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 (2)
"언니라고 불러볼래요?"
"네…?"
"제가 언니잖아요? 친한 사이에 불편하게 존칭까지 쓸 필요는 없죠."
'언제부터 친했다고…?'
서로 얼굴을 마주친 지 10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도대체 언제 친한 사이가 됐단 말인가.
심지어 임예진은 아직 자신을 싸늘하게 훑어내리던 유서연의 시선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잊혀지지 않은 상태라 더더욱 꺼림칙했다.
"…안 할 건가요?"
'저 눈빛 좀 어떻게 안 되나…?'
정말로 자신과 친하게 지낼 생각이긴 한 모양인지 처음처럼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는 건 아니었지만 차라리 그쪽이 낫겠다 싶을 정도로 무감정한 눈빛으로 자신과 시선을 맞추고 있는 유서연의 눈빛은 꺼림칙하기 짝이 없었다.
"…언니?"
"응. 좋네. 이왕 친하게 지내기로 한 거, 말도 편하게 하자. 괜찮지?"
"…괜찮아요."
이걸 친해졌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얼굴만 아는 사이에서 이름도 알게 됐고, 언니 동생 하는 사이에 말도 편하게 놓았으니 친해졌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째 마음의 거리는 더 멀어진 느낌이다.
유서연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임예진은 그랬다.
"그럼…. 나한테 궁금한 건 없어?"
"언니…. 한테요…?"
"우리끼리 어디 놀러 다닐 것도 아니고, 얘기라도 많이 나눠봐야지. 궁금한 거 있으면 얼마든지 물어봐."
궁금한 것?
당연히 있다.
"그럼…. 언니는 어쩌다 민…."
찌릿.
"…주인님의 노예가 된 거예요?"
지금의 반응으로 더더욱 궁금해졌다.
조선 시대에 살았던 노예들도 반항만 못 했다뿐이지 자기 처지를 비관하면서 살았을 텐데.
도대체 무슨 일을 겪었기에 21세기에 이렇게 훌륭하게 자발적인 노예가 될 수 있는 걸까.
"음…. 이걸 설명하려면 얘기가 조금 길어지는데. 그래도 이건 얘기해주는 게 좋겠네."
잠시 생각을 정리한 유서연은 곧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편안하게 자라고, 그 편안함이 도를 넘어 마약까지 이어지고, 마약에 손을 댔다는 사실을 부모님에게 들켜 편안한 생활이 순식간에 끊어지고, 낙하산으로 들어갔던 직장에 가서도 사고를 쳐서 쫓겨나듯이 최민석과 같은 직장에 들어가게 된 이야기까지.
"처음에는 그냥 스트레스나 풀려고 시작한 일이었지."
스트레스를 풀려고 일부러 사람을 뽑아 괴롭힌다는 것 자체가 임예진의 감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그걸 지적하기엔 이미 상대가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걸 반쯤 받아들인 상태였다.
"새로 뽑은 사람이 주인님이었거든. 처음에는 그동안 했던 것처럼 계속 괴롭혔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최민석만 보면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어느샌가 그에게 강제로 범해지는 상상까지 하며 자위에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그에게 들키고, 반쯤 협박을 당해 그에게 범해지다가 노예 선언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디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다.
무슨 싸구려 야설도 아니고, 아니 싸구려 야설에서도 이런 전개는 쓰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
이것저것 따지고 싶은 부분은 많다.
하지만 애초에 그럴듯한 논리 따위는 없는 이야기였으니 어떻게 넘어간다 치더라도 유서연이 내린 결론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노예인 건데요? 그냥 사귀자고 매달려도 괜찮았고, 최소한 섹스 파트너 정도로만 했어도 괜찮았잖아요."
"그냥 자연스럽게 위아래가 정해지기도 했고, 주인님이 먼저 노예라고 부르시길래 나도 그게 좋아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지."
딱히 이렇게 하자, 하고 정한 관계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런 취급을 받다 보니 어느샌가 노예와 주인이 되어버린 거다.
물론 먼저 최민석을 주인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도 유서연 쪽이었다.
"아니, 그걸로 괜찮아요? 직장에서도 언니가 상사고, 이 집도 언니 거라면서요."
"주인님이 그런 거에 신경을 쓰셨으면 나도 다르게 행동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애초에 그런 건 의미가 없어."
"아니, 왜요!?"
사회적 지위로만 본다면 누가 보더라도 최민석보다 유서연이 위에 있다.
물론 그게 무조건 남녀 간의 우위 관계에 적용되진 않겠지만 같은 직장에 집까지 제공받고 있다면 갑은 유서연일 수밖에 없을 텐데.
"말했잖아. 주인님은 그런 거에 별로 관심이 없어. 집도 직장도 마음에 안 들면 나가버리면 그만이지. 그래도 먹고사는 일에는 지장이 없으니까. 여자? 너처럼 오피에 가든 클럽에서 원나잇을 하든 섹스까지만 가면 안 달라붙을 여자가 얼마나 될 것 같아?"
"아무리 그래도…."
"그런데 나는 달라. 주인님이 없으면 못 살아. 진짜 죽는다는 말은 아니지만, 이제 주인님이 없는 인생은 상상도 못 해."
사고방식 자체가 전혀 다르다.
임예진이 황당한 표정을 짓자 유서연은 피식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그게 이해가 안 가면 넌 여기 왜 있는 건데?"
"네…?"
"너도 지금 여기 있잖아. 내가 왜 노예가 됐는지 이해도 못 하는데, 너는 왜 노예 취급받으면서 여기 있는 건데?"
"그, 그건…."
"사실 알고 있잖아? 주인님이 아니면 만족을 못 하니까 그런 거지. 아예 몰랐으면 몰라도, 한 번 그런 쾌락을 맛봤는데 그걸 어떻게 잊고 살아? 몸은 그 쾌락을 떠올리면서 발정이 나는데, 주인님이 아니면 아무도 만족을 못 시키는 거야. 다른 남자랑 해 봤자 오히려 스트레스만 쌓이겠지."
"윽…."
정곡이다.
애써 외면하고는 있었지만 결국 임예진도 최민석이 아니면 평생 불감증으로 살아야 한다는 불안감에 노예 취급을 받으면서도 그를 따라왔다.
유서연의 말대로, 그 느낌을 몰랐을 때는 포기하고 살려고 했었지만 한 번 그 미칠듯한 쾌락을 맛본 이상 도저히 그걸 잊고 살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이곳에 있는 거였다.
최민석 같은 남자가 세상 어딘가에 있을지는 몰라도, 그런 남자를 다시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으니까.
"그, 그래도 노예일 필요는 없잖아요. 대놓고 노예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노예인 쪽이 더 흥분되잖아…♥"
'아….'
이 사람. 정상이 아니었지.
정말로 행복하다는 듯, 흥분으로 달아오른 표정으로 대답하는 유서연의 모습에 임예진은 깔끔하게 그녀를 이해하려는 생각을 포기했다.
"너도 얼마 안 있으면 받아들이게 될 거야. 그리고, 이건 개인적으로 하는 충고인데. 노예가 싫다고 애인이나 섹파 같은 관계가 되려고 기어오르지 마. 네가 그래 주면 나야 좋긴 한데, 주인님도 일단 네가 마음에 들어서 노예로 삼으신 것 같으니까 하는 충고야."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버려지겠지. 한두 번은 봐주실지 몰라도 계속 주제넘게 굴면 분명히 버리실 거야."
유서연은 이 부분에 관해서는 거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최민석은 여자에게 휘둘리는 성격이 아니다.
지금이야 귀여움받고 있긴 하지만, 결국 기껏해야 말 잘 듣는 애완동물 정도의 취급일 것이다.
아니, 애완동물은 책임지고 키워야 한다는 인식이라도 있지. 자신의 경우에는 조금이라도 선을 넘는 행동을 하거나 버려야 할 이유가 생긴다면 주저 없이 버려질 것이다.
"아무튼, 나는 충고 했어."
"네…."
'내 말을 들을지 말지는 네 자유다'라는 듯한 유서연의 태도에 임예진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심 그와 장기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조금씩 호감을 쌓고, 관계를 개선시키려던 계획을 세웠던 그녀로서는 제대로 정곡을 찌른 충고였으니까.
"그런데…. 노예라고 해도 뭘 하는지 감이 안 오는데…."
"주인님이 원하는 건 뭐든 하는 거지."
"그러니까, 평소에는 뭘 하는 건데요?"
"섹스지."
"그게 다예요?"
"그 외엔 따로 뭘 시키신 적은 없어. 기껏해야 목욕이나 식사 준비 정도?"
생각보다 별거 없다.
노예라고 하기에 뭔가 강압적인 분위기나 부당한 대우를 받을 줄 알았는데, 이건 그냥 가정부에 섹스만 더했을 뿐인 생활이 아닌가.
심지어 같이 살지 않는 자신으로서는 그마저도 할 필요가 없었고.
"중요한 건 제대로 복종해야 하는 거지. 밥 먹는 중이든 자고 있던 중이든 주인님이 벌리라면 벌리고, 빨라면 빠는 거야. 네 경우에는 뭘 하고 있든 간에 주인님이 부르면 바로 달려와야겠지."
"……."
아니, 예상외로 별게 아니지 않다.
자신도 생활이라는 게 있는데, 유서연의 말대로라면 자다가도 최민석이 부르면 일어나서 이곳으로 와야 하고, 지금은 방학이긴 하지만 대학을 다니면서도 강의 중이든 시험 중이든 그가 호출하면 다 끊고 이곳으로 와야 한다는 말 아닌가.
"그건…."
"노예인데 당연한 거지. 주인님이 귀찮게 설명하실 필요 없게 내가 미리 설명해두는 거야. 나중에 고집부렸다가 몰랐다고 하지 마."
결국 이것도 임예진이 아닌 최민석을 위해 하는 말이라는 뜻이다.
"또 궁금한 거 있어?"
"그게…."
처음 왔을 때는 도저히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막상 자신이 엮인 사람들이 정상이 아니라는 걸 받아들인 시점에서 대부분의 의문이 자연스럽게 해결돼버렸다.
"없으면 적당히 쉬고 있어. 주인님 깨시면 그때 어떻게 할지 물어보고."
"…집에 가면 안 되는 건가요?"
"가도 된다고는 안 하셨으니까 일단 기다렸다가 허락받고 가야겠지."
유서연은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딱 잘라 대답하고는 방에 들어갔다가 얼마 지나지 몸에 딱 달라붙는 운동복 차림으로 나와 거실 바닥에 매트를 깔았다.
"운동도 하시나요…?"
"…요가야. 사실 더 제대로 이것저것 하고 싶긴 한데, 함부로 시간을 비울 수는 없으니까 집에서 할 수 있는 운동으로 타협한 거지."
유서연은 어디서 본 듯한 유연한 자세를 취하며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거실에 런닝머신도 있네요? 운동 좋아하시나 봐요?"
"딱히 좋아서 하는 건 아니고, 몸매 유지 겸 체력도 기르려고 하는 거지. 아무래도 주인님이랑 지내려면 조금이라도 체력이 있는 편이 좋거든."
"아…."
결국 운동도 최민석을 위해서 하고 있다는 뜻이다.
임예진 자신도 그렇고, 몸매 유지를 위해 간단한 운동을 하는 여자들이야 흔한 편이었지만 유서연은 애초에 목적 자체가 달랐다.
'파도 파도 괴담이네….'
유서연이 정상이 아니라는 거야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새삼 소름이 돋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기…. 저도 좀 가르쳐 줄 수 있나요?"
정말로 배우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최민석을 마냥 기다릴 바에는 뭐라도 하는 게 낫다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었다.
유서연은 꽤나 유연성이 필요해 보이는 자세를 잠깐 유지하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나서야 대답했다.
"가르쳐주는 건 괜찮은데, 땀이 많이 날 거라 그 옷 입고하긴 조금 그럴걸."
"그럼 옷 좀 빌려주시는 건…."
"많이 헐렁할 텐데."
"……."
유서연의 무심한 대답에 임예진의 시선이 딱 달라붙은 운동복 위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는 가슴으로 향했다.
'씨이…. 나도 작은 편은 아닌데….'
나름 꽉 찬 B컵이라는 가슴과 비율 좋은 몸매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임예진이였지만 유서연의 우월한 유전자가 그대로 드러나는 커다란 가슴에는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