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나만 괴롭히는 팀장 (7)
"민석아. 많이 힘드냐?"
"예? 아니,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무슨. 체력도 좋은 놈이 물건 반도 안 내렸는데 헉헉대고 있는데. 무슨 일 있었냐?"
"그냥 유 팀장님이 뭘 좀 시켜서요. 아무튼 그럭저럭 버틸 만은 하니까 신경 안 써주셔도 괜찮습니다."
"…너도 참 고생이다."
적당히 둘러댄 말에 안부를 물은 최씨 아저씨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 모두 알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유서연에게 이리저리 굴려지는 거야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 평소 보다 지쳐 보여도 '뭐 힘쓰는 일 좀 시켰겠거니.’ 하는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막 입사해서 유서연에게 한창 심하게 괴롭혀졌을 때는 정말 오늘같이 상태가 안 좋아질 정도로 구르는 일도 흔했으니까.
물론 지금의 피로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지만 말이다.
'확실히 일곱 번이나 싸니까 힘들긴 하네.’
완전이 녹초가 된 유서연을 바닥에 앉혀놓고 입으로 한 번을 더 싼 게 컸다.
하는 동안은 몰랐는데 다 싸고 나서 한숨 돌릴 때쯤에 순식간에 피로가 확 몰려들었다.
그래도 대놓고 일을 빠질 수는 없으니 하고는 있지만, 몸 전체가 젖은 솜처럼 무겁고 노곤해서 어쩔 수 없이 티가 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군대에서 헬창 후임한테 배우면서 몸을 만들어둔 덕분인지 반쯤 정신을 놓은 상태로 일을 마칠 수 있었다.
"그래도 점심시간이라 다행이구만. 바로 밥 먹으러 갈 거냐?"
"먼저들 가세요. 전 좀 쉬다가 갈게요."
아무리 그래도 밥은 먹었어야 했으니 유서연도 점심시간에는 날 건드리지 않았었다.
물론 이제 와서 유서연이 날 건드릴 것 같지는 않았지만 다 제쳐두고 지금은 좀 쉬고 싶었다.
식사는 조금 미뤄두고 휴게실로 들어가려는 순간. 평소와 다름없는 깐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민석 씨."
"네…?"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을 텐데. 이번에는 나도 조금 당황해서 얼빠진 소리를 내버렸다.
'…설마 아니겠지?'
유서연이 아무리 독종이라도 고작 1시간 전에 그 꼴을 당해놓고 복수할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라고 생각은 해도 괜히 불안한 마음에 유서연의 눈빛을 확인하려고 시선을 맞추자 유서연 쪽에서 슬그머니 시선을 피해버렸다.
"…식사는 아직이시죠?"
"지금 먹으려고 합니다."
"잘됐네요. 일 문제로 할 얘기도 있고, 같이 밥이나 먹죠."
'복수는 아닌 것 같은데.'
어쨌든 직장이라는 공간에서의 갑은 명백히 유서연 쪽이다.
그녀가 굳이 내게 앙갚음을 하려고 했다면 이렇게 번거로운 방법을 쓸 것 없이 아무 일이나 떠넘겼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따라오세요."
어디 근처에 있는 식당이라도 가려나 싶었는데, 예상과는 달리 유서연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주차장을 쭉 가로질러 멈춘 곳은 광이 날 정도로 깨끗하게 관리된 자동차 앞이었다.
"타세요."
유서연이 주머니에 손을 넣자 삐빅-. 하는 소리와 함께 덜컥하고 자동차에 불이 들어왔다.
하기야 부잣집 딸이니 자가용 정도는 있는 게 당연하겠지.
'외제차인가?'
차에는 관심도 없는지라 차종은 모르겠지만 먼지가 덕지덕지 붙은 보통 차들과 달리 잘 관리된 모습을 보니 비싼 차처럼 보인다.
유서연은 기다리지 않고 운전석에 앉았고,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조수석 쪽으로 들어갔다.
"따로 먹고 싶은 건 있나요?"
"딱히 없습니다. 편하신 대로 가주세요."
"그럼…."
부드러운 시동음과 함께 자동차가 움직인다.
유서연은 딱히 이쪽에 말을 걸지 않고 묵묵히 운전에 집중했다.
'뭐라도 말했으면 좋겠는데.'
딱히 무섭다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겨우 한 시간 전에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상대와 이런 침묵을 유지하고 있자니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꼬박 20분 정도를 이동해 도착한 곳은 척 봐도 비싸 보이는 분위기를 풍기는 일식집이었다.
사실 일식집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간판에는 뭐라고 휘갈겨 쓴 일본어가 적혀 있었지만 아래 따로 한글로 해석을 적어주지 않은 탓에 읽을 수가 없었으니까.
'사주는 거겠지?'
안 그래도 김민아에게 쓰느라 사정이 좋지 않은 상태인데, 그게 아니라면 지갑이 조금 쓸쓸해질 것 같다.
식당의 내부 역시 외관과 마찬가지로 일본풍이라는 느낌이 확 드는 곳이었는데, 기모노를 차려입은 점원에게 자연스럽게 룸으로 안내받았다.
아는 게 없으니 주문은 대충 유서연이 하는 대로 내버려 뒀다.
유서연은 주문을 확인한 점원이 나가고 나서도 입을 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이쪽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고, 뭔가 하고 싶은 말은 있지만 이쪽의 눈치를 보는 듯 불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기에 결국 내 쪽에서 먼저 말문을 텄다.
"그래서. 무슨 용건으로 부르신 겁니까? 정말 밥이나 먹자고 부르신 건 아니실 텐데."
"…무슨 생각이신지 확인하고 싶어서요."
무슨 생각인지 확인하고 싶다니. 질문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다.
"뭘 말입니까?"
"그러니까, 절 어떻게 하실 건지.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런 것들이요."
"딱히 어떻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팀장님을 어떻게 한 것도 아니고. 그냥 해달라는 대로 해드린 것뿐이잖아요? 영상도 제 쪽에서 먼저 퍼트릴 생각은 없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저는…?"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십니까? 계속 말씀드리지만 저는 팀장님한테 뭘 해볼 생각이 없습니다. 오늘 일이 싫으셨다면 그냥 똥 밟은 셈 치고 잊어버리세요. 앞으로는 휴게실에서 뭘 하시든 모르는 척하겠습니다."
거짓말이다.
유서연은 한 번만 먹고 버리기엔 아까운 여자였다.
물론 내가 어떻게 하지 않더라도 이미 걸린 최면이 있으니 유서연 쪽에서 먼저 참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내 대답을 들은 유서연의 눈빛이 파르르 떨린다.
얼핏 봐도 신경을 끄겠다는 말에 안도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오히려, 불안해하고 있다.
"그럼, 제가 원한다고 하면…."
"그거야 팀장님 하시기에 달렸죠."
그 외에 할 말이 있을까.
당장 유서연에게 요구할 만한 건 없다.
반대로 유서연이 내게 줄 만한 것도 없었고.
"제가…. 뭘 하면 될까요…?"
"글쎄요?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팀장님한테 좋은 감정이 거의 없습니다. 이유야 팀장님도 잘 아실 테고요."
순간 유서연의 낮빛이 하얗게 질렸다.
그동안 자신이 스트레스 해소 삼아 해왔던 일들이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하실 필요는 없고. 그만큼 팀장님이 잘 행동해야 한다는 겁니다."
"……."
결국 뭘 어떻게 잘하라는 건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당장 나도 유서연을 마음대로 갖고 놀 생각만 했지 정확히 어떻게 할지는 생각해두지 않았으니까.
"우선 말부터 편하게 할까? 기분 나쁘면 말하고. 다시 존댓말 해줄 테니까."
"…편하게 하셔도 괜찮아요."
"그래도 사람들 앞에서는 존댓말 쓸 거니까. 괜히 티 내지는 말고."
"네…."
불쾌해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쪽에서 먼저 말을 놔 버리니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그럼 궁금한 거나 좀 물어보자. 다른 사람들한테 들어보니까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내 전에 들어왔던 사람들도 죄다 괴롭혀서 그만두게 만들었다던데. 왜 그런 거야?"
"그, 그게…."
"인성 파탄 난 건 이미 알고 있으니까 솔직하게 말해. 괜히 짜증 나게 하지 말고."
은근슬쩍 눈치를 보던 유서연의 어께가 흠칫 떨렸다.
적어도 '스트레스 해소'라는 답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 여기서 다른 대답이 나온다면 아쉬움을 무릅쓰고 일주일은 더 방치해둘 생각이었다.
다행히도 유서연은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솔직하게 대답했다.
"스트레스 풀려고…."
"스트레스 해소로 그랬단 말이지."
"네…."
"뭐가 그렇게 스트레스인데? 일이 힘들어서 그런 건 아닐 텐데."
유서연이 2팀장으로 있으면서 하는 일이라고는 직원들이 일하는 걸 지켜보다가 실수하는 부분을 지적하거나 날 괴롭히는 것밖에 없었다.
굳이 물류팀을 1팀, 2팀으로 나눈 것도 유서연을 낙하산으로 꽃아넣기 위해서라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1팀장 님이 2팀의 일까지 다 하는 것 역시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유서연은 천천히 자기 사정에 대해 설명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녀의 집안이 상당한 부자라는 이야기부터 대학생이 되어서 방탕하게 놀았던 것, 그러다가 마약까지 건드려버린 탓에 순식간에 부모님의 신뢰를 잃었다는 것.
그리고 이곳처럼 낙하산으로 들어갔던 다른 지점에서 이런저런 사고를 치고 결국엔 물류팀에 방치됐다는 것까지.
솔직히 말하자면 동정할 만한 구석이 조금도 없는 한심한 이야기였다.
"아니, 사고 치지 말라고 물류팀에 박아놨는데 직원들 괴롭혀서 그만두게 하는 건 괜찮아?"
"그 정도는 허용 범위 내라는 거겠죠. 애초에 그러려고 언제 그만둬도 상관없을 만한 사람을 뽑았어요."
그게 나였다는 말이다.
하기야 아무런 경력도 없는 사람을 이렇게 좋은 조건으로 써주는 게 이상하다 싶었으니 오히려 이쪽이 더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다.
"부모님이 알고는 있고?"
"그럴 거예요. 물류팀에 막 들어왔을 때 1팀장 님이 제가 문제를 일으키면 부모님께 보고해야 하니 주의해달라는 얘기를 했었거든요."
즉. 유서연이 애초에 괴롭힐 생각으로 직원을 채용해 그만둘 때까지 괴롭히기를 반복하는 일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니 진짜 쓰레기네."
"죄송…."
"됐어. 화내는 거 아니니까."
그냥 신기했을 뿐이다.
그래도 보통은 남한테 폐 끼치지 않으려는 생각 정도는 하면서 사는 게 보통인데 말이다.
'배울 점이 많네.'
서큐버스 시스템을 손에 넣은 시점에서 나 역시 누군가에겐 갑이 되기 충분한 위치에 올랐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이미 유서연과의 관계에서는 갑이 되기도 했고.
거기까지 떠올린 순간 새로운 의문이 떠올랐다.
"사정은 알겠는데. 굳이 나한테 매달릴 필요는 없지 않아? 돈도 많겠다. 아무 남자나 가볍게 만나도 상관없을 텐데."
내가 건 최면은 유서연이 날 볼 때마다 성욕이 쌓이고, 자위를 할 때면 내가 떠오르게 하는 것뿐이었다.
만약 유서연이 다른 남자를 만나서 성욕을 해소했다면 지금 같은 상황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결혼 상대를 찾아볼 테니 얌전히 지내라고 하셔서요."
과연. 이미 사고를 쳐서 여기까지 온 만큼 부모님의 말을 또 거스르긴 힘들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리고?"
"이제 다른 남자로는 만족 못 해요…."
귀를 빨갛게 물들이며 말하는 유서연의 모습은 나도 모르게 발기해버렸을 정도로 음란했다.
'시발. 참자.'
가뜩이나 피곤해 죽겠는데 여기서 더 해버렸다가는 다음 물류가 들어올 때는 정말 쓰러져 버릴지도 몰랐다.
다행히 절묘한 타이밍에 점원이 들어와 먹기 아까올 정도로 화려한 비주얼의 일식들을 상 위에 늘어놓았고.
평소에 보던 조막만 한 초밥과 달리 크고 아름다운 형태의 초밥이 시선을 확 잡아끌었고, 밥부터 먹자는 생각에 곧바로 초밥을 입 안에 넣었다.
'내가 그동안 먹은 건 초밥이 아니었구나.'
초밥은 계속해서 상 위로 올라왔고, 완전히 배가 불러질 때쯤에는 온몸이 피로와 포만감에 늘어져서 섹스고 뭐고 떠오르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