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방 잡을까요?
에필로그 1화
신은 인간에게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고난만 준다고 했던가.
그러나 이 역시 무신론자인 수진에겐 전혀 해당 사항이 없는 일이었나 보다. 그러지 않고서야 도저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지금의 광경을 떡하니 제 눈앞에다 선사해 줄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아아, 참으로 잔인한 신이시여.
“자, 한 잔 더 받고. 잉? 송 서방 아직 잔이 그대로네? 쯧쯧. 술이 그리 약해서 쓰나. 아, 사내로 태어났으면 이 정도야 거뜬해야지.”
술병을 든 채 눈앞의 남자를 채근하는 아버지도.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배움이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독한 과실주를 못 견디고 결국 낮게 기침을 하며 송구스러워하는 내 남자도.
“자자, 너무 섭섭해하지 마시고요. 대신에 제가 받겠습니다, 아버님.”
눈치 없이 능청스럽게 끼어드는 십년지기 친구 녀석도.
하나같이 현실감이 없어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아니, 이건 꿈에서도 겪어 본 적 없었고, 겪고 싶지도 않았다. 단언컨대 이보다 괴상한 조합이 세상에 존재할까.
“허허, 그렇지. 역시 우리 수혁이가 뭘 좀 알아. 남자라면 확실히 이런 맛이 있어야지.”
“저야 늘 사내답지 않았습니까, 하하. 아버님도 한 잔 받으셔야죠.”
“그래, 그래. 우리 수혁이가 주는 건데 받아야지.”
심지어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얌전히 앉아 있는 준성에게 보란 듯이 친분을 과시하며 부어라 마셔라 쿵짝이 맞는 아버지와 수혁을 보고 있자니 이젠 슬슬 부아가 치밀었다.
아니, 정작 오늘의 주인공은 따로 있는데 사람 왕따 시키는 것도 정도가 있지.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사이가 돈독하셨다고 이리 오버들이냐고!
성큼성큼 거실로 들어선 수진이 들고 온 과일 접시를 쾅!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자 사이좋게 잔을 채우던 아버지와 수혁이 흠칫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 틈을 타 수혁의 손에 들려 있던 술병을 휙 빼앗아 들었다.
“이제 그만 드시고 곱게 대화만 좀 하세요, 아빠. 지금 이게 몇 병째인 줄 알기나 하세요?”
“어허, 이 녀석이. 아, 하나뿐인 딸내미가 사윗감을 데려왔는데 당연히 애비가 술 한잔 먹여 볼 수도 있지! 자고로 남자는 술을 먹여 봐야 안다고, 결혼 전에 술버릇이 어떤지도 봐야…….”
“술버릇이고 뭐고, 애초에 그렇게 마실 일도 없고 그렇게 마시지도 않아요. 지금 아빠는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일에 열을 올리고 계신다는 뜻이에요!”
“아니, 왜 술을 못 마셔? 사내놈이 술도 좀 할 줄 알아야 사회생활도 잘하고…….”
“요즘 세상에 그렇게 술 먹이는 회사 있으면 뉴스에 날걸요? 그리고 자꾸 사내놈이 어쩌고 하시는데 술에 남자 여자가 뭔 상관이에요? 그렇게 따지면 내가 수혁이보다 술이 더 센데 나는 아주 사내대장부게요?”
“아, 당연히 사내대장부보다 낫지, 내 딸은. 고등학교 때부터 아빠 술친구 해 주느라 술도 잘 마시고, 사회생활도 잘하고…….”
“그건 자랑이 아니잖아요, 아빠!”
“알았다. 그러니까 딱 이거까지만. 자자, 송 서방도 잔 들게. 어른이 주는 건 거절하는 거 아니라네. 일단 받아 놓기만이라도 해야지.”
“네. 알겠습니다.”
“어우! 정말!”
아무리 타박하고 말려 봐도 그러거나 말거나.
어느새 제 손에 들린 술병을 뺏어 든 아버지가 다시 준성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는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반듯한 자세로 앉아 얌전히 술잔을 내밀고 있었지만, 그 얼굴에 웃음기라곤 전혀 없다는 게 몹시 마음에 걸렸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완전히 굳어 버린 얼굴은 보는 제가 심장이 얼어붙을 만큼 무서웠다. 이 상황이 그에게 미안해 죽겠는 건 둘째 치고, 그 특유의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다는 사실이 딱 불안해서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런 제 속도 모르고 또다시 흥이 올라 있었다. 멋대로 술잔을 가득 채워 놓고서 킬킬거리는 아버지를 힐끗 노려봐 준 수진은 더는 못 말리겠다는 듯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아버지의 건강도 걱정이고, 후환이 두려운 것과는 별개로 이렇게 들떠 계시는데 더 이상 면박을 줄 수 없는 제 효심이 개탄스러울 따름이었다.
늘 그렇듯이, 이 황당한 상황을 만들어 낸 건 아버지였다.
‘네? 아버지가요? 병원은요?’
― 그건 죽어도 싫다 하시는데 어떡하니. 감기인지 뭔지 열이 펄펄 끓기에 일단 해열제 드시게 하고 누워 있으라 했지. 근데 계속 끙끙 앓으시잖아. 안 그러던 분이 이러고 있으니 내가 걱정이 돼서……. 미안하다 엄마가.
‘아니야, 뭐가 미안해. 잘했어요, 엄마. 지금 바로 준비하고 출발할 테니까 아버지 상태 어떤지 보고 계세요. 금방 갈게요. 혹시라도 저 도착 전에 너무 나빠진다 싶으면 바로 119 부르시고요. 저 지금 출발해요, 끊어요.’
한창 일에 몰두해 있을 금요일 오후, 느닷없이 어머니, 차 여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무소식을 희소식이라 여기며 바쁜 딸의 삶을 조용히 응원해 주시던 분이었기에 이미 그 이름을 확인했을 때부터 불길한 느낌이 엄습했었다.
어쨌거나 이젠 그때처럼 당황해서 정신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침착하게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버스 정보를 검색하며 호텔을 나섰다. 퇴근 때를 두 시간쯤 앞둔 시각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준성이 정문 앞으로 차를 끌고 나타났다. 얼떨떨한 얼굴로 선 그녀를 차에 태우고 출발한 준성은 아무렇지 않게 본가의 주소를 물어 그녀를 두 번 놀라게 했다. 이쯤 되니 슬슬 이 남자가 무서울 지경이었다.
‘솔직히 말해 봐. 대체 내 옆에다 첩자를 몇이나 깔아 둔 거야?’
진지하게 물었지만 돌아온 건 다정한 웃음뿐이었다.
‘너무 걱정 마. 아버님 괜찮으실 테니까.’
‘…….’
‘내가 있잖아. 그러니까 마음 편히 쉬고 있어. 퇴근 시간 전이라 좀 밟으면 금방 도착할 거야.’
이 순간 이렇게나 든든하게 저를 지탱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의 말대로 이젠 저 혼자 아등바등 발버둥을 치지 않아도 되는 거였다. 모든 책임을 혼자 짊어지며 버티지 않아도 이제 어느 때건 제게 달려와 함께 고민하고 먼 길을 달려가 줄 사람이 있었다. 그 사실을 실감하자 바짝 긴장했던 어깨에 힘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아빠!’
‘어, 왔냐?’
그런데 정작 마주한 아버지는 너무도 멀쩡히 거실 소파에 앉아 계셨다. 눈물이 글썽해 뛰어 들어간 자신이 민망할 정도로 건강한 모습이었다.
‘아니, 아프시다면서요? 자리에서 못 일어난다며?’
‘큼. 아침부터 감기 기운이 있길래 일찍 퇴근하고 들어와서 낮잠 좀 잤다. 뭐 죽을병이라고.’
기막힌 대꾸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이게 어떻게 돌아간 상황인지, 더 묻지 않아도 눈으로 본 것처럼 머릿속에 그려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런 거짓말로 날 속여서 여기까지 부른 거라고요? 심지어 엄마까지 짜고서?’
‘거짓말이면 또 어떠냐. 어차피 금요일인데 애비가 딸내미한테 연락 좀 할 수도 있는 거지.’
도리어 핀잔하듯 중얼거리는 말에 수진은 조용히 뒷목을 잡았다.
예정대로라면 날이 좀 선선해질 9월 중순쯤에나 준성과 함께 정식으로 인사를 전하고 제 결혼에 대한 이야기도 나눌 생각이었다. 이미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전하긴 했지만, 하필 시즌이 시즌인지라 시간을 내기 힘들어 부득이하게 결정된 일이었다.
분명히 알아듣게 설명을 드렸고 흔쾌히 알았다, 하고 대답하시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한데 어떻게 이렇게 뒤통수를 때리시나.
올해 정년을 맞이하시게 될 아버지, 김평식 교장 선생님은 아주 청렴결백하고 성실한 분으로 이 지역 주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아 온 분이셨다. 학생이건 교직원이건 가릴 것 없이 가족처럼 챙기고 존중하며, 누구와도 유쾌하고 즐거운 웃음을 나눌 줄 아는 이 멋진 아저씨에게 한 가지 단점이라면, 그 유쾌함이 지나쳐 가끔은 막무가내로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아니, 그 역시도 대외적인 이미지 탓에 조금 희석되어 보이는 것일 뿐.
사실 딸인 제 눈으로 바라본 아버지는 종종 철이 없고, 이상한 데서 똥고집을 부리다 어머니에게 등짝을 맞기도 하는 그런 분이시라는 걸 그만 깜빡 잊고 있었다.
‘그럼 그냥 차라리 시간 좀 빨리 내 볼 수 없냐고 물어나 보시든가! 그럼 어떻게든 조율이라도 해 봤을 거 아니에요? 걱정돼서 같이 와 준 사람한테 이게 무슨 민폐냐고요.’
‘어, 왔는가? 거, 기왕에 왔으니 같이 식사라도 하고 가든지.’
‘아빠 정말……!’
미안한 기색은커녕, 뒤따라 들어온 준성에게 인사를 받고는 태연히 식사까지 권하는 아버지가 기막혀 한 소리 하려던 때였다. 갑자기 목을 쭉 뺀 아버지가 마당이 있는 쪽의 창밖을 흘깃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또 뭐가요?’
‘저 왔습니다, 아버님!’
기다렸다는 듯이 현관문이 열리더니 아주 익숙한 남자가 떡하니 들어섰다. 무심코 뒤를 돌아본 수진이 기겁하며 눈을 부릅뜬 순간, 한껏 밝아진 아버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 우리 수혁이. 마침 딱 왔구만.’
설마하니 멋대로 수혁을 불러다 놓았을 줄은 누가 알았을까. 그렇게 수혁이 능청스러운 얼굴을 들이밀었을 때, 준성의 얼굴에 순간 시퍼런 안광이 비쳤던 건 제 눈이 미쳐서 잘못 본 거라 생각하고 싶었다.
결국 빈 접시를 들고 돌아선 수진이 주방으로 들어서며 작게 분통을 터뜨렸다.
“어우, 정말 평소엔 눈치도 빠르면서 오늘따라 왜 저러는 건지 모르겠어.”
“왜, 차 군 때문에?”
때마침 식탁에 앉아 꿀차를 타고 있던 차 여사가 무심히 말을 받았다.
“몰라, 진짜. 기껏 여기까지 왔으면서 이럴 때 도와주면 좀 좋냐고. 거기서 지가 더 신나 가지곤 아빠랑 쿵짝 맞아서 놀고 있으면 어쩌자는 건데.”
“흠, 내가 보기엔 차 군 나름대로 열심히 돕고 있는 거 같은데?”
“저게 돕는 거라고? 누가 봐도 방해하는 거지. 그이가 원래 말이 없는 편이긴 한데, 오늘은 표정도 많이 안 좋단 말이야. 평소랑 느낌이 엄청 달라. 진중하고 착한 사람인데 괜히 상처받을까 봐 걱정돼 죽겠어.”
사랑받고 싶은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기분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였다. 한 회장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그때의 자신처럼, 그 역시도 제 아버지에게 상처받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간신히 그의 가족들에게 인정받고, 또 그와의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것만으로 다 해결되었다고 믿고 있던 자신이 너무 안일했던 걸까.
적어도 제 부모님은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저만 행복하다면 당연히 반겨 주실 거라 믿어 왔는데. 그 믿음이 이렇게 저를 배신할 줄이야.
“글쎄. 엄마가 보기엔 그렇게 마음 상해 보이는 얼굴이 아닌데? 긴장한 거 아닐까?”
“무슨 소리야. 쟤가 얼마나 간이 부은 앤데. 어디 가서 긴장하고 그럴 사람 절대 아니거든?”
“그건 모르는 일이야. 봐. 당장 네 아빠도 사윗감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 하잖아. 부담스러워서 아주 죽을 맛이라고 얼굴에 써 있어. 지금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걸?”
“뭐? 에이, 설마. 말도 안 돼.”
선뜻 믿을 수 없는 말에 의구심을 드러내자 웃음을 터뜨린 차 여사가 싱크대 앞으로 다가서며 말을 이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