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 수상한 분대장 (2)
"PX에 사람이 너무 몰려서 말이죠. 좀 기다리다 안 되겠다 싶어서 씻고 나서 다시 가기로 했습니다."
"그러다 저녁 못 드시는 건 아닙니까?"
"하하. 못 먹을 정도는 아닙니다. 매년 1시간 정도만 기다리면 자리가 비니까요. 예비군들이 모이는 부대인 만큼 물량도 항상 넉넉하게 채워두는 모양이고요."
그렇구만.
나야 예비군 1년 차라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어차피 이미 밥도 먹고 왔으니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고.
그런데, 그걸 알고 있었으면 애초에 미리 씻고나서 가면 되는 거 아닌가?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하나둘 옷을 벗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니 이제야 씻으러 들어가는 것 같은데 말이다.
'진짜 찝찝해 뒤지겠네.'
하루 종일 흙먼지가 가득한 군부대를 돌아다니고 땀도 흘렸으니 씻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여기까지 와서 씻지 않고 돌아간다고 하면 나만 이상한 놈이 되는 거다.
"…쯧."
결국 나는 작게 혀를 차면서도 옷을 벗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노골적으로 내 상반신을 훑어내리는 황근출의 시선이 느껴졌다.
"저도 운동을 좀 한 편인데, 민석 씨도 굉장히 몸이 좋으시네요?"
"예, 뭐…."
몸이 좋다는 칭찬 역시 저 노골적인 시선과 함께 받으니 뭔가 기분이 더럽다.
그것과는 별개로, 확실히 운동을 좀 했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황근출의 몸도 상당히 각이 제대로 잡혀 있었다.
나와 같은 타이밍에 상의를 벗은 황근출은 마치 빨리 아래쪽도 벗으라고 재촉하는 것처럼 먼저 바지와 팬티를 한 번에 잡아내려 시원스럽게 하반신을 드러냈다.
'제법인데…?'
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만큼 상당한 크기의 물건이 덜렁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기준이긴 했지만 아직 서지 않았음을 감안해도 제법 큰 편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나뿐만 아니라 근처에서 힐끗 시선을 보낸 다른 남자들 역시 은근한 부러움과 감탄을 드러내고 있다.
게이가 아니더라도 서로 헐벗고 있다면 자연스럽게 시선은 아래쪽으로 갈 수밖에 없다.
경쟁해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남들보다 물건이 크다면 남자로서 자신감이 살아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자신 있다 이거지?'
놈이 저렇게 자신 있게 나온다면 나 역시 숨기지 않는다.
여전히 놈이 공격수인지 수비수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자신감이 저 크기에서 나오는 거라면 아예 내 물건으로 자신감을 팍 억눌러 공격의 의지를 없앨 생각이었다.
"…헉."
나 역시 거침없이 바지를 내려 압도적인 크기의 물건을 보란 듯이 드러내자 곧바로 황근출이 크게 놀랐는지 짧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왓."
"미친…."
동시에 주변에서도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놀라거나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예상 밖이었던 부분은 근처에 있던 사람들만이 아니라 조금 떨어져 있던 이들 역시 술렁이는 분위기에 무슨 일인가 힐끗 시선을 보냈다가 같이 놀라고 있다는 점이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그 정도 크기로 공격수를 할 생각은 아니겠지?'
물론 수비수로 전향한다고 해도 상대해줄 마음은 없지만, 이 정도면 황근출도 주제 파악을 했을….
'…수비수였나?'
황근출이 공격수였다면 내 물건은 그의 자신감을 죽이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가 애초부터 공격수가 아닌 수비수였다면?
그에게 내 물건은 자신감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강렬한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매력적인 물건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황근출의 저 감탄하면서도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눈빛을 설명할 수가 없다.
엉덩이를 따일 위협은 사라졌다고 봐도 좋았지만 여전히 불쾌한 위협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내가 잠든 사이에 물건이 서버리고, 그가 그 틈을 노려 내 위에 올라타려고 한다면?
'씨발. 안돼…!'
"크흠, 흠…!"
나는 크게 헛기침을 하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제서야 넋 놓고 내 하반신에 몰려들었던 시선들이 흩어지며 조금씩 힐끗거리는 시선만이 남았다.
물론 여전히 노골적인 황근출의 시선만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크으…. 장난 아니신데요? 저도 꽤 자신 있는 편인데. 이 정도면 여자들이 아주 껌뻑 죽겠습니다."
이 미친 새끼는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인 주제에 아무렇지도 않게 19금 토크를 걸어온다.
혹시 나한테 애인이 있는지 떠보려는 의도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 역시 확실히 철벽을 쳐야 했다.
"뭐, 그렇죠. 저도 좋긴 하지만 여자 친구가 너무 달라붙어서 조금 곤란할 정도입니다."
내가 이렇게 인싸스러운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나는 애인이 있고, 서로 잠자리를 적극적으로 즐기는 중이다.'라는 의미 정도는 확실히 전해졌을 것이다.
"하하. 좋으시겠습니다."
하지만 황근출은 그런 어필마저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겼다.
샤워실에 들어와서도 굳이 내 옆자리에서 몸을 씻으며 열렬한 시선으로 하반신을 비롯한 내 몸을 위아래로 훑어내리기까지 하는 탓에 점점 기분이 더러워지는 중이었다.
'이걸 신고해버릴 수도 없고.'
단순한 눈빛만으로도 성희롱이 가능한가? 라는 질문의 해답이 여기 있다.
그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단순한 짜증을 넘어선 성적인 불쾌감까지 느껴질 정도였으니 이건 충분히 성희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걸 입증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겠지만.
'아무튼 공격수는 아닌 것 같으니까 최대한 무시하자.'
결국 나는 황근출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최대한 빠르게 몸을 씻고 샤워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미친놈은 내가 씻는 속도에 맞춰 자기도 허겁지겁 몸을 씻고는 기어이 나와 함께 밖으로 나와버렸다.
하지만 다른 분대원들은 아직 씻는 중이라 이후에 같이 PX에 가야 하는 그로서는 자리를 뜰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그의 아쉬운 시선을 뒤로하고 홀로 생활관에 돌아올 수 있었다.
"진짜 재수가 없으려나."
예비군에 온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하필 저딴 인간한테 걸려서 하루 종일 스트레스만 쌓였다.
뭣보다도 재수 없는 것은 이제 조금 있으면 그놈과 이 좁아터진 침상에서 같이 잠들어야 한다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설마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덮치진 않겠지?'
지금 있는 생활관에서 취침하는 사람 수만 30명이다.
정말 어지간히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그런 상황에서 자는 사람을 덮치겠는가.
…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안심시킨 것도 잠시.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활관에 모이고, 취침 준비를 마친 순간 나는 내 실수를 깨달았다.
귀찮은 일은 미리 해두자는 생각에 미리 매트리스를 깔아놓고 누워서 쉬던 도중, PX에서 식사를 마치고 분대원들과 함께 돌아온 황근출은 내가 매트리스를 깔아놓은 자리를 보자마자 곧바로 내 옆에 매트리스를 깔고 자연스럽게 벌러덩 누워버렸다.
'이 미친 새끼가 진짜로…?'
나는 최대한 시선을 피하며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황근출 역시 핸드폰을 들여다보면서도 중간중간 잊어버리지 않고 내 쪽을 노골적으로 힐끗거렸다.
"민석 씨. 혹시 담배 피우십니까?"
"안 피웁니다."
마지막으로 소등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황근출이 슬그머니 담배를 피우러 가자는 신호를 보냈지만 그마저도 확실하게 끊어냈다.
'이 새끼는 방심하면 안 될 놈이야.'
만약에, 정말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나는 놈이 혹시라도 내 몸을 노릴 경우를 대비해 모포로 내 몸을 둘둘 말아놓은 채로 잠자리에 누웠다.
이렇게 해두면 내가 잠든 사이에 덮치려고 하더라도 우선은 몸을 둘둘 말고 있는 모포부터 벗겨내야 할 테니 그러는 사이에 내가 깨어나기만 한다면 제대로 저항할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도, 내 전략이 통한 건지 녀석이 생각 외로 미친놈은 아니었는지 첫날 밤은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둘째 날, 나는 여전히 황근출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최대한 녀석과 둘이 있을 만한 상황을 만들지 않았고, 조금만 기회가 있으면 녀석과 떨어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 다녔다.
그러다 보니 이날도 훈련이 귀찮다느니 하는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이 하루가 빠르게 지나갔고, 또다시 소등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까지 다가왔다.
"민석 씨. 잠시 담배 좀 피우러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저 담배 안 피운다니까요."
"압니다. 그냥 잠깐 드릴 말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잠깐만 시간 좀 내주시죠."
이제 내일이면 훈련도 끝나는 상황이었으니 조급해진 탓일까, 녀석은 이제 뒤가 없는 정공법으로 내게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기를 청했다.
'어떡할까.'
이 정도는 거절해버리면 그만이다.
귀찮으니까 그냥 여기서 말하라고, 조금 크게 떠들어서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으면 녀석도 허튼짓은 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첫날을 무사히 넘어갔다고 해서 오늘 역시 무사히 넘어간다는 보장이 있을까. 이렇게까지 대놓고 행동하는 걸 보면 상당히 몸이 달은 모양인데.
어차피 내일이면 퇴소였으니 조금 피곤하더라도 밤을 새워버리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나 역시 제대로 거절 의사를 밝혀두는 게 차라리 깔끔할지도 모른다.
"무슨 일인데 그럽니까?"
"여기서 말하기는 조금 그렇고, 나가서 얘기하시죠. 절대 나쁜 얘기는 아닐 겁니다."
"…알겠습니다. 나가시죠."
솔직히 말하면 나도 이틀 동안 참을 만큼 참았다.
그동안은 기회가 없어서 따지지 못했을 뿐이지, 황근출이 먼저 자신이 게이임을 밝히고 나한테 기분 나쁜 요구라도 한다면 제대로 화를 낼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황근출의 뒤를 따라 생활관 밖으로 나왔다.
그의 뒤를 따라서 도착한 곳은 복도 한구석에 위치한 전화박스 앞이었는데, 병사부터 예비군까지 죄다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판에 굳이 공중전화를 사용할 일은 없었으니 눈에 띄기는 해도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기엔 딱 좋은 장소였다.
"그래서, 무슨 얘기입니까?"
"음…. 민석 씨는 애인이 있다고 하셨죠?"
"예. 있습니다."
"그럼 조금 민감한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만…. 애인분과는 진지하게 교제하시는 중입니까?"
"예. 별다른 문제가 없는 한은 결혼까지 갈 생각입니다."
물론 실제로는 노예만 있을 뿐이지 여자 친구도 없고 결혼 생각도 전혀 없다.
하지만 당장 여기서 그걸 어떻게 확인하겠는가.
내가 단호하게 그렇다고 말하면 그게 사실인 상황이었으니 나는 망설임 없이 공수표를 날렸다.
확실히 내 허세가 먹히긴 먹혔는지, 황근출은 조금 곤란한 표정과 함께 무언가를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지가 아무리 미친놈이라도 이렇게 확고하게 결혼할 여성이 있다는 이성애자를 꼬실 수 있겠는가.
"…그렇군요. 그렇다면 조금 기분 나쁘실 수도 있겠지만 실례를 무릅쓰고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새끼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미친놈이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