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서큐버스 시스템-110화 (110/775)

< 110화 > 회원제 피트니스 (1)

철컥, 철컥, 철컥.

마치 정밀한 기계가 돌아가는 것처럼 규칙적이고 선명한 쇳소리가 들려온다.

"…후우우."

깊게 들이켰다 내뱉은 한숨은 그간의 고생을 보상해주듯 뜨거운 열기가 빠져나가며 시원한 공기가 스며드는 감각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철컥, 철컥, 철컥-!

조금씩 빠르게 들려오기 시작하는 마찰음은 빠르게 절정을 향해 나아갔고, 마침내 채앵, 하고 청량한 소리와 함께 끝을 맺었다.

[다이아몬드 Ⅳ 랭크로 승급했습니다.]

"씨이발…. 진짜 길었다."

내가 어지간해서 욕은 잘 하지 않는 편인데, 전역과 함께 시작했던 당시에, 그리고 지금까지도 유행하고 있는 이 빌어먹을 게임에 대한 감상에서는 도저히 욕이 빠질 수가 없었다.

서큐버스 시스템을 얻기 전에는 퇴근 후에는 항상 이 게임만 붙들고 있었고, 서큐버스 시스템을 얻은 뒤에도 나름대로 꾸준히 즐겼던 게임이다.

게임 자체는 재밌었지만 안에 미친놈들이 워낙 많았던 탓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

브론즈에서 시작해 실버로, 실버에서 골드를 넘어 플래에 도착했다.

소위 브실골이라고 부르는 구간은 유튜브를 보며 적당히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넘어갈 수 있었지만 플래티넘 구간에서부터는 확실히 게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의 비중이 늘어나면서 게임 한판 한판의 피로도도 높아지고 시간도 많이 빼앗겼다.

무슨 미친놈들은 또 그렇게 많은지, 아무런 이유도 없는 트롤은 줄어들었지만 조금만 기분이 상해도 던져버리는 놈들의 비중은 더 많아져서 분명히 티어는 올랐는데도 개판인 건 마찬가지였다.

"망할 쓰레기 게임 같으니. 다시는 하나 봐라."

이 게임은 이걸로 끝이다.

어차피 이번 시즌은 이미 세기말이라고 불리는 막바지 구간에 돌입했으니 남은 시간 안에 더 위를 노리는 것도 힘든 일이고, 이 위부터는 슬슬 노력보다는 재능이 크게 필요한 구간이었기에 굳이 아득바득 위로 기어 올라갈 생각도 없었다.

서큐버스 시스템을 얻기 전이라면 놀 거리가 게임밖에 없었으니 더 올라가려고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굳이 게임 하나에 목매고 있을 이유도 없고.

이 게임은 이제 즐길 만큼 즐겼으니 다음에는 좀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게임으로 할 생각이었다.

"아니, 일단 게임보다는 다른 뭔가가 필요한데."

의자 등받이를 아래로 쭉 내려 반쯤 누운 채로 중얼거렸다.

정기에 유통기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쌓인 정기도 슬슬 백만이 다 되어 가는 상황이고, 집과 직장만을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생활에 변화가 없었다.

그나마 생활에 변화를 주던 게 성은영이었는데, 불시 점검 이후로 완전히 내게 마음을 열어버린 탓에 조금씩 공략하는 재미가 떨어져 굳이 찾아갈 마음도 들지 않았다.

단순히 욕구를 푸는 정도라면 집에서도 충분히 만족스럽게 해결할 수 있었으니까.

"운동…. 진짜 운동이라도 할까…?"

작년 이맘때 서큐버스 시스템을 얻기 전에도 운동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동안도 간간이 운동이나 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계속 미루고 있었다.

운동의 목적 자체가 고생해서 만들어놓은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인데, 별다른 운동도 하지 않고 지냈음에도 근육이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체력이 좋아지고 있었으니 매번 생각으로만 그친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

완전히 굳어져 버린 생활 패턴에 변화도 좀 주고, 운동도 하면서 생활에 활력도 좀 불어넣으면 좋지 않겠는가.

솔직히 말하자면 매일 게임과 섹스만으로 시간을 보내다 보니 너무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가 지나가는 기분도 없잖아 있었다.

"이번엔 진짜 제대로 알아보자."

물론 알아본다고 해서 내가 알아보는 건 아니다.

"아, 주인님! 저녁 시킬까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방 밖으로 나오자 검은색 브라탑에 레깅스 차림으로 요가 자세를 취하고 있던 유서연이 확 밝아진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저녁은 알아서 시키고. 예진이는 오늘도 바쁘대?"

"네. 졸업 논문 때문에 한동안은 바쁠 거라나 봐요."

나야 대학에 가본 적이 없으니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대학생들은 과제에 치여 산다는 이미지가 있으니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꼭 여기서 자고 가라고 강요한 적은 없었지만 임예진의 생활 패턴이 꼬인 원인을 제공한 것도 내 쪽이기도 하고.

바쁘다면서도 가끔은 참지 못하고 찾아와 달라붙는 모습을 보면 결국 노예라는 사실이 중요한 거지, 굳이 유서연처럼 24시간 찰싹 달라붙어 지낼 필요는 없겠다 싶기도 했다.

"예진이야 알아서 하게 냅두고, 혹시 근처에 괜찮은 헬스장 좀 알아볼래?"

"헬스장이요?"

"응. 아무래도 요새 빈둥거리기만 했더니 몸이 늘어지는 것 같아서 운동 좀 하려고."

"몸이요…? 일단 저녁만 주문하고 바로 알아볼게요. 따로 드시고 싶으신 건 있으세요?"

유서연은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리면서도 곧바로 대답했다.

"오늘은 밥류로 먹자. 밥으로 한 것 중에 아무거나 시켜."

"네! 지금 바로 시킬게요!"

*

여태 시켰던 일들은 길어야 하루, 빠르면 당일에 처리하던 유서연이었지만 헬스장은 제법 신중히 고른 모양인지, 사흘 정도가 지나고 나서야 결과를 들을 수 있었다.

"가까운 거리는 아닌데, 집에서 차로 40분 정도 걸리는 곳에 회원제로 운영되는 클럽이 있어요. 이 근방에서는 거기가 가장 괜찮을 것 같아요."

"클럽? 헬스장이랑은 다른 거야?"

"음…. 쉽게 설명해드리자면 클럽 시설 안에 헬스장이 포함돼 있어요. 운동만 하고 싶으시면 운동만 하시면 되고, 수영장이나 테니스장 같은 스포츠 시설, 스파나 사우나  같은 시설들도 이용할 수 있고요."

"듣기만 해도 엄청 비쌀 것 같은데."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고, 주인님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숨기려고 한다기 보다는 괜히 부담 갖지 않게 하려는 배려가 담긴 대답이었다.

"그래. 착하다 착해."

"히히…."

기특한 마음에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유서연은 머리를 쓰다듬기 쉽도록 고개를 낮추며 헤실헤실 풀어진 표정으로 웃었다.

"그런데, 차로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면 조금 번거로운데. 네가 데려다주려고?"

"네. 어차피 저도 운동은 꾸준히 하고 있으니까, 데려다드리는 김에 같이 하려고요."

그렇다면야 나쁘지 않다.

최근에는 항상 유서연의 차로만 돌아다닌 탓에 게을러졌는지 대중교통을 쓰기 귀찮은 감이 조금 있었는데, 차로 다닌다면야 거리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럼 지금부터라도 다닐 수 있는 건가?"

"네. 회원증만 있으면 언제든지 이용하실 수 있어요."

"그럼 지금 바로 가보자."

마침 일도 끝나서 집에 가려는 참이고, 어차피 이대로 집에 가 봐야 쓸데없이 시간만 보낼 테니까. 일단 어떤 곳인지 구경 정도는 해도 괜찮겠지.

유서연의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평생 이런 곳에 들어가 볼 일이나 있을까 싶은 화려한 빌딩이었다.

'이런 기분도 간만에 느껴보네.'

그래도 유서연의 집에서 지내며 호화로운 생활에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회원제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그냥 괜찮은 헬스장 정도나 찾아볼까 하고 시켰던 일이 이런 고급스러운 건물로 이어질 줄은 몰랐다.

건물 안으로 들어와 로비에 들어서자 대기하고 있던 안내원이 곧바로 다가와 생긋 웃으며 꾸벅 인사를 건네왔다.

"오늘도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내가 필요하십니까?"

"음…. 어떻게 할까요?"

안내원의 질문에 유서연이 자연스럽게 내게 선택권을 넘겼다.

"일단 운동부터 하고 싶은데."

"그럼 일단 피트니스 쪽으로 갈게요. 트레이너는요?"

"있으면 좋지. 있어?"

애초에 괜찮은 헬스장을 알아봐달라고 한 것도 제대로 가르쳐 줄 트레이너가 필요해서였으니까.

"피트니스로 트레이너 두 명 보내주세요. 헬스랑 필라테스 쪽으로요."

"알겠습니다."

"가요."

내가 뭐라고 할 틈조차 없이 안내원에게 지시를 마친 유서연이 팔짱을 끼고 자연스럽게 날 이끌었고, 나는 그대로 유서연이 이끄는 대로 따라서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트레이너도 바로바로 붙여주고. 돈이 좋긴 하네."

"회원제니까요. 고객들이 요구하는 건 어지간하면 다 들어줄 거예요."

"혹시 미녀 강사한테 19금 서비스 같은 건 못 받나?"

"…합법적으로 운영되는 곳이라 그런 서비스는 없을 거예요."

나도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불법적으로 운영되는 곳도 있다는 건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살짝 호기심이 들었지만 지금은 건전하게 운동을 즐기러 왔으니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이야. 체단실이랑은 수준 자체가 다르네."

입대하기 전에는 헬스장에도 다녀보지 않은 나로서는 비교 대상이 부대에 있던 체단실 뿐이었는데, 이 정도면 비교하는 게 미안해질 정도의 수준이다.

내가 상상하던 땀 냄새 가득하던 헬스장과는 달리, 넓은 공간 곳곳에 배치된 번쩍번쩍한 운동기구들과 전면을 가득 채운 유리창 너머로 훤히 내려다보이는 주변 풍경은 오히려 깔끔하고 시원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겼다.

"탈의실은 저쪽인가 봐요."

"갈아입을 옷은 안 갖고 왔잖아."

"안에 다 구비 해뒀을 거예요."

"그래? 그럼 일단 갈아입고 올게."

유서연이 말한 대로, 탈의실 안에는 사이즈별로 갈아입을 옷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헤매는 일 없이 곧바로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다.

"뭔가 생활복 같은 느낌인데."

사제 운동복이라도 사 입어야 하나.

내가 옷을 잘 차려입는 편은 아니지만 생활복 같은 느낌이라고 생각하고 보니 뭔가 옷차림이 구려진 기분이다.

운동을 가르쳐주던 후임한테 3대 500 이하는 언더아머 금지라는 말을 들은 기억도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고급 피트니스에 그런 똥군기가 있지는 않으리라.

"…서연이가 좋아하겠네."

안 그래도 나한테 뭐 하나라도 주고 싶어 하는 성격에 내가 입을 옷이라며 한두 개씩 옷을 사 몹는 취미도 있었으니 내 쪽에서 먼저 옷 좀 사달라고 하면 기뻐할 게 분명하다.

옷을 갈아입고 나가자 그사이에 들어온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오?"

한 명은 차분한 인상의 포니테일을 한 여자였는데, 키는 170 초반쯤 돼 보이는 키와 쭉 뻗은 라인이 인상적이었다.

다른 한 명은 밝고 사근사근한 인상의 여자였고, 키는 평범한 편이었지만 전체적인 비율이 워낙 좋은 탓에 이쪽 역시 미인이라고 부르기에 충분한 외모였다.

"최민석 님?"

두 명 중 날카로운 인상의 여자가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

나나 유서연같은 고객인 줄 알았는데, 미리 부탁해놨던 헬스 트레이너였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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