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한 번만 해보지 않을래? (1)
나름 버틴다고 버텼지만 계속해서 떠오르는 불안과 정액에 대한 생각은 겨우 쌓은 인내심을 빠르게 소모시켰다.
[김민아 : 아직도 술 먹냐?]
[김민아 : 자면 잔다고 말이라도 하라고!]
[김민아 : 전화 받아]
만약 지금 당장 확인했더라도 답장할 틈조차 없이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아, 씨…!"
자연스럽게 나오는 부재중 안내 음성에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고 다시 한번 통화 버튼을 누르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이번에도 통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도대체 뭔데!?"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이 정도로 난리를 쳤으면 한 번쯤은 확인해보는 게 정상 아닌가.
물론 이미 잠들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잠든 사람을 상대로 자신만 이렇게 안절부절못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 그건 그것대로 열 받았다.
김민아는 분노를 담아 핸드폰 화면을 거칠게 두드렸다.
[김민아 : 오늘 저녁에는 온다며?]
[김민아 : 진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김민아 : 몰라. 잘 거야. 보면 전화해]
"이제 진짜 몰라."
물론 아직 잠들기엔 한참이나 이른 시간이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뭔가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어쩔 수 없었다.
"…흥. 밥이나 먹자."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그렇게 중얼거리며 핸드폰을 내려놓고 부재중 팻말을 걸어놓고 밖으로 나왔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게 뭐라도 먹어서 풀어야겠다 싶어 철회했던 외식을 다시 결심하고 늘 가던 치킨집으로 가 레드 허니 콤보와 맥주를 시원하게 흡입했다.
배가 잔뜩 불러 총무실로 돌아와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대화창은 나가기 그대로였다.
"씨발! 이럴 거면 핸드폰을 왜 갖고 다니는데!?"
평소에는 잘 하지도 않던 욕까지 튀어나와 다시 거칠게 화면을 두드렸다.
[김민아 : 자냐고]
[김민아 : 핸드폰 좀 봐 미친놈아! 보지도 않을 거면 왜 갖고 다니는데!]
이번에도 답장할 틈은 주지도 않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어차피 보지도 않을 거고, 받지도 않을 거라는 전제를 은연중에 받아들인 행동이었다.
"아, 진짜…!"
이번에도 두 번이나 걸었지만 연결되지 않는다.
[김민아 : 진짜 니 마음대로 해]
시간은 이미 아홉 시 반을 넘었다.
원래라면 열 시까지는 총무실에 있어야 했지만 그렇게 빡빡한 규칙도 아니고, 오늘은 그냥 조금 일찍 들어가 버리자고 마음을 먹고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엎어졌다.
"나도 진짜 모른다고…."
심하게 취한 건 아니지만 알딸딸하게 올라온 취기와 함께 하루 종일 쌓였던 스트레스가 피로로 뒤바뀌며 스르륵 눈이 감겼다.
"아, 씨…. 목 아파…."
평소와 달리 대충 엎어져서 잔 탓인지, 목이 뻐근하게 아파왔다.
이것도 다 최민석 때문이다.
김민아는 목이 아파 움직이기도 힘든 상태에서도 최민석을 원망하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진짜 뭐 하는 거냐고…!"
이번에는 메세지도 보내지 않고 세 통이나 연달아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나 묵묵부답.
김민아는 마치 핸드폰이 샌드백이라도 되는 것처럼 감정을 쏟아내며 메세지와 전화를 반복했고, 한참을 씩씩대다 지쳤는지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
유서연의 집에서 고시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전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열이 받았으면 평소 하지도 않던 욕을 그렇게 휘갈기고 집요하게 전화를 걸어댔을까.
엘리베이터가 한층 한층 올라갈 때마다 스멀스멀 걱정이 차오른다.
물론 제대로 연락을 해야 한다는 의무는 없었지만, 어제 돌아간다고 해 놓고 돌아가지 않은 건 분명히 내 과실이었고, 김민아가 저렇게 난리를 피우게 된 원인도 엄밀히 따지면 최면을 걸어놓은 내 탓이었으니 양심의 가책이 없을 수가 없었다.
띠링-.
[7층입니다.]
내 불안한 심정과 달리 언제나처럼 평온한 엘리베이터의 안내음이 도착을 알렸고, 스르륵 문이 열렸다.
"어…?"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나는 반사적으로 당황한 목소리를 흘렸다.
없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은 총무실에 앉아 있어야 할 김민아는 보이지 않고, 부재중 팻말과 함께 아예 들어오지도 않은 모양인지 총무실은 까맣게 불이 꺼져 있었다.
"방에 있나?"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
어차피 결심을 하고 온 이상 빨리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에 곧바로 김민아의 방으로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정숙이 기본 매너인 고시원에서는 문을 세게 두드리지 않는 게 기본이다.
그래도 안에 있다면 확실히 들렸을 정도로 두드렸음에도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자나?"
새벽 4시까지 그 난리를 피웠으니 자고 있을 수도 있다.
아쉽게도 김민아에겐 내 방 열쇠가 있지만 내겐 김민아의 방 열쇠가 없었기에 이 상황에서 내가 뭔가를 더 할 수는 없었다.
[최민석 : 미안. 술 먹고 자고 있었어]
[최민석 : 직접 얼굴 보고 얘기하려고 했는데 자고 있는 것 같아서 그냥 간다. 일어나면 전화해]
변명 거리는 이미 김민아 쪽에서 확신하고 있을 정도로 만들어둔 상태였기 때문에 그쪽의 예상에 맞춰 술 먹고 잠들었다는 설정을 사용하기로 했다.
일어나면 연락해 달라고 메세지도 보내 놨으니 할 건 다 했다.
미련 없이 등을 돌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왠지 모를 안정감을 느끼며 가볍게 숨을 들이켰다.
"그래. 이게 내 집이지."
엄밀히 말하면 집도 아니었고 집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좁은 공간이었지만 반년 넘게 지낸 탓에 내집같은 익숙함이 느껴졌다.
물론 김민아가 여길 나가면 나도 새집을 알아볼 것이다. 그건 이미 확실하게 정해놓은 사안이었다.
고시원에 여자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김민아 만큼 매력적인 여자는 없었으니까.
적당히 외투를 벗어 던져놓고 의자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고시원에서는 보통 노트북을 쓰거나 아예 컴퓨터를 들이지 않는 편이었지만 나는 과감하게 제법 비싼 셋팅의 컴퓨터를 방에 들여놨다.
안 그래도 좁던 방은 커다란 모니터와 본체로 더 좁아졌지만 만족도는 그 이상이었다.
초, 중, 고등학교를 다니며 집에 컴퓨터가 있는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웠던가.
학교 컴퓨터실에서 돌아가는 싸구려 게임이 경험의 전부였던 나로서는 독립하고 나서 갖고 싶은 물건 1위가 내 개인 컴퓨터였기에 아낌없이 돈을 쏟았다.
세상은 넓고 게임은 많아서 하루 종일 게임만 해도 질리는 일은 없고, 시간도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한참 신나게 게임을 돌리다 보니, 김민아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올 때까지 완전히 그녀에 대한 문제를 잊고 있었던 건.
"야."
문을 열고 들어온 김민아의 짧은 말 한마디는 차갑다 못해 싸늘함이 느껴질 정도다.
'그래도 입만 잘 털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아무리 화가 났어도 김민아는 김민아다.
최대한 미안함을 어필하며 사죄하고 잔뜩 취해서 잠들었다는 사정을 강조한다면 특유의 이성적인 성격상 크게 화는 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지금 진행 중인 게임이 2승 2패에서 마지막 1승을 가르는 승급전 도중이라는 것.
"어, 왔어…?"
"왔는데. 게임 안 끄냐?"
언제 영혼의 한타가 벌어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
바로 옆에서는 얼마나 열 받았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 김민아가 자신을 싸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그럴 것이다.
"5초 준다. 꺼."
"응…."
5초라는 시간은 멀쩡히 돌아가는 게임을 끄기엔 너무나 촉박한 시간이었다.
컴퓨터의 건강을 생각하면 절대 해선 안 되는 일이었지만 나는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본체의 전원 버튼을 꾹 눌러 강제로 컴퓨터를 종료시켰다.
내가 탈주한 상황에서 이기기는 바라지도 않았다. 제발 리폿만 당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까맣게 꺼진 화면을 확인하며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예상했던 대로 싸늘한 두 개의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단 확인부터 해보자. 분명 어제저녁에는 들어오기로 약속했던 거 맞지?"
"아니, 약속이라기보단…."
"아니야?"
"…맞지."
평생 인생을 살면서 부모님을 제외한다면 이렇게 화난 여자를 상대해본 적 없는 나였기에 칼처럼 말을 자르며 되묻는 김민아의 말에 얌전히 대답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자를 받아 보니까 오늘 오전 10시가 넘어서 왔던데."
"친구랑 술 마시다 뻗어서…."
"술 마시는데 핸드폰은 뭐, 음소거를 해놨어? 왜 문자고 전화고 다 안 받는데?"
"못 들었나 봐. 미안해."
다행히도 인터넷에서 봤던 '내가 왜 화났는지 몰라?' 같은 질문은 날아오지 않았다.
이럴 때는 무조건 사과하고 보는 게 답이라는 지식에 따라 곧바로 사과를 덧붙였다.
"하아…. 내가 왜…."
"아니, 잠깐만. 내 얘기 좀 들어봐."
설마 했던 최악의 단어가 나오기 전에 말을 끊고 최대한 다급하게 말하자 김민아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가며 언짢은 기색을 비췄지만 그래도 들어는 줄 생각인지 어디 말해보라는 듯 입을 다물었다.
"나도 원래는 적당히 놀고 돌아갈 생각이었거든. 술은 금요일에 먹었고, 토요일에는 그냥 둘이 피씨방에서 놀았단 말이야."
"…그런데?"
"걔가 군대 가기 전부터 사귀던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마침 휴가라서 한가한 나랑 만나서 논 거거든. 근데 한참 놀던 도중에 여자친구한테 헤어지자는 연락을 받은 거야. 휴가 나와서 자기랑 안 만나고 친구나 만나서 게임이나 하고 있다고."
"……."
"사실 누구 잘못이라고 딱 잘라 말하긴 그런데 어떻게 보면 자업자득이기도 하고…. 아니, 아무튼 결과만 보면 잘 놀고 있다가 갑자기 여자 친구한테 차인 거잖아? 걔는 진짜 진지하게 좋아하고 있던 애였는데. 실수 한 번에 차였으니 얼마나 슬프겠어. 옆에서 암만 전화를 걸어도 차단이라도 당한 건지 거는 족족 뚝뚝 끊어지기만 하고."
즉석에서 떠올린 것 치고는 꽤나 그럴듯한 스토리다.
"한참 그러다가 애가 완전히 죽상이 됐는데, 그걸 두고 그냥 가긴 그렇잖아. 그래서 같이 술 좀 마셨는데 끝이 안 나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아무튼, 그래도 못 가면 못 간다고 연락은 했어야 했는데. 진짜 미안해."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며 마무리로 다시 한번 사과를 덧붙이자 김민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한다.
이걸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듯 한층 누그러진 모습은 이미 반쯤 성공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혹시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오늘은 내가 살게. 아, 정액 문제는 좀 괜찮아? 지금이라도 먹을래?"
"읏…!"
이때다 싶어 확 밀어붙이며 바지를 내리기 시작하자 김민아는 어깨를 흠칫 떨며 아래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속옷까지 벗어 던져 자지를 드러낸 순간 김민아의 눈빛이 파르르 떨리며 조금씩 열기를 띠기 시작했다.
"오늘은 미안한 것도 있고 하니까 내가 지칠 때까지 해도 돼. 대신 이번 일은 여기서 넘어가 주는 걸로 하고. 어때?"
누구 좋으라고 건 조건인지는 헷갈릴 정도로 웃긴 내용이었지만, 아무리 기분이 좋아도 지칠 때까지 싸다 보면 정말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고 손발이 덜덜 떨릴 정도로 힘들다.
이전에 유서연과의 일로 한계를 경험했던 뒤로는 어지간해서는 하루 다섯 번 이상은 싸지 않으려고 했을 정도였으니까.
김민아는 이런 내 생각은 조금도 알지 못한 채 입술을 잘근 깨물며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도 사주는 거지?"
"한잠 자고 일어나서…?"
일어날 수만 있다면.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 정도로 김민아의 눈빛은 이글거리며 뜨거운 열기로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