심장을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
삐빅-! 삑-! 삑-!
"뭐야, 생각보다 빨리 왔네?"
현관 쪽에서 들려오는 잠금 버튼을 누르는 소리에 잠시 게임을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임예진은 연휴가 다 끝나고 나서야 올라온다고 했으니 내일 돌아올 테고, 지금 돌아온 건 유서연이리라.
'...원하는 대상을 몽마로 만드는 방법.'
하는 방법 자체는 대충 감이 오지만 유서연을 직접 눈앞에 두고 확인하지 않는 한은 확신할 수 없을 것 같다.
기다리기 힘든 마음에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오자 현관 쪽에서도 철컥하고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발소리가 들려왔다.
"...다녀왔습니다아."
내 앞에서는 항상 높은 텐션을 유지하던 유서연 치고는 뭔가 기운 빠진 목소리다. 살짝 이상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현관 쪽으로 마중을 나가 보니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뭔가 불안해하는 듯한 표정의 유서연이 신발을 벗고 있었다.
"다녀왔어?"
"...네."
평소라면 활짝 웃으면서 신발을 벗어 던지고 그대로 내 품에 뛰어들었을 텐데. 확실히 오늘의 유서연은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기운 없어 보이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어?"
"...있어요."
"그래?"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저렇게 표정이 좋지 않은 건지. 원래라면 곧바로 상황을 설명하고 유서연을 몽마로 만들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우선은 유서연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할 듯했다.
"일단 들어와.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들어나 보자."
몽마가 된 내 눈에는 유서연의 몸 안에 쌓인 정기가 훤히 들여다보인다.
대부분은 나와의 관계로 만들어진, '내 것'이라고 해도 좋을 순수한 정기들과 며칠 사이에 새로이 쌓인 유서연의 본인의 정기가 뒤섞여 있다.
대부분은 내 것이었지만, 얼마 되지 않는 유서연 본인의 정기 역시 편의점 알바생 한수영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진하고 깨끗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고른 상대였지만 몽마의 관점으로 보자면 유서연은 아주 훌륭한 '먹잇감'이었다.
'할 수 있어.'
유서연을 몽마로 만들 수 있다. 그 사실을 확인한 나는 그대로 유서연의 어깨를 감싸 내 방 침대로 이끌었다.
유서연을 침대에 앉혀놓고, 나 역시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그렇게 죽을상이야?"
"그게..."
"나한테 말하기 힘든 일이야?"
"아, 아니에요. 말할게요."
조금 망설이길래 물어봤을 뿐인데. 유서연은 정말 죄라도 지은 것처럼 흠칫 몸을 움츠리며 부정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게... 집에서 선을 보라고 해서요."
"선?"
"네... 예전부터 얘기가 있긴 했었는데, 아무래도 상대를 찾으신 모양이더라고요. 상대 쪽은 제 사진을 보고 이미 좋다고 했다고... 빨리 만나보라고 하셔서..."
"아아..."
딱히 복잡할 것도 없는 사정이다.
애초에 유서연을 물류팀에 처박아 놓은 이유가 적당한 상대를 찾을 때까지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있으라는 거였으니까.
그동안 잊고 지내긴 했지만 올 게 왔을 뿐인 상황이었다.
"거절 안 했어?"
"저, 저는 싫다고 했는데. 아버지가 워낙 진지하셔서..."
"그래서, 선 보겠다고?"
"아, 안 볼 거예요! 그게 아니라, 계속 거절하면 아버지가 여기까지 오실지도 모르고, 이 집에서 나가야 할지도 모르고... 주인님이랑 무슨 관계인지도 알게 될지도 몰라서..."
과연. 유서연이 뭘 걱정하는지는 대충 이해했다.
단순히 선보는 걸 거절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지금의 생활 자체가 깨질 가능성이 컸으니 내가 자신을 버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이리라.
'딱히 문제 될 건 없어.'
내가 몽마가 되기 전에도 정기를 조금 썼다면 어떻게 해결이 가능한 일이었고, 몽마가 된 지금은 더욱 유연하게 대처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보다는...'
간만에 유서연을 괴롭히고 싶다는 생각에 스멀스멀 차올랐다.
오늘은 아직 한 발도 안 뺀 상태라 기운도 넘치는 상태인데, 간만에 나한테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잔뜩 겁먹은 유서연까지 눈앞에 떡하니 차려진 상황이었으니까.
"그래서 제대로 거절도 안 하고 여기까지 왔다 이거지."
"거, 거절했는데. 아버지가 워낙...!"
"됐으니까 조용히 하고 있어."
"......"
단순한 연기일 뿐이었지만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정색하며 말하자 유서연은 정말로 겁먹어 버렸는지 창백해진 안색으로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상황이 곤란해진 것보다 서연이가 딱 부러지게 거절도 안 하고 푹 쉬다 돌아온 게 더 마음에 안 드네."
"......"
여기서 뭐라고 대꾸했으면 언제 말하라고 했냐고 다시 혼냈을 텐데. 유서연은 눈치 좋게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버지가 계속 밀어붙이면 결국 다른 남자랑 선도 보고, 결혼도 하고, 몸도 대줬겠네?"
"......"
유서연은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은 읽을 수 없었지만 가늘게 어깨가 떨리고 있는 걸 보아하니 정말 제대로 겁먹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최근에는 제법 잘해줬는데 말이야.'
결국, 정말 자신을 버려야 할 상황이 오면 버려진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반응일 것이다. 물론 그걸 부정할 생각은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버릴 때가 아니었으니 여러모로 우스운 상황이었다.
"이걸 어떻게 할까. 이제 말해도 되니까 서연이가 말해봐.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제가 다시 확실하게 거절하고 올 테니까..."
"그렇게 하면, 아버지가 포기하시는 건 확실해?"
당연히 아니겠지.
유서연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들었던 고개를 푹 숙이며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나도 일이 귀찮아지는 건 싫기도 하고. 서연이도 달리 방법이 없는 건 인정하지?"
"제발 버리지 말아 주세요..."
결국 유서연은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울상을 지으며 매달려왔다.
'괴롭히는 건 이 정도면 충분하고. 슬슬 상황 설명을 해야 하는데...'
분위기가 이상해져서 얘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리 유서연이 날 좋아한다지만 대뜸 내가 몽마라고 말하면 그걸 믿을까? 애초에, 몽마가 되라고 하면 그걸 받아들이긴 할까?
사람을 몽마로 만들기 위해서는 상호 간의 동의가 필요하고, 내가 하려는 건 거기에 더해 몽마가 된 유서연을 내 소유로 두려는 일종의 계약이다.
그 과정에서 최면이 섞였다가는 몽마가 되어 최면이 풀렸을 때 내게 어떤 감정을 품게 될지 알 수 없었으니 계약 과정에서 최면은 최대한 쓰지 않는 게 바람직했다.
"서연아."
"...네."
이제는 정말로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까지 왔음에도 유서연은 난리를 피우지 않고 얌전하게 내 말에 대답한다.
우선은 유서연에게 내가 몽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할 것. 그것부터가 시작이다.
만약 유서연이 뭔가 최면에 걸린 상태였다면 걸린 최면을 푸는 것만으로도 이야기가 빠르게 진전되겠지만, 아쉽게도 유서연은 아무런 최면에도 걸리지 않은 상태였으니 말로 하나하나 설명해줄 수밖에 없다.
"중요한 얘기니까 오해하지 말고 들어봐."
"...흑."
아직 얘기는 시작도 안 했는데. 결국은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리며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제발요..."
"아니, 그게 아니라... 다른 얘기니까 일단 들어봐."
그동안 몇 번씩 겁을 주는 일은 있었어도 이렇게 정말 끝일지도 모른다는 분위기까지 가본 적은 없어서 이렇게까지 반응할 줄은 몰랐는데, 유서연은 정말 서러운 표정으로 울고 있었다.
원래는 천천히 이런저런 예시를 들면서 유서연을 납득시키는 방향으로 가려고 했었는데, 예상 이상으로 분위기가 무거워져 버렸다.
다 내 벌인 일이었으니 자업자득이었지만.
"일단 울지 말고. 지금은 그럴 생각 없으니까 진정하고 들어봐."
"...정말요?"
유서연은 꼭 혼나려다 이번만 봐준다는 말을 들은 어린아이처럼 내 쪽을 조심스럽게 올려다보며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와, 씨...'
나름 중요한 상황이었음에도 사실 거짓말이라고, 이젠 필요 없다고, 다시 쳐내고 다시 엉엉 울려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모습이었다.
'진짜 이것만 끝나면 죽었다.'
이 좋은 기회를 억지로 참게 만들었으니, 다른 의미로라도 엉엉 울게 만들어주리라. 내심 그렇게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