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 수상한 분대장 (1)
임예진이 노예가 되긴 했지만 아쉽게도 유서연의 집에서 함께 지낼 수는 없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우선은 공간이 부족하다는 점이 컸다.
유서연의 방과 내 방을 제외하고도 방이 하나 남기는 했지만 그 방은 드레스 룸이라는 이유로 온갖 옷가지들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치우려면 치우지 못할 것도 없었지만, 어차피 임예진 역시 가족들이 자취하고 있는 주소지를 알고 있고, 부모님이 자주 찾아오기도 했기 때문에 오피스텔을 빼 버릴 수도 없는 상황이기도 했고.
물론 집을 따로 뒀다뿐이지, 사실상 같이 사는 거나 마찬가지긴 했다.
방학 때는 다른 일이 없는 한은 최소한의 짐만 챙겨서 매일 자고 가기도 했고, 방학이 끝난 뒤에는 아예 자기 집에는 들르지도 않고 우리 집으로 돌아왔으니까.
아무튼, 결과적으로는 편리한 두 번째 노예를 얻은 상황이었지만 내 생활 자체는 딱히 변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유서연이나 임예진의 입으로 한 발 빼고 출근. 일하고 돌아와서는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가 두 노예와 함께 질펀한 시간을 보내고 잠드는 생활.
남들이 보기에는 충분히 부러운 생활이겠지만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심지어는 매일 꾸준히 쌓아온 정기가 다시 50만을 돌파해버린 상황이었으니 더더욱 어디 괜찮은 여자가 없나 고민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서큐버스 어플을 얻은 뒤로 까맣게 잊고 미뤄두고 있었던 일 역시 코앞으로 다가온 상태였다.
★병무청 병역 이행 안내
[동원훈련 안내]입니다.
1. 훈련 기간 : 2021-9-17(화)~2021-9-19(목) (2박 3일)
2. 훈련장소 : OOO부대(OOO시 OO구 OOO로 239)
3. 훈련일 10시 30분까지 첨부된 장소로 모이시기 바랍니다.
…
빌어먹을 예비군.
현역 때는 고작 며칠, 혹은 고작 하루 갔다 오는 게 뭐가 대수인가 싶었지만 막상 편하게 지내다가 다시 훈련을 받으라고 하니 겨우 2,박 3일이라고 해도 더럽게 귀찮았다.
집보다 군대가 편했던 건 옛날 일일 뿐이었다.
내 편안한 집을 두고 왜 그 빌어먹을 군부대에서 먹고자야 한단 말인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짜증 수치가 빠르게 솟아올랐다.
"예비군 참가자분들은 차량에 탑승해주시기 바랍니다─."
"후우…."
당장 나뿐만이 아니라 주변 이곳저곳에서 귀찮음이 뚝뚝 묻어나는 한숨이 들려온다.
결국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만이 아니라 이미 짜증 나는 현실을 받아들인 이들은 세상 의욕 없는 걸음걸이로 터덜터덜 차로 걸어 들어갔다.
"출발하겠습니다─."
인솔을 나온 병사 역시 더럽게 의욕 없는 목소리로 출발을 알렸다.
고작 2, 3일 시달리는 우리도 귀찮아 죽겠는데, 앞으로 매일같이 군부대에 처박혀 있는 병사들이라고 의욕이 있겠는가.
이제야 하루가 멀다하고 군대를 욕하던 동기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세상 착잡한 마음으로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도중, 묘한 시선이 느껴져 살짝 고개를 돌려보니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미묘한 눈빛으로 내 옆모습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건 또 뭐야?'
그냥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라 시선이 가는 정도가 아니라 대놓고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다.
노골적인 시선에 슬쩍 눈이 마주치자 멋쩍은 표정으로 웃음을 지으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내 얼굴을 넘어서 몸까지 노골적으로 훑어대고 있었다.
'뭔데…?'
가뜩이나 기분도 별로인데, 눈이 마주쳤음에도 이렇게 노골적으로 사람을 훑어내는 시선이 기분 좋게 느껴질 리가 없다.
물론 상대가 예쁜 여자였다면 달랐겠지만 지금 날 쳐다보고 있는 상대는 여자도 아닌 군복을 입은 시커먼 남자였으니 더더욱 별로였고 희미하게나마 성욕 비슷한 감정도 느껴졌다.
"왜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이게 내가 차릴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였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이쪽이 자신의 시선을 눈치챘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느꼈을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시선을 보내오는 중이었으니까.
"아, 죄송합니다. 너무 잘생기셔서 무심코 쳐다봤네요."
"……."
잘생겼다는 말은 분명히 칭찬이다.
하지만 남자의 집요한 시선과 함께 들어보니 왠지 기분이 더러웠다.
'게이인가?'
내가 지냈던 부대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지만 가끔 군대에 들어간 게이가 후임을 성희롱하거나 강간하는 사건이 있다는 것 정도는 들어봤다.
옆자리에 앉은 남자 역시 그런 케이스라면?
동성애자에게 동성이라는 건 성적 매력을 가진 이성이나 다름없다.
그런 이유로 특전의 효과가 남자에게도 통하고, 나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고 있는 거라면?
'끔찍한데.'
상대가 공격수인지 수비수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엉덩이에 뭘 집어넣을 생각도 없고, 남자의 엉덩이에 박고 싶은 마음도 없었으니까.
'재수가 없으려나.'
자리를 옮기고 싶어도 차량은 이미 만석이고, 모르는 사람한테 대뜸 다가가 자리를 바꿔 달라고 하기도 뭣하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시비를 걸고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쳐다보지 말라고 정색하기에도 애매하고, 진지하게 따졌다가 게이가 아니라고 잡아떼면 나만 곤란할 것 아닌가.
'조금만 참자.'
어차피 부대까지만 가면 알아서 흩어질 텐데.
괜한 실랑이를 벌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분명히 그랬을 텐데.
"하하. 다들 잘 부탁드립니다."
우연인지 의도한 결과인지, 분명히 차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따돌렸던 인간이 어느샌가 분대장이 되어서 넉살 좋게 인사를 건네오고 있었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합니다. 열심히 해 봐야 나오는 것도 없는데, 적당히 하죠."
"수고 좀 해주십쇼."
그래도 얼굴도 제법 잘생긴 편에 웃는 인상도 나쁘지 않아 다른 분대원들은 적당히 그의 인사를 되돌려줬다.
애초에 분대장이라는 귀찮은 자리를 대신 맡아준 사람이었으니 그가 게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한은 의도야 어쨌든 간에 호감이 더 크겠지.
"…잘 부탁합니다."
결국 나도 분위기를 따라 적당히 한 마디 대답하자 그의 표정이 또다시 기묘한 웃음기를 띄웠다.
씨발. 소름 돋네.
그래도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대놓고 이상한 짓을 할 리는 없으니 일단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기분은 조금 더러웠지만 최대한 그렇게라도 상황을 좋게 보기로 하고 마음을 정리했다.
"다들 자기소개라도 할까요? 저는 황근출이라고 합니다. 나이는 스물일곱이고요."
'뭐지…?'
뭔가 근거 없이 불길해지는 이름이다.
어디서 들어봤나 싶었지만 황 씨라는 드문 성씨에 근출이라는 독특한 이름을 들어봤다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내가 기묘한 찝찝함에 다시 한번 고민에 빠진 사이, 다른 사람들은 빠르게 자기소개를 마치고 내 차례라는 듯 시선을 보내왔다.
"…최민석이라고 합니다. 나이는 스물셋입니다."
"민석 씨라고 하시는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소개를 할 때는 얌전히 있던 놈이 내 이름을 밝히자마자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을 해주고 다시 한번 잘 부탁하는 말까지 덧붙였다.
사람 속은 모르는 일이지만 내 더러운 예감이 점점 사실처럼 느껴지는 중이었다.
"예…. 뭐…."
그래도 아직 이상한 행동을 하지 않았으니 여기서 까칠하게 굴면 오히려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릴 테니 별다른 티도 내지 못하고 적당히 대답했다.
다행히도 이름을 확인한 황근출은 별다른 이상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천성이 인싸인 모양인지 다른 사람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고, 가끔은 한 발짝 떨어져 거리를 두고 있는 나를 대화에 끼워 넣기는 했지만.
그 외에 그에 대해 알게 된 점이라면 살짝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면서도 땀 몇 방울 흘리지 않고 호흡도 멀쩡할 정도로 체력이 좋다는 점이나 소매를 걷었을 때 보인 팔뚝으로 봐서는 제법 운동을 한 몸이라는 것 정도였다.
'공격수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나도 어디 가서 체력으로 밀리는 편은 아니지만 운동을 그만둔 지 꽤 지난 지라 힘으로 붙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 자신할 수 없다.
게다가, 상대가 수비수라면 무슨 짓을 하든 내가 세우지 않고, 박아넣지만 않으면 최소한의 선은 넘지 않을 수 있었지만 상대가 공격수라면 내 의사와 상관없이 상대의 의사만으로도 선을 넘어버릴 수도 있었으니 그가 수비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길 바랄 뿐이었다.
그나마 좋았던 점을 꼽자면, 황근출이 내게 집요하게 시선을 보내왔듯이 나 역시도 황근출을 계속해서 경계하다 보니 어느샌가 훈련 시간이 전부 끝나버렸다는 것이었다.
"조교한테 물어보니 PX 이용도 괜찮다고 하는데, 오늘 저녁은 냉동이나 먹는 게 어떻습니까? 당연히 제가 쏘겠습니다."
먼저 제안한 쪽은 황근출이었다.
메뉴가 뭐가 됐든 군대 식당보다는 냉동이 맛있다는 건 어지간히 부대 밥이 맛있거나 괴식성을 가지지 않았다면 다들 동의하는바.
분대원들은 황근출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물론 나 역시 맛대가리 없는 짬밥보다는 냉동이 낫다는 의견에 동의하는 바였지만 식사 정도는 편하게 하고 싶은 마음에 제안을 거절했다.
"제가 지금 식단 조절 중이라서요. 죄송하지만 저는 식당에서 적당히 먹고 오겠습니다."
"몸도 꽤 좋으신 것 같은데, 운동 중이신가 보네요?"
"최근에 다시 시작했습니다. 배가 좀 나온 것 같아서요. 저는 식당에서 먹고 올 테니 다들 맛있게 드시고 오세요."
단순한 핑곗거리에 지나지 않는 말이었지만 어쨌든 이유가 있어서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갈 수는 없었는지, 황근출은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나를 풀어줬다.
어차피 식후에는 다시 생활관에서 보게 될 테니 잠깐 정도는 괜찮다는 거겠지.
"…에이 씨. 더럽게 맛없네."
분명 현역 때는 해물 비빔 소스를 제외하면 다들 밥 경찰이라고 쉬쉬하던 순살 시리즈나 코다리 시리즈까지도 맛있게 먹었는데.
유서연과 함께 지내면서 입맛이 확실히 비싸지긴 했는지 그럭저럭 괜찮다 싶었던 메뉴가 더럽게 맛없게 느껴졌다.
그래도 꾸역꾸역 입에 집어넣다 보니 제법 적응이 됐는지, 그럭저럭 먹을 만한 것 같기도 하고.
맛없다고 중얼거린 지 얼마나 지났다고, 순식간에 짬밥에 적응하는 내 모습에 너는 천성이 군대 체질이라며 부사관 제의를 받았던 일이 생각나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군대 체질이었네."
물론 그때 부사관을 했으면, 하는 후회 같은 건 없다.
지금도 서큐버스 시스템이 어떤 경로로 내 손에 들어왔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걸 손에 넣은 뒤부터는 과거에 대한 후회가 아니라 앞으로에 대한 기대만이 머릿속에 가득했으니까.
식사를 마치고, 최대한 황근출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곧바로 샤워장으로 향했다.
혹시라도 생활관에서 어영부영 시간을 때우다가 황근출을 마주치면 그가 욕실까지 따라올 것 같아서였다.
"오, 민석 씨도 씻으러 오셨습니까?"
그런데, 왜 이 새끼가 여기 있는 걸까.
PX는 사실 거짓말이고, 여태 여기서 날 기다렸던 건 아니겠지?
강제적으로 알몸이 되어야 하는 샤워장이라는 장소가 찝찝한 기분을 더더욱 부추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