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화 > 몽마 (3)
시작은 단순한 변덕이었다.
최면이라는 능력을 믿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에 가벼운 마음으로 게임하듯 어플을 조작했고, 최면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아니, 그것보다 중요했던 건 난생 처음으로 허리가 떨릴 정도의 강렬한 쾌락을 경험했고, 서큐버스 시스템만 이용한다면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 쾌감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었다.
생에 처음으로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나는 성욕이 없던 게 아니었다. 그저 오랫동안 무시하고 지낸 탓에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매일 김민아의 입으로 쾌감을 맛보면서도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욕구를 채우기 위해 유서연을 최면에 빠뜨렸다.
그 과정에서 몸이 조금 고달프긴 했지만 그마저도 나날이 커져가는 기대감에 즐겁게 느껴졌고, 마침내 유서연을 손에 넣었을 때는 난생 처음 느껴보는 정복감에 온몸이 짜릿할 정도였다.
유서연을 손에 넣고, 김민아를 보내고, 우연히 발견한 성은영, 임예진까지 탐욕스럽게 먹어치웠다.
하지만 내 욕구는 딱 거기까지였다.
좁아터진 고시원에서 갑작스럽게 좋아진 생활 환경과 두 노예와 같은 집에서 보내며 마음껏 성욕을 풀 수 있는 생활에 만족했다.
지나치게 게을러진 생활에 피트니스에 다니기 시작하긴 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내 건강이 목적이었지 여자를 원해서 간 것은 아니었다.
굳이 여자 트레이너가 아니라도 상관 없었다. 예전 같았다면 최면부터 걸었을 정예주조차도 그쪽이 먼저 내 체취에 발정이 나고 나서야 마음이 동해 건드렸다.
그리고 이제는 그마저도 귀찮은 마음에 최면 능력을 사용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욕구를 참으려고 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다시 편하게 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생활이 돌아올 테니 말이다.
'내가 생각해도 게으르긴 했어.'
딱히 잘못이랄 건 없다.
오히려, 도덕적으로 본다면 최면 능력을 사용하는 쪽이 옳았다.
하지만 난 도덕적인 인간이 아니다. 최면 어플을 처음 사용할 때도 그로 인해 내게 돌아올 리스크만을 걱정했지 남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저 남편과 애까지 있는 여자를 완전히 빼앗는건 너무하지 않나 하는 마음에 자기만족으로 성은영을 완전히 노예로 만들지 않았을 뿐이고, 일방적으로 김민아를 친구라고 생각하며 도와줬을 뿐이다.
"완전 지 멋대로구만."
새삼스러운 말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억눌려있었다. 욕구는 있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를 핑계로, 적당히 만족하고 더 멋대로 굴고 싶다는 욕구를 억누르고 있었다.
"몽마라."
나쁘지 않다.
결국 나는 내 멋대로, 내 편한대로 살고 싶었을 뿐이니까. 그러기 위해 인간을 그만둬야 한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이곳이 꿈 속이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잠에서 막 깨어난 것처럼 개운한 기분이다.
아니, 마음만 먹으면 깨어날 수 있다.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확신 속에서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뜬 순간. 시끄럽던 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지며 주변의 풍경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잘 잤어?"
"개운한게 나쁘지 않네요."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날이 밝았는데, 지금은 이미 해가 지고 밤이 되어 있었다.
"얼마나 잔 겁니까?"
"하루 하고 조금 더 잤어. 그래도 이 정도면 일찍 깨어난 편이야. 개중에는 며칠씩 못 일어나는 녀석들도 있다고 들었거든."
"제가 꾼 꿈은…."
"네 무의식 가장 깊은 곳에 있던 일이겠지. 좋은 꿈일 수도 있고, 나쁜 꿈일 수도 있고. 아무튼 몽마가 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일이라더라구. 그래서, 뭔가 변한 것 같아?"
"…딱히 변한 건 없는 것 같네요."
가벼운 심경의 변화 정도는 있었지만 결국 그 뿐이다. 여러모로 개운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의욕적으로 뭔가를 할 생각은 없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정신적인 부분에 대한 감상이었고, 내가 몽마가 되었다는 실감은 선명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할 수 있어.'
누가 알려주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꿈에서 깨어나는 방법을 알아낸 것처럼, 몽마가 되면서 할 수 있게 된 것들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성적인 관계를 통해 정기를 얻고, 그렇게 얻은 정기를 이용해 할 수 있는 최면을 비롯한 여러가지 것들.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서는 직접 이것저것 시험해봐야겠지만 이제는 어플을 이용하지 않더라도 원하는대로 최면을 걸 수 있다는 건 확실했다.
그리고, 눈앞의 몽마가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높은 위치에 있는 존재라는 것도 확실하게 느껴진다.
그녀가 나를 '먹지'않은 이유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일이 그렇게 흘러갔다면 나는 내 노예들처럼 완전히 그녀에게 빠져들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복종하게 됐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왜 나를 노예로 만들지 않은 겁니까?"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곧바로 입에 담았다.
몽마가 되기 전까지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지만 몽마된 지금은 자연스럽게 몽마끼리는 서로에게 최면을 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덕분이었다.
"효율이 나쁘잖아."
"반대 아닙니까? 저를 노예로 만드는 편이 마음대로 써먹기 편할 텐데."
"그게 귀찮은 거야. 이것저것 명령하는 것두 귀찮구, 잘했다고 상주거나 혼내는 것도 귀찮으니까. 그냥 깔끔하게 계약으로 묶어서 정기만 받아가는 게 편하지."
어느샌가 그녀의 말투가 원래대로 돌아와 나른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다른 여자한테 매달리고 있는 남자는 매력이 없거든. 대충 느껴지지? 너도 이제 나처럼 다른 사람을 몽마로 만들어줄 수 있게 됐으니까, 다른 노예들도 몽마로 만들어서 팍팍 정기를 모으라구."
"굳이 몽마로 만들 필요가 있습니까? 어차피 정기만 얻으면 그만인데."
"으음…. 원래는 정말 마음에 드는 상대가 아니면 할 필요 없는 일이긴 한데. 내가 자고 있던 사이에 몽마들이 많이 죽었더라구. 원래는 그것도 신경 쓸 일이 아니긴 한데, 지금은 거의 멸종 수준으로 줄어들어서 말이지. 나라도 뭔가 해야겠다 싶었거든. 그렇다고 무조건 그렇게 하라는 말은 아니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구."
강제성은 없는 단순한 제안이라는 뜻이다.
나야 어차피 마음대로 할 생각이었으니 딱히 신경 쓸 생각은 없었지만, 다른 부분은 조금 신경이 쓰였다.
"몽마들이 왜 그렇게 된 겁니까? 당신만 봐도 어지간해선 죽을 일이 없을 것 같은데."
"맞아. 몽마는 어지간해선 안 죽어. 수명도 없고, 원래는 육체도 없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존재니까. 그런데, 내가 잠든 사이에 대대적으로 사냥당한 모양이더라구."
"사냥? 누구한테 말입니까?"
"인간이지. 그 뭐더라, 바티칸인가 하는 서양 녀석들 말이야. 그녀석들이 전세계를 돌면서 몽마를 죄다 죽였다더라구. 나야 자고 있었으니까 괜찮았지만."
"……."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가벼운 말투였지만 내용 자체는 살벌하기 짝이 없다.
"바티칸이요? 그 서양 종교? 거기서 몽마들을 사냥했다고요?"
"응. 옛날부터 엑소시즘이니 구마의식이니 귀찮았던 애들이니까. 이유는 몰라도 이번에 제대로 칼을 뽑은 거겠지."
차마 뭐라고 반응하기도 애매하다.
애초에 내가 몽마가 된 시점에서 판타지나 다름없는 상황이지만 뜬금없이 바티칸에서 몽마들을 대대적으로 사냥했다는 말을 들으니 현실감이 싹 사라지는 기분이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 한국에는 그쪽 애들이 거의 없다시피 하거든. 성당이나 교회는 엄청 많긴한데, 정말 제대로 능력이 있는 사람은 못 봤거든. 무당 같은 애들도 이제는 거의 없는 편이구, 걔들은 우리는 거의 신경도 안 쓰는 편이니까 신경 안 써도 돼."
"아니, 그게 아니라…."
바티칸만으로도 어지러운데 무당까지도 정말로 있는 모양이다.
아니, 그보다도 중요한 건 내가 몽마라는 걸 들키는 순간 날 죽이려고 들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아마 상당히 많이.
"왜 미리 말해주지 않은 겁니까?"
"안 물어봤으니까?"
"아니, 몽마가 되면 안 좋은 점이 있냐고 물어봤잖아요."
"이게 안 좋은 일이야?"
"그럼 좋은 일입니까? 제 정체를 눈치 채는 순간 죽이려드는 인간이 우르르 생겨났는데?"
"뭐 어때. 안 걸리면 그만이지."
"아오…."
아예 기본적인 상식 자체가 다르다.
내 질문에서 아무런 문제점을 느낄 수 없다는 듯 태연한 표정만 보더라도 이 이상의 추궁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보였다.
몽마 끼리는 최면도 걸 수 없고, 서로 마음도 읽을 수 없다. 그 점이 지금은 오히려 더 불편하게 느껴졌다.
"몽마 된 거. 무를 순 없죠?"
"알면서 물어보긴. 못 물러. 당연하잖아?"
"…망할."
예상했던 대답에 낮게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당장 목숨이 위험해진 것도 아니고, 그녀의 말대로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일이긴 했지만 기분이 더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짧게 한숨을 쉬는 내 표정에서 체념의 감정을 읽은 걸까. 그녀는 침대에 편안히 누워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키며 말했다.
"그럼 이 얘기는 이걸로 끝내구. 실습이나 해볼까?"
"실습이요?"
"모처럼 몽마가 됐으니 능력을 써보긴 해야지. 나중에 막상 쓰려다가 잘 안 되면 곤란하니까. 처음 한 번은 내가 지켜봐 줄게. 하다가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수습도 해주고."
말이 실습이지. 결국 최면으로 여자 하나 먹어보라는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지나치게 갑작스럽게 이것저것 알게된 탓에 의욕이 없었지만 처음 능력 쓰는 걸 지켜보고 도움도 준다는데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갑시다."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었으니 제대로 즐기기라도 해야 억울하지 않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