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방 잡을까요?
에필로그 6화
“어서 와. 오늘도 고생 많았어.”
밤늦은 시각, 문이 열리는 소리에 수진은 현관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막 들어서던 남자가 그런 여자를 발견하곤 잠시 멈칫하더니 눈을 휘둥그레 떴다.
“피곤할 텐데 이 시간까지 안 잔 거야?”
“응. 혼자 잘려니까 잠이 안 오네.”
싱긋 웃어 보인 수진이 그의 손에 들린 짐을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내 남편은 밤늦게까지 고생하는데, 나만 집에서 쿨쿨 자고 있으려니 잠이 와야 말이지.”
그런데 준성은 꼼짝도 않고 잠시 수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달라는 짐은 주지도 않고 웃고만 있는 남자를 의아하다는 얼굴로 바라보던 수진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뭐야? 왜 그런 얼굴로 웃는데?”
“모르겠어. 방금…… 뭔가 되게 좋았어.”
하루의 시작과 끝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순간 벅차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한 준성이 불쑥 다가와 그녀의 허리를 감아 당기며 입을 맞추려 했다. 휘청하며 끌려간 수진이 얼른 그의 입술에 손끝을 가져다 대며 고개를 저었다.
“잠깐만, 먼저 씻어야지.”
“아, 참. 그렇지. 조금만 기다려.”
막 입술을 대려다 멈칫한 남자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당장에라도 그녀를 안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눈이었다. 매일 보는 얼굴임에도, 문득문득 낯설어질 만큼 가슴을 설레게 하는 남자였다.
사실 저는 이 남자가 거름 더미를 밟고 와서 스킨십을 한대도 상관없었지만, 그 자신이 아마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로 무엇보다 청결과 위생을 신경 써 온 남자였다. 한순간 감정에 혹해 깔끔하지 못한 상태로 그녀를 가까이 한다면 그 사실에 가장 실망할 사람도 그 자신일 것이다.
“오늘은 별일 없었어?”
꽤 오랫동안 샤워를 하고 나온 남자는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가녀린 몸을 끌어안았다. 포근하게 등을 감싸 오는 온기에 슬쩍 어깨를 움츠렸던 수진이 키득거리며 대꾸했다.
“음, 오전엔 차장님 만나서 청첩장 전해 드렸고, 점심 이후엔 어머님 만나서 같이 쇼핑했어.”
“……진짜 별일 없었어?”
다시 묻는 목소리가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장난인지, 진심인지 헷갈리는 말투에 수진은 헛웃음을 지으며 제 옆의 남자를 바라봤다.
“뭐야. 아직도 어머님을 못 믿는 거야, 설마?”
“말했잖아. 태어나 처음으로 어머니한테 뒤통수를 맞아 봤더니 그게 아직도 얼얼해서 자꾸 의심하게 된다고. 이게 트라우마란 건가?”
“어우, 무슨 남자가 이렇게 뒤끝도 길고.”
“어떻게 알았어? 난 한번 가슴에 맺히면 평생 못 잊는 사람인 거.”
반은 진심을 섞어 내놓은 타박이었는데 듣는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이다. 거기다 더해 내놓는 대꾸가 의미심장해서 순간 심장이 덜컥했다. 그런 진지한 얼굴로 그런 말을 하니 꼭 그 대상이 저를 말하는 것처럼 들려서 순간 설레었다. 아니, 이 남자라면 정말 그렇게 들리게끔 의도했으면서 아닌 척하고도 남을 사람이다.
하여간 약아빠졌지, 이 남자.
괜히 얄미운 마음을 담아 남자의 허벅지를 툭, 때려 준 수진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어머님께 너무 그러지 말라고. 애가 듣는단 말이야. 난 우리 애가 할머니랑 아주 사이가 좋길 바라니까 절대 이간질하면 안 돼. 알겠어요?”
“아, 그런 거라면 뭐. 알아 모시겠습니다, 김 여사님.”
저는 제법 진지했는데, 대꾸하는 남자는 갈수록 짓궂어지기만 한다. 헛웃음을 터뜨린 수진이 매끈한 남자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푹 찔러 주고는 눈을 흘겼다. 정말 아픈 것처럼 몸을 구부리던 남자가 갑자기 그녀의 몸을 냅다 끌어안았다. 그의 품 안으로 풀썩 끌려간 수진이 꺄,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 여자 손버릇이 점점 나빠지네. 안 되겠다. 묶어 놔야겠어.”
“뭐야, 네가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야한 말 하는 것도 아닌데 뭐가?”
“또 그런다.”
품에 파묻혀 있던 수진이 슬쩍 고개를 들며 눈을 흘기자 웃음을 터뜨린 그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가만히 누르며 끌어안았다. 다시 제 뺨과 맞닿은 그의 가슴팍을 통해 그의 웃음소리가 낮게 울린다.
“알았어. 이제 안 그럴게. 그래서 정말 무슨 일로 만났던 거야?”
장난기를 쏙 뺀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냥 어머님이랑 같이 쇼핑 좀 했어.”
“쇼핑?”
“응. 이번 시즌 신상 가방이랑, 원피스. 거기다 구두랑 코트, 브로치까지 아주 풀 세트로 사 주셨어. 그리고 기사님 달린 외제차도 한 대 주문해 주셨고. 아, 신혼집으로 쓰라고 성북동에 주택도 내 명의로 한 채 사 주신다 하셨는데, 그건 거절했어.”
“아깝게 그걸 왜 거절해?”
“그러게. 내가 왜 거절했을까? 진짜 아깝긴 했는데 말이지.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필요가 없을 거 같더라고. 어차피 본가에 방도 많은데 거기서 두어 개쯤은 내가 써도 되지 않나, 싶어서.”
그 순간 다정하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던 손길이 멈칫했다. 어느새 손을 내린 준성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가슴팍에서 얼굴을 뗀 수진이 똑같이 그를 마주 봤다. 휘둥그레 커진 눈에 떠오른 감정이 낯설다.
따뜻한 가정을 가져 본 적이 없는 남자라고 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없기에 한때는 메마른 상태로 감정 없이 살아왔다고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 나름의 노력과 그만의 방식을 유지하며 끝내 가족이란 큰 울타리를 지켜 온 사람이었다.
그것이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에 대한 사랑이었음을 왜 모를까.
그 자신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런 마음의 한편으론 언젠가 진정한 가족의 모습을 되찾고 싶어 했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다른 가족들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계기만 있다면 언제든 화목함을 되찾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계기를 어쩌면 자신이 만들어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고마움과 미안함. 그리고 걱정스러움이 혼재한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는데 괜히 쑥스러워진 수진이 입가를 늘여 씩 웃었다.
“왜 그런 얼굴로 보는데?”
“……나는 별로 안 내켜서.”
그런데 튀어나온 말은 생각과는 달리 아주 뜬금없었다. 당혹스러워진 수진이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뭐? 왜? 왜 싫은데?”
“너 은근 목소리가 크잖아. 참을 수 있겠어?”
무슨 소린가 했다가,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와, 세상에. 이 와중에 그런 말이 나올 줄이야.
그런데도 정작 그 말을 내놓은 남자는 여전히 장난기라곤 없는 얼굴이다. 정작 필요한 순간엔 쓸데없이 진지한 표정을 고수하는 남자를 어쩌면 좋나. 진심으로 기쁜 이 순간이 쑥스러워서 괜히 더 짓궂은 말을 늘어놨다는 걸 모르지 않아 더욱 기막혔다.
“그럼 방 하나 잡지, 뭐. 널린 게 빈방인데. 언제든 말만…… 흡!”
갑자기 제 얼굴을 붙잡고 입을 맞춰 오는 남자의 서슬에 뒷말이 뚝 끊어졌다. 가볍게 입술만을 머금고 슬쩍 물러난 남자가 나직하게 웃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미래의 총지배인님.”
기쁨이 가득 묻어나는 대답에 괜히 뭉클해진 그녀가 따라 웃었다. 그대로 그의 목을 끌어안은 그녀가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개었다. 입술이 마주 닿은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서로의 숨이 깊어졌다.
어제보다 행복한 오늘이었다. 그리고 내일은 오늘보다 행복할 것이다.
우리는 영원히 함께할 것이기에.
* * *
“……그러니까.”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팔짱을 낀 채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던 수혁이 나직하게 운을 뗐다. 가을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는 어느 토요일, 오후 2시.
“이 좋은 날, 이 좋은 시간에 내가 왜 너를 만나고 있어야 하는 거냐고.”
음침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마주 앉은 여자의 얼굴은 미동도 없다. 심지어 느긋하게 미소까지 떠올린 채 얼음이 가득 담긴 음료 컵 빨대를 쪼옥, 빨아들이는 모양새가 얄밉기까지 하다.
“뭐래? 네 조건 받아 주는 대신에 앞으로 내가 시키는 거 다 해 주겠다고 한 건 너였거든?”
말문이 막힌 수혁은 기막힌 얼굴로 눈앞의 여자, 연희를 바라봤다. 곱게 정돈한 헤어스타일과 차분한 화장. 화려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블라우스에 정장 치마.
그리고…… 기묘하게 화려한 디자인의 하이힐까지.
확실히 하이힐이 좀 튀지만, 누가 봐도 그녀는 완벽하게 선을 보러 나온 차림새였다.
‘온전히 네 편만 들어 줄 그런 친구는 필요 없냐?’
연희와 준성의 약혼 소식을 듣고 얼마 후, 결국 저 스스로 연희를 찾았다. 그리고 나름 심사숙고를 거친 제안을 꺼내 들었다. 준성을 포기한다면 온전히 네 편이 되어 주겠다는 제안이었다.
‘그냥 포기하라는 게 아니야. 나 같은 남자를 평생지기로 끼고 있는 거라고. 세상에 그만한 조건 없다?’
물론 당시의 연희는 그 말을 비웃었다. 이미 수진의 편이면서 뭔 개소리냐는 대답만 듣고 돌아서야 했다. 사실 무리라는 걸 알면서도 뭐라도 해 보고픈 절박함에 던져 본 말이라 크게 좋은 결과를 기대한 건 아니기도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연희는 얼마 안 있어 정말로 약혼을 파기하고 제게 연락을 해 왔다.
― 다 끝났으니 와서 술이나 사.
그때의 연희에게 정확히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독한 술을 잔뜩 들이켜고 잠이 들기 직전 내놓은 말만은 아직도 수혁의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날 선택했었대잖아. 기분 나빠. 빚진 기분이라 짜증 난다고 정말…….’
그리고 어딘지 홀가분해하던 그 표정과 깊게 내쉬던 한숨. 눈가에 맺혔던 눈물까지도.
“대체 그 말이 어떻게 그렇게 들리냐, 너는?”
“뭐가 다른데? 아무튼 앞으로도 부를 때 꼭 나와. 대충 보아하니 이렇게 두세 번만 더 하면 우리 엄마도 포기하실 거 같아. 그리고 너 담엔 더 일찍 나와. 네가 늦는 바람에 그 떡두꺼비남이랑 20분이나 이야기했단 말이야.”
덕분에 수혁은 주말에 호출당해 그녀의 맞선남이나 쫓아 보내는 팔자에도 없는 역할을 맡고 있는 중이다. 바로 5분 전, 이 자리에서 벌어졌던 끔찍한 참상을 떠올린 수혁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짓을 앞으로 두세 번이나 더 해야 한다고? 망할.
“저기. 우리 나이 벌써 서른셋이거든? 그리고 올해도 벌써 2/3가 지났지. 이제 그냥 포기하고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보는데. 어차피 남자는 결혼하면 다 거기서 거기야.”
“아 싫어! 방금 너도 봤잖아. 솔직히 그 얼굴은 재벌 3세가 아니고 재벌 할아버지래도 용납 안 될 얼굴 아니니?”
“그렇게 재고 따질 때 아니라니까. 그나마 개미 눈곱만큼이라도 장점이 있는 놈이면 일단 채 와야지. 이 바닥 남자들 괜찮은 놈들은 진즉 다 가 버리고 없는데 어쩌려고 이러냐?”
“그깟 결혼 안 한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너라도 데려가지, 뭐.”
“…….”
“아, 그러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연희가 눈을 빛내며 바라보자 수혁은 조용히 마른침을 삼켰다. 갑자기 등골이 싸해지는 게, 흡사 뱀 앞에 놓인 개구리가 된 기분이라 일단은 급히 말을 돌렸다.
“어, 뭐. 아무튼. 그건 그렇다 치고. 너 아직도 만날 생각 없냐?”
주어도 꺼내지 않았는데 연희의 고운 미간으로 작게 주름이 잡혔다.
“……내가 걜 왜 만나? 연 끊기로 했다니까 그러네.”
심통 부리듯 툴툴거리며 내놓은 말끝에 멋쩍은 기색이 어리는 걸 수혁은 놓치지 않았다.
“이미 네가 직접 약혼 파기한 것도 아는 상황인데, 이제 그만 잊은 척하고 다시 만나서 놀아도 되지 않냐?”
“그러게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해? 네가 그렇게 말해 버리는 바람에 얘가 미련을 못 버리고 자꾸 연락하는 거 아니야! 봐, 며칠 전에도 메시지 온 거.”
버럭, 외친 연희가 수혁의 눈앞에 제 휴대폰 화면을 들이댔다.
[여기 해방촌인데 엄청 예쁜 신발 발견! 어때? 완전 네 스타일이지? 가격도 싸. 12만 원에 해 주신대!]
메시지와 함께 굉장히 익숙한 하이힐 한 켤레가 떡하니 찍힌 사진이 눈에 들어오자 수혁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얘 진짜 무슨 호구니? 나한테 이러고 싶대? 이딴 싸구려나 추천해 주고 말이야. 거기다 여긴 뭐야. 지금 준성이랑 데이트하면서 나한테 이 사진 보낸 거 맞지? 놀리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지금 신고 계시는 건 뭔데?”
“그럼 그걸 내버려 둬? 귀신같이 내 스타일인 걸 어떡해! 당연히 바로 사러 가야지.”
정말로 열받아 죽겠다는 얼굴로 내놓는 말에 수혁은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수혁의 앞에서 연희는 보란 듯 팔짱을 끼더니 나직한 말로 툴툴거렸다.
“하여간 계집애 눈썰미도 좋다니까. 못하는 게 없어서 더 짜증 나.”
“그래서. 진짜 평생 안 볼 거냐?”
웃음기 깃든 물음에 연희는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나 말하는 것과는 다른 속내를 여실히 드러내듯 복잡해진 얼굴이다. 그렇게 머뭇거리던 연희는 한참 만에야 투덜대듯 작게 내뱉었다.
“뭐. 봐서 결혼식 정도는 참석할 수도 있고.”
“그냥 눈 딱 감고 한번 만나 보는 게 서로서로 속 편하지 않겠냐?”
“아, 정말. 이게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거든? 굉장히 섬세하게 작용하는 인과 관계로 엮인 일이란 말이야. 무슨 남자가 이렇게 무신경해? 넌 여자의 마음을 그렇게 모르니까 여태까지 솔로인 거라고!”
그런데 불똥은 또 왜 여기로 튀는 거냐.
종알종알 저를 잡고 늘어지는 여자를 앞에 두고 수혁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철없는 여자 사람 친구가 제대로 어른이 되려면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할지. 생각할수록 눈앞만 깜깜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놈의 오지랖이 불치병이라서.’
제 마음도 모르고 홀로 가슴앓이하는 여자만 보면 가만 둘 수가 없으니 이건 분명 병이겠지. 그런 미련한 여자를 외면할 수 없는 건 제 쪽이니 순응하며 사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