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서큐버스 시스템-140화 (140/775)

< 140화 > 몽마 (2)

제법 긴 내용이긴 했지만 짧게 정리하자면 이렇다.

이 여자…. 서큐버스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정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눈에 차는 남자를 찾는 게 귀찮았기 때문에 내게 최면 능력을 주고, 내가 최면을 이용해 다른 여자들과 관계하면서 생겨나는 정기를 가져가고 있다는 거다.

"그럼 나를 고른 이유는…."

"정기라는 게 그냥 몸만 섞는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니까. 서로 제대로 쾌락을 느껴야 제대로 섞이는 거거든. 그러니까 얼굴도 괜찮으면서 자지도 크구 정력도 센 사람을 골랐지."

단순한 우연은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그럼, 앞으로도 계속 섹스만 하면서 그쪽한테 정기만 넘기면 되는 겁니까?"

"맞아. 너한테도 좋은 일이니까 게으름 피우지 말고 성실하게 하라구."

"할당량이 있는 겁니까? 하루에 최소 몇 번은 해야 한다거나 하는."

"딱히 그런 건 없는데? 지금까지도 열심히 했으니 앞으로 몇년은 안 해도 충분할걸."

분위기상 그런 얘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예상과는 반대로 오히려 여유롭다는 대답이 나왔다.

"그럼 왜 갑자기 나와서 재촉한 겁니까? 저야 궁금하던 게 풀렸으니 좋지만…."

"네가 점점 게을러지니까 그렇지. 처음에는 나름대로 이것저것 건드리려고 했는데, 요즘은 대충 정기만 쌓아두고 여자 늘릴 생각을 안 하니까. 이때다 싶어서 한마디 해주려구 나왔지."

"……."

이번에는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내가 생각보다 욕심이 없던 건지, 유서연의 집에 들어와 예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호화스러운 생활을 만끽하고, 성욕도 매일 원하는 대로 풀다 보니 현실적인 문제와 겹쳐 굳이 새 여자를 늘릴 필요가 있냐는 생각에 정기만 쌓아두고 일을 벌이지 않고 있었으니까.

성은영이나 정예주는 몰라도, 특전이라는 이유가 없었다면 오피에 가서 다른 여자들을 만나지도, 임예진을 노예로 만들지도 않고 얌전히 지냈을 것이다.

이번에도 내 마음을 읽은 걸까. 서큐버스는 이 화제를 더이상 물고 늘어지지 않고 곧바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이건 원래 나중에 말하려구 했던 건데. 이왕 나온 김에 끝내버릴래. 너, 예전이랑 몸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건 알지?"

"…모르는 게 이상하죠."

섹스와 일 외에는 변변찮은 운동도 하지 않고 빈둥거렸는데도 근육이 유지된다. 아니, 정예주의 말을 빌리지만 완벽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좋아져 있었다.

"단순히 몸만 그런 게 아니라. 정력도 예전에 비하면 훨씬 좋아졌지."

"그것도 그쪽 덕분입니까??"

"당연하지. 매일 섹스만 해댄다고 그렇게 정력이 좋아지겠어?"

"……."

솔직히 말하면 그런 줄 알았다.

처음 유서연과 관계를 맺었을 때만 하더라도 7, 8번 째에는 거의 탈진하기 직전까지 갔었는데, 시간이 지나다 보니 그 정도는 여유롭게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정력이 강해졌다. 그래도 그 부분은 크게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운동은 몰라도 섹스는 정말 지겹도록 해댔으니까. 서큐버스 시스템의 영향이라기보단 매일 하다 보니 체력이 붙어서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얼굴도 잘생겨졌구. 예전에는 그렇게 잘생겼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지금은 내가 봐도 나름 괜찮을 정도니까."

"그건 잘 모르겠는데…."

"옛날 사진 있으면 나중에 찾아봐. 아예 다른 사람일걸."

얼굴이야 예전부터 나름 괜찮게 생겼다고 할 정도는 됐으니 딱히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이런 소리까지 들을 정도면 얼굴도 달라지긴 한 모양이다.

'나중에 서연이한테 물어봐야겠네.'

지금 내 주변 사람 중에 서큐버스 시스템을 얻기 전의 얼굴과 지금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건 유서연 뿐이었다.

"아무튼, 그래서요?"

"네 몸이 변하는 이유는 두 가지야. 하나는 매일 신선한 정기를 받아들이는 탓에 몸이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거고, 다른 하나는 그 과정에서 내가 조금씩 손을 쓴 덕분이지."

어떻게 손을 썼다는 건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지금 내 몸 상태는 그녀가 의도한 결과물이라는 뜻이었다.

"정기를 더 많이 몹게 하려고요?"

"그런 것도 있지만 더 큰 이유가 있지. 네가 동의해야 하는 일이지만…."

시종일관 나른하던 서큐버스의 눈빛이 이제부터가 본론이라는 듯 생기를 띠며 반짝였다.

"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너를 몽마로 만들어줄 수 있어. 그렇게 되기 쉽도록 신체를 조정한 거니까."

생기 넘치는 눈빛과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속삭이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몽마라면 서큐버스나 인큐버스 같은 걸 말하는 겁니까?"

"몽마는 그냥 몽마야. 인큐버스니 서큐버스니 하는 것들은 인간들이 멋대로 분류해둔 이름일 뿐이지. 인간도 남자건 여자건 종으로 분류하면 인간일 뿐이잖아? 딱히 아니라고 할 생각은 없지만 우리는 굳이 서로 명칭을 나누지는 않거든."

덧붙인 설명은 아무래도 좋은 내용이었지만 제안 자체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내용이었다.

"그, 몽마가 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특별한 건 없어. 지금이랑 달리 내 도움 없이도 최면을 쓸 수 있는 거랑 그 외에 이런저런 자잘한 능력도 더 쓸 수 있게 되는 정도?"

그녀의 도움이라는 건 아마 서큐버스 시스템을 통한 최면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서큐버스 시스템의 도움 없이 직접 최면을 쓴다. 당장 서큐버스 시스템 자체에는 별다른 불만이 없으니 크게 구미가 당기는 내용은 아니었지만 다른 자잘한 능력들은 아마 그녀의 기준으로 자잘한 것들이고, 내겐 큰 도움이 되는 것들이 아닐까 싶었다.

"뭔가, 나쁜 점은 없습니까?"

"딱히?"

"당신 기준으로 말고, 제가 생각했을 때 후회할 만한 것들 말입니다."

"정말로 없는걸. 애초에 인간을 몽마로 만드는 경우가 거의 없긴 하지만, 적어도 내가 본 인간 출신 몽마들 중에 후회한다는 녀석은 하나도 없었어."

생각할 것도 없다는 가벼운 태도였지만 확실하게 선을 긋는 대답이었다.

"제가 몽마가 되면 저한테 정기를 받아 간다는 조건은?"

"그대로야. 8대 2. 네가 8이고 내가 2야. 이 정도면 내가 엄청 손해 보는 거다?"

애초에 지금까지 정기를 누가 어떻게 가져가는지도 몰랐던 상황이었으니 이것 역시 딱히 의미는 없는 질문이다. 잘은 몰라도 8대 2라는 수치는 나한테 나쁘지 않아 보였고.

당장 눈에 보이는 조건만 본다면 몽마가 되는 건 딱히 손해될 게 없는 일이다.

그나마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다면 인간이 아니게 된다는 것 정도겠지만 자칭 몽마인 눈앞의 여자를 보면 겉모습 자체는 평범한 인간이랑 다를 것도 없어 보였고.

적어도 내 빈약한 상상력으로는 후회할 만한 거리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할 거야?"

"해보죠. 뭐."

반쯤 포기하듯 대답했다.

나중에는 경솔하게 결정했다고 후회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어차피 서큐버스 시스템을 얻기 전에는 반쯤 내려놓은 인생이었고, 얻은 뒤에도 뒤가 없는 사람처럼 하고 싶은 대로 살았다.

수상하다고 해서 몸을 사릴 거였다면 애초에 서큐버스 시스템을 무시해야 했고, 서큐버스 시스템의 능력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한 뒤에도 사용하지 말았어야 했다.

눈앞에 있는 것이 어플이 아니라 사람이 됐을 뿐. 수상한 것도, 상대의 진의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후후. 쿨해서 좋네. 그럼 지금 바로 시작한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 일방적인 통보와 함께 그녀의 팔이 쭉 뻗어 나왔고, 가느다란 손가락 끝이 이마에 툭 닿았다.

*

꿈이다.

누가 뭐라고 알려줄 필요조차 없이,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좁아터진 원룸에서는 듣기 싫은 고함소리가 오가고 있었고, 익숙한 얼굴의 두 사람이 서로에게 의미 없는 고함을 쏟아내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아버지와 어머니.

이제 와서는 남이나 다름없고, 최근 몇 년 동안은 얼굴조차 보지 않았던 두 사람이었지만 함께 살았던 기간이 길었던 덕분인지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이 둘이 싸우는 내용은 항상 똑같았다. 돈 좀 벌어와라. 똑바로 살아라. 어쩌다 당신 같은 인간이랑 결혼해서 인생을 망쳤는지 모르겠다. 내 인생 돌려내라.

서로가 제대로 되먹지 못한 인간이었으면서도 상대를 비난하기 바빴던 두 사람은 원룸 한구석에서 자기들의 한심한 모습을 지켜보는 어린아이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았다.

이 풍경은 쭉 변하지 않았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고, 자진해서 입대 신청을 넣고 군대로 떠날 때까지 두 사람은 지치지도 않고 지겹도록 싸워댔다.

'그래서였나.'

한 번도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이건 아주 길게 이어진 무기력의 학습이었다.

어릴 때는 두 사람이 싸우는 게 싫었다.

하지만 유치원도 들어가지 못한 어린아이가, 겨우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아이가 뭘 할 수 있겠는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빨리 그 둘이 지쳐 누구 하나가 홱 나가버리고, 집이 조용해지는 것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조금 나이를 먹고 자신의 집안이 얼마나 막장인지, 얼마나 답이 없는 곳인지를 깨달았어도 나는 여전히 그 집에서 시끄럽게 오가는 고함소리를 들으며 지냈다.

여전히 듣기 거슬리긴 하지만 이제는 익숙해진 일이었고, 여전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속 시원하게 포기하니 마음은 편해졌다.

고등학생 무렵에는 그들을 없는 사람 취급했다. 다행히도 학교에서는 밤늦게까지 야자를 시키며 밥까지 먹여준 덕분에 집은 그저 돌아와 잠만 자는 곳이 되어 오히려 편했다.

어느샌가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바람맞지 않고 잠들 곳이 있으면 충분했고. 하루에 한두 끼나마 굶지 않으면 충분했다.

물론 부모라는 인간들은 밥은커녕 급식비에도 관심이 없었기에 내가 알아서 교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동사무소를 찾아다니며 얻은 결과였지만.

그나마 바라는 게 있었다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혼자서 조용히 쉴 수 있는 공간을 원했고, 학교 컴퓨터 실에서 조금씩 했던 게임을 해보고 싶다는 것 정도가 욕구의 전부였다.

군대에서 전역하고 독립한 뒤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근무 환경이 좋고, 월급이 많은 회사가 아니라 먹고 살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으로 아무 데나 이력서를 뿌리다 취직했고, 집도 잠만 잘 수 있으면 충분하다는 생각에 아무 고시원이나 들어가 게임하고, 잠만 자면서 지냈다.

그 외엔 하는 것도 없다 보니 자연스럽게 돈은 모이고 있었지만 조금씩 쌓이는 돈을 보며 뿌듯해하는 일도, 그 돈으로 뭔가를 하겠다는 생각도 없이 지냈다.

내 성향이 변하기 시작한 건 서큐버스 시스템을 얻은 뒤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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