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방 잡을까요?
에필로그 4화
「재계의 결혼 트렌드가 된 ‘연애결혼’. 몇 년 전 큰 화제가 되었던 강윤 KS그룹 고문의 결혼 이후, 최근 HJ건설 송준성 부사장의 약혼설까지. 핑크빛 기류가 솔솔 풍기는 재계의 속사정은?」
「경영 방식의 변화와 그룹의 글로벌화. 결혼 적령기 인구의 변화 등의 원인으로 파악.」
「……그러다 보니 몇몇 대기업과 고위 공무원, 법조인, 의료계 등 소위 ‘그들만의 세상’ 속에서 혼처를 찾아 왔으나 최근 혼기를 맞이한 3세들을 중심으로 달콤한 열애 후 결혼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그런 가운데 HJ그룹 한정원 회장의 삼남 송준성 HJ건설 부사장의 결혼이 임박하여 화제가 되고 있다. 그 상대는 현재 호텔 라비타의 부지배인으로 재직 중인 김 씨(33세). (중략) 이미 호텔 라비타의 상무 이사와 영업부 판촉팀 지배인으로 재회하기 전, 국내의 명문 K대학에 함께 진학하며 인연이 되었고, 10여 년을 기다린 끝에 빛나는 결실을 맺었다고…….」
“저 왔어요, 차장님. 뭘 그렇게 열심히 보는…… 으악!”
화창한 주말 오전. 손님이 많지 않은 주택가 공원 앞 카페엔 난데없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느긋하게 소파에 기대앉아 태블릿 PC로 포털 사이트를 뒤적이고 있던 나 과장, 아니 이젠 나 차장이 된 명인이 덩달아 흠칫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 깜짝이야! 뭐야?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아니 차장님! 여기서 이런 걸 보고 계시면 어떡해요?”
“어차피 보라고 띄운 기사인데 보는 게 어때서? 내용도 뭐, 나쁘지 않더구만. 로맨스 영화보다 더 로맨틱한 현실이라니……. 크!”
다시 평정심을 찾은 명인이 낄낄거리며 내놓은 말에 치미는 한숨을 삼킨 수진이 맞은편 자리로 가 앉았다. 다시 중얼거리듯 이어지는 말이 축축 늘어졌다.
“전 진짜 요즘 낯 뜨거워 죽을 맛이란 말이에요오.”
“어쩌겠어, 이젠 수진이도 오너 일가 사람이 되었는데 그냥 즐겨야지. 그나마 뭐 이름이나 개인 정보 같은 건 너무 상세히 실리진 않은 거 같던데. 그 집안에서 나름 보호를 하긴 한 모양이지?”
“……호텔 라비타에서 부지배인으로 근무하는 서른세 살 김 씨가요?”
“뭐, 부지배인 김 씨는 너 말고도 한 분 더 계시니까.”
또 다른 부지배인 김 씨가 마흔이 다 되어 가는 남자분이라는 사실은 말해 봤자 한 귀로 들어 흘리실 테지. 제 일 아니라고 그저 재밌어 죽겠다는 목소리에 한숨만 깊어졌다.
“그건 그렇다 치고. 요즘 나 사무실만 가면 너무 심심해. 아직도 너 앉아 있던 자리 문득문득 쳐다보고 그런다?”
“판촉팀 나온 게 벌써 3년 전인데 아직도 그러면 어떡해요? 누가 보면 제가 차장님이랑 연애한 줄 알겠어요.”
“푸훗. 그런가?”
“그리고 아직 유리도 있고 민영 씨도 있잖아요.”
“그치. 둘 다 좋은 애들이긴 한데, 그래도 우리 수진이만큼 말이 잘 통하고 재밌진 않더라고.”
히죽 웃어 보인 명인이 반쯤 남은 아이스아메리카노 잔을 들어 얼음을 달그락거렸다.
지난 3년 동안 영업부에도 상당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재작년엔 민영이, 올해엔 유리가 각각 주임을 달았고, 얼마 전 새로운 막내와 팀장급 인재 하나가 들어와 잘 스며들고 있다는 좋은 소식이 있는 반면, 사무실을 떠난 이들의 소식 또한 간간이 들려왔다.
가장 먼저 자리를 비우게 된 건 효은이었다. 제가 미국에 있는 동안 퇴사를 해 친구들과 작은 카페를 차렸지만, 예상만큼 결과가 좋진 않았던 모양이다. 최근 다시 취업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건너 건너 전해 들은 기억이 있다.
제 감정을 주체 못 하고 주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최 대리 역시 비슷한 시기에 호텔을 제 발로 그만두고 나갔다. 꽤 오랫동안 구직 상태로 지내다 거의 1년 후에야 모 여행사로 이직을 했다는 이야기가 마지막이었고 다음 근황은 알 수 없었다.
입버릇처럼 성희롱을 일삼던 신 부장은 야무진 직원 한 명에게 제대로 걸려 고소까지 당한 후에야 깊이 후회하고 반성했다는데, 믿거나 말거나. 어쨌든 결국 올해 초 인사에서 이사 진급에 실패하며 씁쓸하게 회사 생활을 마무리했다. 오랜 시간을 회사를 위해 일해 왔으나 그 누구도 아쉬워하지 않았다는 게 안타까운 점이었다.
그래서 현재 영업부는 새로 오신 점잖은 부장님과 함께 최근 차장으로 진급한 명인을 중심으로 아주 평화롭게 잘 굴러가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무슨 일로 보자고 한 거야?”
“아, 저 청첩장 나왔어요.”
“오! 드디어 나왔구나. 어디 보자.”
화색을 띠며 반기는 명인에게 수진은 곱게 봉해 놓은 봉투를 내밀었다. 내용물을 꺼내 확인하는 명인의 눈에서 빛이 반짝였다.
“우리 수진이가 정말 결혼을 하네. 그것도 상무님이랑. 세상에, 내 딸도 아닌데 왜 내 딸 시집보내는 것같이 기분이 이상하지?”
“에이, 딸이라뇨. 이렇게 큰 딸이 있으면 큰일이죠, 그 연세에.”
“그런가? 하긴. 이제 마흔 초반에 그건 좀 너무 갔지?”
“그럼요. 아직도 어디 가면 대학생으로 보일 외모신데?”
“어디까지 갈 셈이니? 슬슬 돌아와.”
싱거운 말을 주고받은 두 사람이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어 다시 청첩장으로 눈을 돌린 명인이 흐뭇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바로 3주 후라니 믿기지가 않네. 처음엔 12월쯤 하려고 생각하지 않았었나? 갑자기 이렇게 훅 당겨졌으니 정신이 하나도 없겠다.”
“그래도 잘 넘겨 봐야죠. 사정이 사정이니만큼.”
“그건 그래. 배가 불룩해서 예식장 들어가긴 좀 민망하긴 하지?”
은근하게 목소리를 낮춘 명인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곤 수진의 배로 슬쩍 시선을 내렸다.
“입덧은 좀 괜찮고?”
“네. 생각보단 버틸 만해요. 저희 어머니도 입덧이 그리 심하진 않으셨대요.”
“그 쪼그만 것이 벌써부터 효도를 하네. 나중에 또 얼마나 크게 효도하려고 벌써부터 이렇게 예쁜 짓을 할까.”
쑥스러운 듯 시선을 내리깐 수진이 멋쩍게 웃었다. 그런 수진을 지그시 바라보는 명인의 눈매가 따뜻한 곡선을 그렸다.
“하긴, 엄마가 이렇게나 예쁜 짓을 하는데, 당연히 엄마 닮아 예쁘겠지. 요즘 우리 회장님 댁에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는 소문이 파다하더라. 완전 우리 며느리, 우리 며느리 하고 다니신다고. 와, 나 정말 세상에 우리 회장님이 이런 팔불출이 되실 줄은 몰랐네.”
이건 그녀 자신도 상상 못 한 일이긴 했다. 동의하듯 웃음을 터뜨린 수진의 머릿속엔 어느덧 지난 몇 주간의 일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있었다.
* * *
우여곡절 끝에 양가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낸 이후, 본격적으로 결혼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상견례를 치르고, 가급적 올해만 넘기지 말자는 양가 부모님의 의견을 받아들여 예식은 12월 중순경으로 잡았다.
졸지에 귀국한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아 결혼식을 치러야 할 처지가 되었지만, 어차피 부부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크게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결혼이라는 커다란 숙제를 해치워야 한층 바빠진 호텔 일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기에 그만하면 적당한 시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세상일은 예상 밖의 문제로 인해 크게 틀어지기 마련이었다.
“어서 오세요, 제수씨. 처음 뵙네요. 송준영이라고 합니다.”
“아, 처음 뵙겠습니다. 김수진이라고 합니다. 여기, 이건 제가 준비한 작은 선물인데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어이구, 뭘 이런 걸 다 가져오셨어요? 귀한 손 무겁게. 고맙습니다, 제수씨.”
들고 온 꾸러미를 내밀자 냉큼 그것을 받아 든 준영이 웃으며 대꾸했다. 서글서글하게 웃는 얼굴은 확실히 준성을 빼닮았다. 준하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거푸집이라 해야 할까.
두 번째로 준성의 본가에 들른 날이었다. 처음 들렀던 날에는 늦은 오후에 도착해 한 회장 내외와 저녁을 함께하고 짧게 담소를 나누다 돌아왔었다.
그런데 이번엔 준성의 두 형까지 모두 모이는 자리였다. 적어도 결혼 전에 한 번쯤은 얼굴을 보는 게 좋겠다는 송 교수의 의견 덕분이었다.
“일단 응접실로 가자. 아버지랑 형님이 기다리고 계셔.”
“어머니는?”
“급하게 처리할 일이 좀 있으신가 봐. 지금 서재에 계실 거야. 뭐, 사실상 우리 중에 가장 바쁘신 분이잖아.”
준성의 물음에 흔쾌히 답한 준영이 키득거렸다. 앞장서는 두 남자의 뒤를 조용히 따라붙었다. 세 사람이 응접실에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송 교수와 준하가 그녀를 반겼다. 그리고 한 회장이 오길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소파에 둘러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담소를 나눴다.
“그나저나 이렇게 제수씨를 직접 봐 보니 역시나, 준성이 녀석이 왜 10년 넘도록 잊지도 못하고 있었는지 확 와닿는데요?”
“……형.”
“아, 왜? 부끄럽냐? 소개해 줄 때까지 궁금해 죽을 것 같아도 참아 줬잖아. 이 정도는 말할 수 있지. 하여간 얼마나 꽁꽁 감추고 안 내놓는지, 아주 누가 보면 몰래 꿀단지라도 숨겨 놓은 줄……. 알았다, 알았어. 알았다니까.”
너스레를 떨며 손을 내젓는 준영부터.
“꿀단지는 맞지. 준성이 어릴 때 생각해 보면 사람이건 물건이건 이렇게 아끼고 숨긴 건 처음이었잖아.”
무심히 거기다 한술 더 뜨는 준하까지.
“캬, 역시. 우리 작은 송 교수님 통찰력 기가 막히고. 이 김에 제수씨한테 준성이 과거사부터 좀 풀어 드릴까?”
“헛소리 좀 하지 말고.”
“아니, 저 봐. 제수씨는 너무 좋아하시는데? 궁금하죠? 그렇죠?”
그야 궁금하긴 했다. 대학 시절 준성은 이미 완성형 인간이었기에 조금 더 미숙하고 푸릇푸릇했을 청소년기엔 어땠을지, 얼마나 상큼하고 귀여운 모습이었을지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아깝다!’
그런데 거기서 대놓고 궁금하다고 말하기엔 자리가 너무 어려웠다. 하다못해 예비 시아버님이라도 이 자리에 안 계셨다면 한번 질러 보는 건데. 아쉬운 마음을 누르며 어색하게 웃어 보이자, 그 광경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송 교수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이렇게 모이니 참 좋구나. 모처럼 집 안이 북적대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고. 앞으로도 종종 모이기로 하자.”
“에헤이. 그건 너무 부담 주시는 거 같은데요, 아버지. 예비 시아버지가 조금 눈치가 없네, 하고 흉보면 어떡하려고 그러세요?”
준영은 농담처럼 말했지만, 수진은 순간 당황해 버렸다. 얼른 양손을 내저은 수진이 황급히 말을 받았다.
“흉은 무슨. 아니에요. 전혀 부담되는 거 없고, 저도 많이 즐거워요. 그러니 자주 불러 주세요.”
“오, 그럼 올 때마다 나한테도 꼭 연락해 주깁니다.”
냉큼 이어지는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뭐가 불편한지 눈매를 좁힌 준성이 준영을 향해 툭하니 말을 던졌다.
“설마 우리 올 때마다 여기 있을 셈이야?”
“물론, 이 삭막한 집 안에서 우리 제수씨 즐겁게 해 줄 사람은 나뿐인데 당연히 있어야지.”
“아니, 전혀. 그럴 필요까진 없어 보이는데.”
“어허, 시댁 어렵지 않은 며느리가 어디 있다고. 안 그래요? 제수씨도 제가 있는 쪽이 덜 어색하죠?”
유치한 다툼을 벌이며 동시에 저를 바라보는데 차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서로 제 편을 들어 달라는 시선이 부담스러우면서도 우스워서 절로 입꼬리가 치솟는다. 뭐라 대답은 없이 입가를 꾹꾹 누르며 피식거리자 그것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준영이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폈다.
“거봐. 제수씨도 그게 더 좋으시다잖아.”
“내 눈에만 차마 거절은 못 하고 곤란해하는 거로 보이나?”
“나도 준성이한테 한 표. 준영이 넌 허물이 없어도 너무 없어.”
“아, 형. 그렇게 배신하기야?”
세 형제의 옥신각신 말씨름이 이어지던 때였다. 어느새 비서들을 이끌고 응접실에 도착한 한 회장이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남자들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