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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2화 (89/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에필로그 2화

“네 아버지가 겉보기엔 성격이 둥글어 보여도 실은 낯가림이 심하셔. 동네나 학교에서야 죄다 같은 지역민들이니 잘 지내시는 거지. 과묵한 데다 술도 즐기지 않고 집안까지 어마어마한 예비 사위면 아주 어려운 상대야. 단둘이었으면 아마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 하셨을 게다.”

“와, 못 믿겠어. 아빠가 정말 그러신다고?”

작은 쟁반을 챙겨 온 차 여사가 다시 나직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다른 것보다 딸 가진 부모 마음이라는 게 있어. 시대착오적인 마인드라곤 하지만, 아직은 세상이 그렇지. 행여 그 집안에서 내 딸이 기죽어 지낼까 봐. 마음고생만 시켰다면 봐라, 하고 지레 센 척하시는 거지.”

“…….”

“뭐, 하나밖에 없는 딸 냉큼 데려가겠다는데 보내기 아쉬워서 괜히 더 심술부리시는 것도 있고.”

차 여사는 따뜻한 꿀차 세 잔을 쟁반 위에 가지런히 올리고는 힐끗 그녀를 바라봤다.

“그렇지 않아도 일하느라 바쁘다고 자주 보기도 힘든 내 딸인데. 이젠 시집까지 가겠다니 더 보기 힘들까 봐서.”

“뭐야. 누가 들으면 무슨 이민이라도 가는 줄 알겠어.”

“그게 딸 가진 부모 마음이라는 거야. 그래도 엄마가 보기에 저 정도면 엄청 마음에 들어 하시는 거 같은데? 앞으로 종종 놀러 오고 하면 또 금세 친해질 거니까 너무 걱정 마.”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에 쟁반을 쥐여 주더니 슬슬 아버지의 술자리를 끝내라는 듯 거실을 향해 눈짓했다. 조용히 그것을 받아 든 수진이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지만, 누구보다 지혜로운 차 여사의 조언이니 조금은 믿어 봐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 * *

“그럼 아버님, 어머님.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돌아갈 때가 된 수혁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아버지의 얼굴엔 못내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내일도 일이 있다는 말에 더 잡지는 못하셨다. 재빨리 따라 일어난 수진이 준성의 어깨를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잠깐, 같이 나가. 아빠, 저희도 수혁이 가는 거 배웅할 겸 바람 좀 쐬고 올게요.”

그렇게 우르르 집을 빠져나온 세 사람은 한적한 시골길을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오늘의 술자리를 예상한 수혁은 차를 가지고 오지 않았기에 마을 입구에 위치한 버스 정류장으로 콜택시를 불러 놓은 상태였다.

“뭘 여기까지 따라오고 그래? 어련히 알아서 잘 들어갈까.”

“누가 너 걱정해서 그래? 술에 떡이 돼서 돌아다니다 어디 논두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으면 주인 심장 마비 올까 봐 그렇지. 바래다줄 때 고마운 줄 알아.”

“너 말에 아주 가시가 겁나게 박혀 있다? 왜, 내가 오늘 아버님 사랑 듬뿍 받아 가 버려서 속이 좀 불편해?”

내내 품고 있던 불만을 차마 말로 꺼내진 못하고 툴툴거리다 정곡을 찔린 수진이 눈을 흘겼다. 그런 수진의 반응에 웃음을 터뜨린 수혁이 이번엔 준성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물었다.

“뭐, 예정에 없이 갑자기 내려오게 돼서 그럴 수도 있겠다만, 그래도 그렇지. 준성이 너 너무 긴장하고 있는 거 아니냐? 이렇게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는 꼴은 처음 본다? 너도 이럴 때가 있……기야 하겠지. 암.”

뭔가 대꾸하는 대신 묵묵히 바라보는 준성의 눈빛에서 ‘죽고 싶냐.’는 질문을 읽어 낸 수혁이 말끝을 흐리며 후다닥 멀어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수진의 입가로 기막힌 헛웃음이 떠올랐다.

보아하니 종일 아버지 곁에 달라붙어 보란 듯 친분을 과시하던 목적이 뭔지 알 만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사람 속 뒤집는 재미로 사는 녀석이었다.

“친구가 돼서 도와주진 못할망정 일부러 우리 아빠랑 더 친한 척하면서 사람 놀린 거야? 니가 그러고도 친구니?”

“어허, 놀리다니. 그게 아니지. 난 어색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 주려고 이 한 몸 딱 희생한 건데.”

“그래서, 종일 우리 아빠랑 준성이는 제대로 대화 한번 못 해 보고 아까운 시간만 다 흘려보낸 상황이고요?”

“쯧쯧, 이렇게 생각이 짧아서야. 열심히 분위기 잘 풀어 놨으니 이제 밤새 오붓하게 대화 나누면서 친해질 차례잖아. 그러라고 내가 핑계까지 대면서 피해 주는 건데.”

정말 말이나 못하면.

한마디를 안 지고 둘러대는데 그 말이 또 그럴듯하게 들려서 기막혔다.

“마침 저기 택시 오네. 자, 그럼 난 이만 간다. 부디 내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아버님과 많이 친해지길 빌어 주마. 그럼 수고.”

“어휴, 정말. 끝까지 매를 벌지?”

주먹을 불끈 쥐며 덤벼드는 수진을 가볍게 피해 버린 수혁은 때마침 앞에 멈춰 선 택시로 냉큼 올라타더니 그대로 휭하니 떠나 버렸다.

닭 쫓던 개도 아니고. 멀뚱해진 수진이 한숨을 푹 내쉬자 조용히 곁으로 다가선 준성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우리도 좀 걸을까?”

여느 때와 다름없어 보이는 준성의 얼굴을 확인한 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동네를 멀리 도는 길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둑한 가로등이 띄엄띄엄 서 있는 작은 오솔길을 걷는 사이 선선해진 밤공기 사이로 웃자란 풀과 젖은 흙의 냄새가 섞여 들었다. 여름이 끝나 가는 냄새였다.

찌는 듯한 습기가 걷혀 나간 공기는 아주 산뜻했고, 환하게 비치는 달빛 아래 크고 작은 주택이 드문드문 모인 마을의 풍경은 제법 운치가 있었다. 한동안 손을 맞잡은 채 말없이 걷기만 하는 준성을 흘깃 바라본 수진이 조금 멋쩍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여간 수혁이 쟨 도움이라곤 안 된다니까. 알지? 예전에 우리 아빠 쓰러지셨을 때 수혁이가 와서 도와준 적 있다는 거. 그때 이후로 아빠랑 친해지긴 했는데, 진짜 저 정도는 아니었단 말이야. 대체 오늘따라 왜들 그러는 건지…….”

주절주절, 말이 길어지자 가만히 듣고 있던 준성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왜 네가 변명을 해?”

“그야 뭐……. 오늘 너 기분도 저조해 보이고 그래서. 애초에 여기 온 것도 우리 아빠한테 속은 거잖아. 기분 나빴지?”

“전혀. 기분 나쁠 일이 뭐가 있어.”

“그런데 왜 종일 말이 없었던 거야? 잘 웃지도 않고.”

그런 준성을 신경 쓰느라 저는 종일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정작 그는 대답 없이 웃기만 한다.

“설마 진짜 긴장해서 그런 거야?”

“응.”

“헐. 진짜? 너도 긴장이란 걸 하는 사람이었어?”

“무슨 소리야. 나도 사람인데 당연하지.”

아무렇지 않게 실토한 그가 잡고 있던 손을 당기며 걸음을 멈췄다. 그대로 끌려간 여자의 몸이 휙 돌려지며 그와 마주했다. 멋대로 그녀를 마주 세운 그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 지으며 남은 손을 마저 붙잡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낳아 주신 분들께 더 잘 보이고 싶어서. 나 스스로 그런 마음에 부담을 느꼈던 거 같아.”

“…….”

“나도 이런 적은 처음이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차분히 이어지는 말에 어쩐지 심장이 일렁였다.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라곤 없는 이 남자가 모든 걸 감수하고 맞춰 주려 했다는 사실이 조금 기뻤고, 아주 많이 미안했다.

“미안. 괜히 고생시켜서.”

“고생은 무슨. 그리고 네가 사과할 일도 아니잖아.”

“그래도. 바로 옆에 있으면서 전혀 도와주지 못했으니까.”

좀 더 단호하게 아버지를 제지했어야 했는데. 사랑받고 싶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기분이 어떤 건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 괜히 상황을 더 나쁘게 할까 봐. 그런 분위기를 수습하기 힘들까 봐, 너무 소극적으로만 대처했던 게 후회스러웠다.

그런데 정작 준성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불쑥 입을 열었다.

“우리 어머니께서 널 프런트로 보내셨을 때 말이야. 그때 넌 내가 원망스럽거나, 혹은 알아서 뭔가 해 주길 바랐어?”

“아니. 전혀. 그런 거 절대 바라지 않았어, 난.”

“그래, 알아. 그때 네가 했던 말도 다 기억하고 있고.”

‘나 정말 괜찮아. 준성아. 그러니까 그렇게 미안해하지 마.’

미안해서, 괴로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제 앞에서 그녀가 툭하니 꺼낸 말이었다. 깊은 좌절감에 몸부림치는 순간에도 그녀는 끝내 제게 도움을 청하진 않았다. 당시 누구보다 힘든 상황에서. 이 일을 어떻게 극복할지 고심하면서도, 끝내 제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애써 밝은 태도로 허세를 부려 보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

“아버님이 지금 날 환영해 주시지 않는다 해도, 그런 일로 널 원망하거나 하지 않는다고. 그러니 네가 미안해하지 마. 이건 나 스스로 노력하고, 극복해야 할 일이니까.”

단호하게 잘라 낸 준성이 그녀의 뺨을 툭 건드렸다.

“그리고 넌 더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 어머니에게 인정받았잖아. 그만큼이나 노력해서 결과를 만들어 냈는데 그런 네 앞에서 부끄럽지는 말아야지.”

온전히 제 행적을 인정해 주는 말에 쑥스러워진 수진이 작게 웃었다. 당시 마음고생이 많았던 건 사실이었지만, 이미 지난 일이 되어 버린 지금으로서는 두고두고 회자하며 웃을 수 있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나야 운이 좋았지. 솔직히 어머님께서 훨씬 관대하고 통이 크실걸? 그러니 날 제대로 알아주시려 한 거잖아. 그런데 우리 아빤…… 딸인 나도 잘 모르겠어. 가끔은 진짜 이해가 안 가는 이상한 고집을 부리실 때가 있어서.”

“꼭 이번이 아니어도 언젠가 또 기회가 있을 거야. 어차피 이젠 좋든 싫든 날 가족으로 받아들이셔야 할 텐데. 평생 이렇게 찾아뵙고 또 찾아뵙다 보면 어쩔 수 없어서라도 마음을 열어 주시지 않을까?”

“흠…… 그러려나?”

“그리고 내 느낌인데…… 지금도 날 아주 싫어하시진 않는 거 같아.”

태연히 이어지는 말에 수진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이젠 당연하다는 듯 결혼을 이야기하고 가족이 될 것임을 못 박는 그의 말에 새삼스럽게 행복해졌다.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는 가족으로 살아갈 거라 장담하는 그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고마워. 그렇게 생각해 줘서.”

“고맙긴. 부부끼린데 당연한 일이지.”

아직 날도 잡지 못했는데 호칭은 벌써 정리가 끝나 버린 남자다. 자연스럽게 마주 보던 두 사람에게서 동시에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서로를 끌어안은 채 가볍게 입을 맞추고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의 머리 위로 깊어 가는 늦여름 밤의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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