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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큐버스 시스템-81화 (81/775)

< 81화 >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 (1)

반쯤 실신했던 임예진을 조금 쉬게 한 뒤에 함께 모텔에서 나와 집으로 향했다.

"저기…. 어디로 가는 건가요?"

"우리 집."

정확히는 내 집이 아니라 유서연의 집이었지만 어차피 유서연이 내 소유물이나 다름없으니 유서연의 것도 내 것이 아니겠는가.

"집에는 왜…?"

"노예끼리 얼굴이라도 익혀두라고."

유서연이 내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걸 원치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유서연의 바람일 뿐이고, 나는 계속해서 다른 여자를 만날 것이다.

그래도 다른 여자가 아닌 같은 노예끼리는 서로 질투하고 안 좋은 감정을 품을 필요는 없으니 미리 교통정리를 해두는 게 좋겠지.

"다른 노예…."

임예진은 다른 노예라는 말에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같이 지내시는 건가요?"

"응. 같이 살고 있지."

솔직히 말하면 지금의 생활이 너무 편해서 다른 집을 구한다는 생각은 진작에 사라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집에서 남이 챙겨주는 밥을 먹고 살 수 있다니. 그야말로 천국 같은 생활이 아닌가.

어린 시절에 이런 생활을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부러…. 운가…?'

임예진은 진지하게 최민석과의 동거에 대해 생각했다.

남녀 간의 동거.

흔하다면 흔한 일이지만 최민석과의 관계는 노예와 주인이라는 상식을 벗어난 관계였고, 그와 함께 지내면서 얻는 쾌락 역시 상식을 아득히 벗어나 있을 것이다.

'그런 걸 매일….'

꿀꺽.

어떻게든 걷고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도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엄청난 쾌락에 시달렸던 임예진으로서는 그게 정말로 부러운 일인지 확신할 수 없다.

그야 기분은 당연히 좋겠지만, 그런 걸 매일 했다간 몸이 버티지 못할 테니까.

"그런데…."

얌전히 최민석의 뒤를 따라 걷던 임예진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깔끔하게 지어진 고층 아파트 단지 내부는 아무리 생각해도 오피 한 번에 무리했다는 사람이 살 만한 곳은 아니었다.

"여기서 사시는 건가요…?"

"맞아."

임예진의 질문에 적당히 대답하면서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부드럽게 위로 올라가던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복도를 가로질러 집 앞에 서서 다시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문을 열었다.

내가 집 안으로 들어오자 임예진이 쭈뼛거리면서 뒤따라 들어왔고, 이내 안쪽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주인님, 다녀오셨…. 어…?"

평소처럼 밝은 표정으로 달려 나와 나를 맞이하려던 유서연의 표정이 살짝 굳어지며 내 뒤에 있던 임예진에게 시선을 옮겼다.

"…손님인가요?"

빠르게 임예진을 위에서 아래로 훑어내린 유서연은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두 번째 노예야. 그렇지?"

"아…! 마, 맞아요…!"

유서연의 시선에 잔뜩 움츠러들었던 임예진은 내 말에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아. 두 번째…."

제대로 납득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유서연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중얼거렸고, 살짝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아무튼, 잘 다녀오셨어요. 주인님. 식사부터 하실 건가요? 아니면 목욕부터?"

"조금 배고프긴 한데, 피곤하니까 일단 한숨 자야겠다. 밥은 나중에 먹을 테니까 둘이 얘기 나눠봐. 같은 노예끼리 친하게 지내야지. 일단 서연이가 선배니까 잘 대해주고."

"아, 네! 푹 쉬세요!"

서큐버스 시스템을 얻은 뒤로 체력이 조금 붙은 것 같긴 하지만 역시 피곤한 건 피곤하다.

물론 지쳐 쓰러질 정도까진 아니지만 내가 끼어서 사이를 중재하는 것보다는 둘이 시원스럽게 관계를 정리하는 게 나을 것이다.

나는 유서연의 옆을 지나치며 어깨를 툭툭 두들겨주고 내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서연이가 알아서 잘하겠지.'

처음에야 자기 나름대로 스트레스가 쌓여서 성격이 나빴던 거지, 최근에는 내가 함께 지내며 매일 만족시켜준 덕분인지 성격도 차분해졌으니까.

*

최민석이 현관 복도를 지나쳐 거실로 들어가고, 자신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을 때까지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조금 전까지의 환한 표정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무표정한 눈빛으로 임예진과 시선을 맞추고 있던 유서연은 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일단 들어오세요."

"아, 네…."

지금의 침묵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건 임예진뿐이었다.

임예진은 유서연의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신발을 벗고 복도에 발을 올렸다.

"따라오세요."

다른 말은 필요 없다는 듯, 유서연은 등을 휙 돌려 거실로 걸어 들어갔고, 임예진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유서연의 뒤를 따랐다.

"앉아요."

깔끔한 풍경의 거실을 둘러볼 틈도 없이, 유서연의 권유에 따라 식탁에 앉아 맞은 편에 앉은 유서연과 시선을 맞춘다.

'이렇게 두고 가면 어떡하냐고…!'

임예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유서연의 시선을 맞으며 이 자리에 없는 최민석을 원망했다.

불편하다.

마치 애인이 있는 남자와 바람을 피우다 애인에게 들킨 것처럼 숨이 막히는 상황이었다.

유서연은 그런 임예진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애기…. 얘기라…. 제가 그쪽이랑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요?"

"그, 그게…."

"일단 주인님이 친하게 지내라고 했으니 싸울 수는 없고, 자기소개부터 할까요? 저는 유서연이라고 해요. 나이는 스물여덟이고요."

친하게 지내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싸웠을 거라는 말인가?

임예진도 오피를 다니면서 온갖 진상들과 엮이며 나름대로 담을 키운 편이었지만 지금 상황은 그녀가 겪어온 상황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무서운 상황이었다.

"…임예진이라고 해요. 나이는 스물넷이에요."

짧은 자기소개가 끝나고, 다시 침묵이 이어진다.

이번에도 먼저 침묵을 깬 쪽은 유서연이었다.

"예진 씨는…. 아, 이렇게 불러도 괜찮죠?"

"…괜찮아요."

"네. 예진 씨는 주인님이랑 어떻게 만나셨나요?"

이걸 대답해야 하나?

같은 여자끼리라도, 아니 오히려 같은 여자기 때문에 오피에서 몸을 팔았다는 사실을 밝히기가 더욱 꺼려졌다.

임예진이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유서연의 눈썹이 살짝 찡그려졌다.

"대답 안 하실 건가요?"

아주 조금, 눈치채기 힘들 정도였지만 유서연의 목소리가 살짝 가늘어졌다.

작다면 작은 차이였지만 지금 유서연의 목소리는 누가 듣더라도 '아, 이 사람 지금 기분이 안 좋구나' 하고 받아들일 정도로 언짢은 기색이 뚝뚝 묻어났다.

'무슨 심문 받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말하면 임예진도 억울한 입장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화를 내기엔 저 유서연이라는 여자의 눈빛이 뭔가 이상하다.

방금 들은 목소리도 그렇고, 뭔가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다.

"그게…. 제가 오피에서 일했었는데, 민석 씨가…."

"주인님."

"네…?"

"노예잖아요? 노예 주제에 함부로 주인님 이름을 부르면 안 되죠."

"……."

응. 이 여자는 확실히 정상이 아니다.

자신도 쾌락에 넘어가 최민석을 주인님이라고 부르긴 했지만 눈앞의 여자는 아주 자연스럽게,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이 그의 노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주인님이 손님으로 오셨었는데, 제가 불감증…. 이거든요. 오피에서 일한 것도 한 번이라도 오르가즘을 느껴보고 싶어서 그랬던 거고…. 아무튼, 주인님이 손님으로 오셨는데 거기서 처음으로 가버리기 직전까지 갔었거든요…. 그때는 정말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서 한 번만 더 만나 달라고 제가 매달렸었어요."

조금 횡설수설하긴 했지만 그래도 필요한 설명은 다 들어가 있다.

"오피라면…. 성매매 업소를 말하는 거죠?"

"…맞아요."

노골적인 표현이라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저 외에 달리 표현할 단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예진 씨가 만나 달라고 매달렸고, 주인님이 다시 만나주신 건가요?"

"네…."

물론 다시 만나기까지 자신이 필사적으로 매달리거나 돈까지 주겠다는 이야기가 오가긴 했지만 그 부분은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몇 번이나 만났나요?"

"네?"

"오피에서 만난 뒤에, 몇 번이나 더 만났냐고요."

"…그 이후로는 오늘이 처음이에요."

"정말인가요?"

"저, 정말이에요."

"오피에서도 주인님을 만난 건 한 번뿐이고요?"

"…네."

"흐음…."

임예진의 입장에서는 별것 아닌 이야기였지만 함께 생활하며 최민석의 일정을 매일 체크했던 유서연에게는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하는 정보였다.

'열흘 정도가 비어.'

오늘을 포함해서, 최민석이 다른 여자를 만났을 걸로 생각되는 날은 열흘 정도가 더 있다.

즉, 임예진을 제외하고도 다른 여자를 만났다는 뜻인데, 그게 몇 명인지는 최민석 본인만이 알 것이다.

'두 번째….'

두 번째 노예가 생겼다는 건 세 번째나 네 번째가 생길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정황을 생각해보면 그 가능성은 결코 낮지 않았다.

뿌득, 이를 가는 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당장 눈앞에 있는 한 명만 해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다른 잡것들이 더 달라붙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열이 뻗쳐올랐다.

"후우우…."

'도, 도대체 뭔데!?'

얌전히 질문만 하나 싶더니 갑자기 소리가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이를 갈고, 열을 삭히려는 듯 길게 심호흡을 하는 유서연의 모습에 임예진은 미칠 지경이었다.

최민석도 정상이 아니라고는 생각했지만, 눈앞의 이 여자는 정말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임예진이 시시각각 변하는 유서연의 모습에 불안감을 느끼는 사이, 마음을 최대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른 유서연은 다시 임예진과 시선을 맞췄다.

"예진 씨."

"네, 넷!"

"솔직한 심정을 밝히자면 저는 예진 씨가 정말, 정말,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아요. 아직 예진 씨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주인님한테 다른 여자가 달라붙은 시점에서 이렇게 느끼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정말'을 세 번이나 반복할 정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지만 차마 눈앞의 제정신이 아닌 여자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주인님이 예진 씨를 노예로 들이기로 하셨다면 그건 제가 어쩔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에요. 마음에 들지 않기는 해도, 주인님이 친하게 지내라고 하셨으니 저는 최대한 예진 씨와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할 생각이고요."

"그, 그런가요?"

도대체 이 여자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최민석을 포기할 수 없는 임예진으로서는 그저 예, 예 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아무튼, 자신은 두 번째 노예고, 눈앞의 여자는 첫 번째 노예였으니 그녀의 말대로 사이좋게 지낼 수밖에 없기도 했고.

그저 이 여자가 이 이상 이상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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