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방 잡을까요?
에필로그 5화
“새 식구 앞에서 경망스럽게 뭐 하는 짓들이니? 점잖게 굴지 못하고선.”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어머니.”
조용한 일갈에 순식간에 얌전해진 아들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도 서둘러 몸을 일으키며 인사말을 전하자 싱긋 웃으며 다가온 한 회장이 다정하게 어깨를 다독이며 말을 건네 왔다.
“바쁜데 시간 내 줘서 고맙구나. 기다리느라 시장했겠네. 그럼 이동하죠, 다들.”
주변을 돌아보며 호령하듯 내놓은 말에 남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정하게 그 곁을 에스코트하는 송 교수와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르는 준하와 준영. 그리고 제 곁으로 다가와 손을 내미는 준성까지.
이것은 의외로 아주 단단해 보이는 울타리였다. 거의 흩어져 지내다시피 하며 서로에 대한 이해 없이 그저 가족이라는 이름만 남아 있었다고 했던가. 그럼에도 어떤 전환점을 지나 서로를 돌아보게 된 순간 이들은 진짜 가족이 되어 있었다.
아마도 이게 핏줄이란 거고, 기른 정(情)이란 거겠지. 잘 자라 준 든든한 자식들에게 둘러싸인 한 회장을 보자 문득 저도 준성을 닮은 아들이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잠깐만. 마지막 생리가 언제였지?
그 답을 생각할 새도 없이 식당으로 들어서자 한창 바쁘게 음식을 나르던 여자가 밝게 웃으며 그들을 반겼다.
“어서 오세요. 마침 준비가 끝난 참이네요.”
“수고했어요, 광주댁.”
커다란 식탁 위엔 이러다 주저앉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가족들이 먼저 자리를 잡아 앉은 후에야 수진은 조심스럽게 식탁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준성의 도움을 받아 막 의자에 앉으려던 참이었다.
“……욱!”
갑자기 헛구역질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식당엔 정적이 깔렸다. 자리에 앉아 있는 가족들도. 커다란 접시를 들고 나오던 광주댁과 그 뒤에서 물병을 들고 있던 강화댁도.
그리고 제 옆에서 의자를 빼 주고 팔을 부축해 주는 준성까지도 그대로 굳은 채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이 정성스럽게 차려 놓은 식탁 앞에서 구역질이라니.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당황한 수진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 죄송…….”
재빨리 몸을 감싸듯 허리를 받쳐 준 준성이 당황한 손길로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괜찮아? 체한 건가? 열도 좀 있는 거 같은데.”
“어? 어, 아니 잠깐만 그게…….”
놀라며 묻는 준성을 안심시켜 줄 새도 없었다. 동시에 튀어 오르듯 일어난 남자들이 우왕좌왕 헤매기 시작했다.
“준영아, 얼른 119, 아니, 일단 병원부터 가자.”
“김 기사 대기시킬까요?”
“그래. 아니, 내가 운전하마. 키 좀 찾아오너라. 정 원장한테도 연락하고!”
“운전은 제가 하는 게 빠르죠. 일단 제 차로……!”
“헛구역질에 병원은 무슨 병원입니까. 정신들 좀 차리세요.”
얼토당토않은 소리가 오가는 현장을 한 방에 제압해 버린 한 회장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 집안 남자들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은 40여 년을 함께 살아온 그녀 자신도 몰랐다. 주접도 세상 이런 주접이 없었다.
“하여간 며느리 일이라면 벌써부터 이렇게 정신들을 못 차리니.”
머쓱해진 남자들을 향해 혀를 끌끌 차던 한 회장이 긴장하며 선 수진에게로 눈을 돌렸다. 방금 전 남자들을 혼낼 때와는 전혀 다른, 따뜻한 눈빛과 자애로운 미소가 걸린 얼굴이었다.
“혹시 그런 기미가 있었니?”
“지금 생각해 보니…… 날짜가 좀 지나긴 한 것 같아요.”
다정한 목소리에 수진은 민망해하며 대답을 내놓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한 회장의 얼굴에 눈에 띄게 화색이 돌았다.
“식사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아직까진 많이 심하진 않은 것 같아요.”
“그럼 뭔가 가볍게 먹을 수 있는 걸 찾아보라 하마. 간단히 식사하고 일단 준성이랑 병원부터 다녀오고.”
“네, 어머님.”
차분한 대꾸에 고개를 끄덕이던 한 회장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아무래도 결혼식을 좀 더 앞당겨야 할 것 같지?”
* * *
명인에게 청첩장을 전하고 난 수진은 다음 약속을 위해 곧장 JL백화점으로 이동했다. 그녀가 탄 차량이 정문에 도착하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직원들이 앞다퉈 뛰어나와 정중히 문을 열어 주며 말을 건네 왔다.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감사합니다.”
이어 안내된 곳은 특급 VIP들만 이용이 가능한 라운지였다. 고급스럽게 꾸며진 장소로 들어서자 예닐곱 명쯤 되는 직원들이 쭉 서 있었다. 그 안쪽 커다란 소파에 앉아 우아하게 차를 마시던 한 회장이 때마침 들어서는 그녀를 보곤 손짓해 불렀다.
“어서 오너라. 오는 길 힘들진 않았니? 어서 앉고.”
가까이 다가서는 수진의 손을 붙잡으며 자리를 권한 한 회장이 자애롭게 웃어 보였다.
“죄송해요. 제가 조금 늦었습니다.”
“죄송은 무슨. 내가 시간이 남아 일찍 온 거니 신경 쓸 거 없다. 컨디션은 좀 어떠니?”
“많이 좋아졌어요. 오늘은 식사도 잘 했고요.”
“그래. 다행이구나. 그럼 현 실장. 바로 준비해요.”
“네, 회장님.”
한 회장을 전담하는 퍼스널 쇼퍼 현 실장이 깍듯이 대답하곤 대기하던 직원들을 향해 지시를 내렸다. 우르르 몰려 나간 직원들은 잠시 후, 흰 장갑을 낀 채 의복이 걸린 행거부터 가방이며 구두 따위의 온갖 상품들을 줄줄이 가지고 돌아왔다.
“마음에 드는지 한번 보고 확인해 보렴.”
“네?”
당연히 한 회장의 쇼핑이라고만 생각했던 수진이 기함하며 되물었다. VIP들의 쇼핑이 대충 어떻게 이뤄지는 건지는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제게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저한테는 너무 과분합니다, 어머님.”
“과분하긴 뭘. 얼마나 한다고. 마음에 드는지만 확인하면 된다.”
“그리고 너무 많아요. 여기서 고르기도 무섭고요.”
“어차피 전부 구입할 예정이니 부담 가질 거 없다. 여기, 현 실장이 엄선해 놓은 물건들이긴 한데, 혹시 네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다면 바꿔도 좋고. 그럼 일단 하나하나 보여 주도록 해요.”
더더욱 기함할 소리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걸 전부 산다고? 이중에 고르는 게 아니라 사고 싶지 않은 걸 골라내라고?
머리까지 아찔해지는데 이런 일 정돈 익숙한지 현 실장이라 불린 여자가 상냥하게 말을 붙여 왔다.
“그럼 사모님. 제가 같이 봐 드릴게요.”
도저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말도 나오지 않는다. 눈만 깜빡이는데 웃으며 다가온 여자들이 그녀를 데리고 커다란 거울 앞으로 이동하더니 정성스럽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얼결에 그녀들에게 둘러싸인 채 온갖 명품들을 하나씩 착용해 보고 온갖 낯간지러운 칭송을 듣는 동안, 한 회장은 또 다른 직원들이 준비한 다과를 들며 흐뭇한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그 블라우스는 아직 좀 노숙해 보이는구나. 나이가 어리니 좀 더 산뜻한 디자인이 좋겠어. 다른 디자인으로 보여 주고, 다른 건 모두 차로 옮겨 둬요.”
“네, 회장님.”
“그리고 이 구두는 와인색도 있는 거로 아는데, 포인트가 될 것 같으니 와인색도 같이 준비하고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꽤 많은 상품들을 준비했기에 전부 확인하기까지 상당히 시간이 걸렸지만 한 회장의 얼굴에는 전혀 지루한 기색이라곤 없었다. 심지어 간신히 의복과 잡화를 마무리하고 나니 이젠 명품 화장품들이 줄줄이 밀려 들어왔다.
어지간히 쇼핑을 좋아했던 그녀도 밀려드는 물량 공세엔 그만 질려 버릴 지경이었다. 부자가 되면 아무 매장에나 들어가 ‘이쪽 라인, 저쪽 라인 다 주세요!’라고 외치고 싶었던 꿈 따윈 진짜 부자들의 현실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 가방은 다 마음에 드니?”
“네. 다 하나같이 너무 예뻐서 뭘 골라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런 고민은 앞으로 네 옷장 앞에서 하려무나.”
쿨하게 대꾸한 한 회장이 모든 상품을 차에 싣도록 지시해 놓고는 다시 그녀의 손을 붙잡아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긴 쇼핑에 지친 몸을 쉬게 할 겸,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눴다. 달콤한 간식을 권하며 예식 준비며 출산 계획. 육아 휴직과 관련한 계획이 어떤지를 묻던 한 회장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을 꺼냈다.
“참, 그리고 혹시나 싶어 본가 가까운 곳에 집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둘만 사는 거라면 지금 준성이 집도 나쁘진 않다만, 이젠 애가 있으니 애가 뛰어놀 만한 마당이 있는 게 더 좋을 것 같고, 가까이 있으면 다른 가족들이 널 돕기도 수월할 듯해서. 물론, 네 의향이 가장 중요하니 전적으로 네 의견을 존중할 생각이야.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한번 생각해 보렴.”
충분히 명령으로도 가능할 말을 조심스럽게 권유하는 한 회장의 배려에 수진은 이상하게 말문이 막혔다.
저를 감시하고 간섭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곁에 두고 보살펴 주고 싶은 의미임은 충분히 알고도 남았다. 처음 만나는 손자를 좀 더 자주 보고 싶은 마음도 분명 있을 거고.
지난 몇 달간 겪은 한 회장의 본모습은 ‘시어머니 종결자’ 같은 별칭을 떠올리기엔 민망할 정도로 다정한 분이었다. 기업인으로서 치열한 삶을 살아오느라 정작 어린 자식들에겐 다정하지 못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 사실을 후회하거나 외면하느니, 이제라도 조금씩 달라져 보려 노력하는 것이 한 회장의 방식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완고해지기 쉬운 생각을 늘 경계하고, 좀 더 나은 선택을 위해 고민하고 행동하는 한 회장이기에 도리어 함께하며 맞춰 갈 수 있을 만한 사람이라 생각하는 건 너무 섣부른 결정일까.
“왜, 내키지 않니?”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아선지 한 회장의 목소리가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그 순간 엷게 미소를 머금은 수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에요, 어머님.”
임신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녀도 생각이 많았다. 빌딩 숲으로 가득한 도심지보단 넓은 마당이 있어 조금이나마 자연 경관을 접하고 자랄 수 있는 주택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기왕에 그런 집을 찾는다면, 본가와 가까운 집을 구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다 문득 떠올린 계획이었다.
“저…… 본가에 방 두 개만 내주시면 안 될까요?”
예상하지 못한 답이었는지 한 회장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괜히 멋쩍어진 수진이 배시시 웃음을 머금었다.
“저도 실은 마당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거든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 괜히 집 한 채 더 사서 낭비만 하느니 방도 많고, 같이 지켜봐 줄 사람도 많은 곳이 더 좋을 것 같아서요.”
세상 최고로 멋진 아빠와 팔불출 삼촌들. 엉뚱한 듯 인자한 할아버지와 조금은 무섭지만 속마음은 누구보다 다정한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날 아이의 모습이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그런 환경에서 태어난 아이가 제가 받은 사랑을 나눌 줄 아는, 그런 사랑스럽고 어여쁜 아이로 자라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제가 잘해 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함께 살면서 따뜻한 가정을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분명 우리 아이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치리라 생각하고요.”
가만히 그녀의 말을 경청하던 한 회장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 개도, 네 개도 괜찮으니 말만 하려무나.”
그런 와중에도 은근히 둘째 셋째에 대한 욕심을 내비치시는 것처럼 들리는 건 기분 탓인가.
뒤이어 대기하고 있던 윤 이사를 호출한 한 회장이 막힘없이 지시를 내렸다. 새로운 가족을 맞아들일 공간을 손수 준비하겠다는 의욕으로 가득한 표정이 아주 행복해 보였다. 그렇게 벌써부터 바빠지려 하는 한 회장의 곁에서 수진은 작게 미소만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