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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3화 (90/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에필로그 3화

생각보다 길어진 밤 산책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자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던 아버지가 퉁명스레 말을 걸어왔다.

“늦었구나.”

“네. 밤공기가 아주 상쾌해서 좀 오래 걷다 보니 늦었어요. 그런데 엄마는요?”

괜히 찔리는 마음을 숨기며 얼른 말을 돌리자 아버지는 리모컨을 든 채 채널을 돌리며 대꾸했다.

“요 앞집에 가셨다.”

“지운이네요? 거긴 왜요?”

“사위 될 놈 인사하러 왔다고 하니까 닭 한 마리 준다고 부르더라. 뒷마당에다 한 예닐곱 마리쯤 풀어놓고 키우고 있거든. 그 집 토종닭이 아주 실하게 크긴 했더라만.”

“와, 아빠. 사위 왔다고 씨암탉까지 잡아 주시는 거예요?”

“크흠.”

수혁이 있을 때는 이래저래 신경 쓸 게 많아선지 미처 몰랐는데, 이제 보니 아버지의 귓바퀴가 벌겋게 물들어 있다. 이쪽은 보지도 않고 맹렬하게 채널만 돌려 대는 모습이 굉장히 낯설었다. 정말 차 여사의 말대로 지나치게 잘난 예비 사위가 어려웠던 걸까.

결국 서로가 서로를 신경 쓰느라 평소답지 않게 많은 모습을 보인 셈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진실을 알게 된 수진이 웃음을 참으며 슬쩍 준성의 팔을 잡아끌었다. 선선히 따라온 준성이 소파에 앉자 아버지는 그제야 힐끗 그를 바라보더니 중얼거리듯 말을 건네 왔다.

“피곤하지 않은가? 먼 거리 운전하느라 고됐을 텐데.”

“괜찮습니다. 길이 많이 막히지 않아서 운전도 오래 하지 않았고요.”

“체력은 쓸 만한 모양이구만. 그나저나 아직 이른 시간인데 벌써 잠자리에 들라 할 수도 없고. 괜찮으면 가볍게 한잔 더 할 텐가?”

불쑥 내놓은 제안에 수진이 조용히 아버지를 제지했다.

“아빠.”

“……뭐 저렇게 눈에 쌍심지를 켜니 술은 안 되겠고. 에잉. 뭘 해야 할지 모르겠구만.”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신 아버지가 다시 리모컨을 만지작대다 바둑 전문 채널을 틀어 놓고 멈칫했다. 화면 속엔 두 남자가 커다란 바둑판을 놓아둔 채 뭔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광경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던 아버지는 이윽고 거실 테이블 아래에서 주섬주섬 바둑판을 꺼내 들었다. 어색함과 무료함을 이기지 못해 혼자 바둑이라도 두며 차 여사를 기다려 볼 심산인 듯했다.

“그럼 저희는 잠깐 제 방에 좀 다녀올게요. 이이가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요.”

“그러든지.”

여전히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무뚝뚝하게 대답한다. 이쯤 되면 일단은 따로 격리를 시키는 게 서로가 편해 보일 정도였다. 몰래 한숨을 내쉰 수진이 준성을 톡톡 건드리곤 이 자리를 빠져나가자는 손짓을 했다.

“잠시만.”

그런데 준성은 그런 수진을 슬쩍 제지하더니 아버지의 앞에 놓인 바둑판으로 시선을 두었다. 그사이 바둑알 몇 개가 알 수 없는 형태로 놓여 있었고, 지그시 바둑판을 응시하며 뭔가를 고민하던 아버지가 흑돌 하나를 내려놓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맞은편으로 다가간 준성이 어느 한 부분을 가리켰다.

“그 자리도 좋지만 이쪽에 두시는 것도 괜찮아 보이는데요.”

그 순간 휙 하니 고개를 치켜든 아버지가 준성을 바라봤다. 어쩐지 그 눈이 반짝이며 빛을 냈다.

“혹시 바둑 둘 줄 아는가?”

“그냥 돌만 좀 놓을 줄 압니다. 돌아가신 저희 할아버지께서 아주 좋아하셨거든요. 오랜만에 바둑판을 보니 할아버님 생각이 나서 좋네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한 수 배울 수 있을까요?”

“그래? 그럼 어디, 실력이 어떤지 확인 좀 해볼까?”

못 이기는 척 자리를 권한 아버지가 헛기침을 하며 더욱 무뚝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학창 시절에 배운 바둑을 평생 취미로 삼아 왔지만, 안타깝게도 가까운 사람 중에는 같이 둘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집에선 늘 이렇게 혼자 바둑알을 늘어놓으며 적적함을 달래는 게 전부였는데 뜻밖의 상대를 찾을 줄이야.

“그럼 자네가 백을 쥐게.”

“알겠습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당황한 건 수진이었다. 얼른 준성의 곁으로 다가간 수진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속삭였다.

“뭐야. 바둑도 둘 줄 알았어? 난 왜 몰랐지?”

“그냥 조금 취미로만 둔 거라서. 별건 아니야.”

나직하게 대꾸한 준성이 싱긋 웃었다. 실은 초등학교 시절, 방과 후 활동을 통해 바둑을 접했고, 거기서 꽤나 소질을 보여 기원 연구생으로 입문했다가 중학생이 되던 해에 프로의 문턱까지 밟고 그만뒀다는 제 전적을 굳이 밝힐 필요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건 이것으로 아버님이 제게 큰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뿐.

그렇게 대국이 시작되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수진은 진지하게 맞붙은 두 남자의 옆에 따뜻한 차를 대령하곤 한참을 앉아 구경했다.

뭔지도 모르는 바둑은 전혀 재미도 없고, 두 남자는 여전히 말수가 적었지만, 어느덧 짙게 깔려 있던 어색함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그 분위기가 좋았다.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두 남자의 마음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아 흐뭇했다.

그 무렵 집으로 돌아온 차 여사가 유난히 조용한 거실에 머리를 맞대고 앉은 세 사람을 확인하곤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머, 송 서방이 바둑도 둘 줄 아나 보네?”

“그러게. 나도 오늘 처음 알았어.”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차 여사를 향해 역시나 목소리를 낮춰 대꾸한 수진이 가만히 입술 위로 검지를 세웠다. 그러고는 키득거리며 차 여사의 손을 잡아끌었다. 방해가 되지 않도록 안방으로 옮겨 가 오붓하게 대화를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한참 후, 수진은 먼저 잠자리에 든 차 여사를 확인하고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그 동안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같은 자세로 바둑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가 약 세 시간이 흐른 시점이었다. 낮게 탄식을 내뱉은 준성이 패배를 선언했다.

“이런……. 졌습니다. 역시 아버님께는 못 당하겠네요.”

“그래도 젊은 사람치고 제법 놓을 줄은 아는구만. 어르신이 생전에 자네를 제대로 가르치신 모양일세.”

“그나마도 다 잊어버린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다시 배워야 할 것 같은데요.”

“허허, 그럼 나한테 배우러 오든지.”

얼굴 가득 만족스러운 웃음을 담은 아버지가 기다렸다는 듯 툭 내놓은 말에 당황한 건 수진이었다.

“에이, 아빠. 그건 좀 힘들어요. 이 사람 너무 바빠서 오늘도 어렵게 시간 낸 거예요. 그냥 가끔 놀러 올 때만 같이 두시고 그러세요. 그리고 뭐, 요샌 온라인 바둑 이런 것도 잘되어 있다면서요? 그런 것도 한번 시도해 보시고요.”

“흠…….”

딴엔 아주 조심스럽게 만류하고 대안을 제시했는데, 아버지는 급격히 가라앉은 얼굴로 주섬주섬 바둑돌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어 내놓는 말끝에 씁쓸함이 어렸다.

“암만 세상이 좋아져서 인터넷이 편해졌다 해도…… 그래도 직접 얼굴 보면서 두는 이것만은 못하지. 점점 사람 얼굴 마주할 일이 없어지는 세상이라 그런지 이래저래 좀 외로운 것도 같고.”

“아빠.”

풀이 죽은 아버지를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좋지 않다. 단순히 취미만을 즐기려는 게 아니라, 이젠 가족이 될 사람을 더 자주 보고 싶은 마음임을 어찌 모를까.

“그래도 이젠 기다리는 재미가 있겠지. 자네, 앞으로도 시간 나면 우리 수진이 데리고 내려오게. 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술도 나랑 딱 한 잔만 하고. 그러다 바둑도 한번 두고. 그렇게 하룻밤 푹 쉬고 돌아가는 거로 하세. 아랫목 따듯하게 데워 놓을 테니.”

“…….”

꼭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에 수진과 준성이 서로를 바라봤다. 어렵기만 해서 괜히 툴툴거리기만 했던 예비 사위에게 이제야 제대로 친해져 보자는 뉘앙스의 말을 건네 온 순간이었다.

“아빠 이제 사위 오는 거만 목 빠지게 기다리시겠네요.”

“애비 술 한 잔도 제대로 못 마시게 하는 불효자식보다야 바둑 한 판 둬 주는 사위가 더 반갑겠지, 그럼.”

툴툴거리며 내뱉는 말인데, 이상하게 가슴이 뭉클해 웃어 버렸다.

어렵게 얻은 딸자식을 평생 금이야 옥이야 기르며 행복해하신 분인 걸 알지만, 한편으론 이렇게 같은 취미를 공유할 아들 하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평생 꼭꼭 눌러두고 사셨음을 왜 모르랴.

처음엔 그저 내 품 안의 작고 소중한 공주님이었는데, 어느 순간 다 자란 딸은 이제 함부로 만지기도 조심스러운 존재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아이의 성장과 함께 점차로 공유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기며 소외감을 느끼기도 하셨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의 결혼을 종용한 것도 안전하고 평온한 가정을 꾸리는 딸의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이 큰 한편, 그런 아들 같은 사위를 얻어 노후를 즐겁게 보내고 싶은 바람 또한 없진 않았을 터.

아…… 그래서 준성이 썩 마음에 차지 않으셨던 건가.

그제야 아버지의 마음을 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술도 못하고, 싹싹하지도 않고, 배경은 너무 거창한 사위와 친해지기 어렵겠다고 생각하셨던 거다.

그래서 이 자리의 어색함을 상쇄해 줄 수혁까지 불러들였던 거고.

더불어 준성 쪽에서 좀 더 마음을 열고 다가와 주길. 난 딸의 친구와도 친근하게 잘 지내는 사람이니 사위인 자네와는 더 가까이 지낼 수 있지 않겠냐, 뭐 그런 걸 보여 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여간 못 말려요, 정말.”

왜 그리 엉뚱한 짓으로 사람 속을 뒤집나 했더니만, 그 속내를 알고 나니 남는 건 헛웃음뿐이었다.

‘그래도 엄마가 보기에 저 정도면 엄청 마음에 들어 하시는 거 같은데?’

‘열심히 분위기 잘 풀어 놨으니 이제 밤새 오붓하게 대화 나누면서 친해질 차례잖아. 그러라고 내가 핑계까지 대면서 피해 주는 건데.’

‘그리고 내 느낌인데…… 지금도 날 아주 싫어하시진 않는 거 같아.’

심지어 유치원생보다 유치했던 그 속셈을 몰랐던 건 저뿐이었나 보다. 그제야 모든 퍼즐이 착착 들어맞는 기분에 어이도 없고, 그런 아버지가 이제야 편히 좋아하시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하기도 했다.

“아버님 많이 피곤하십니까?”

“아니, 왜. 잠이 안 오는가?”

“네. 오랜만에 바둑알을 잡아 보니 재미도 있고요. 괜찮으시면 한 판 더 두실까요?”

“그럴까?”

벌써 12시에 가까운 시각이었지만 한껏 밝아진 평식의 목소리엔 기운이 넘쳤다. 그런 아버지와 함께 다시 바둑판을 세팅하던 준성이 슬쩍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도 지루함은 없어 보이는 게 진심으로 이 순간을 기꺼워하는 게 보였다.

“그럼 난 먼저 들어가 자야겠네. 아빠, 너무 오래 붙잡고 있진 마세요.”

“그거야 결과가 나와 봐야 아는 거고. 안 그런가, 송 서방?”

“네. 난 괜찮으니까 걱정 말고 쉬고 있어.”

“어우, 이젠 완전 둘이 한패지?”

그렇게 불만을 토하거나 말거나.

아주 기분이 좋은 듯 껄껄 웃음을 터뜨린 평식이 이어 준성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이번엔 봐주지 말고 제대로 실력 발휘 하게.”

“……역시 전 아직 멀었습니다.”

나직하게 대꾸하는 준성의 입가로 멋쩍은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렇게 다시 대국에 집중하는 두 남자를 바라보며 잠시 흐뭇한 웃음을 짓던 수진은 조용히 제 방으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이러다 밤을 새우겠지 싶었지만, 이제야 서로에게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 두 남자에겐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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