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6/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86화

“아무래도 네 시아버지 되실 분이 애가 달아 더는 못 기다리실 모양이구나. 네가 복귀하자마자 만사 제쳐 두고 호텔에만 죽치고 있는 꼴 좀 보려무나. 내가 그걸 언제까지 보고 있어야겠니?”

그러고는 샐쭉한 눈으로 송 교수를 바라봤다.

“점심때 친지분들과 모임이 있으시다고 들은 거 같은데, 그 장소가 우리 호텔일 줄은 미처 몰랐네요.”

“내가 그랬던가요? 어째 요즘 통 기억이…….”

“명색이 교수님이란 분이 채신없게 벌써부터 며느리 될 아이 주변만 맴돌고 있어서야 되겠어요? 거기다 오늘은 모처럼 휴식 중인 큰아들까지 끌고 나와선.”

“허허, 요즘 집 안이 적적해서 그런지 가만히 있기가 고역이에요. 아마 준하도 그랬을 겁니다. 그렇지?”

“하여간 벌써부터 이러니 나중엔 또 얼마나 끼고 도실지. 안 봐도 눈에 훤하네요.”

능청스럽게 대꾸하는 송 교수를 지그시 노려보던 한 회장이 그대로 몸을 돌렸다. 로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그녀의 뒤로 한데 모여 위화감을 조성하던 수행원들이 우르르 따라붙었다. 그렇게 자리를 떠나 버리는 한 회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이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린 송 교수가 말을 이었다.

“이런. 회장님께서 이리 역정을 내시니, 아쉽지만 오늘 점심은 미뤄야겠네요. 대신에 회장님 말씀대로 수진 양이 한번 집에 들러 줘요.”

“아, 네, 교수님.”

이래저래 당혹스러운 일로 약간의 패닉 상태였기에 또다시 습관처럼 내놓은 대답이었다. 역시나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한쪽 눈썹을 실그러뜨리며 웃던 송 교수가 툭하니 말했다.

“그리고 앞으론 아버님이라고 불러 주면 좋겠어요.”

대체 여기선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걸까.

웬만큼 사람 상대하는 것에 이력이 난 그녀라도 선뜻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람 좋게 웃으며 걸음을 뗀 송 교수가 저만치 멀어진 한 회장의 행적을 쫓아 로비를 가로질렀다.

“그럼 또 봅시다.”

내내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묵묵히 그 자리에 서 있던 준하가 무뚝뚝하게 덧붙이곤 송 교수의 뒤를 따랐다.

동시에 로비는 기묘한 정적에 휩싸였다.

프런트와 현관을 지키고 있던 직원들은 물론, 꽤 많은 손님들이 오가며 북적거리는 곳이었지만, 정말 이상하리만큼 소음이라곤 들리지 않았다. 직원들은 눈앞에서 보고 들은 일에 넋이 나가 멍해 있는 상태였고, 손님들은 유난히 포스가 느껴지는 한 회장 일행과 직원들의 태도를 보며 덩달아 숨을 죽이고 있었던 탓이었다.

여전히 얼떨떨한 상태로 한 회장 일행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고 있던 수진이 나직하게 물었다.

“……나 지금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거야?”

“우리 결혼을 허락해 주신 거로 이해한 거라면 제대로 맞췄는데.”

태연히 들려온 대꾸에 수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제 옆에 선 채 가만히 저를 내려다보는 남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축하해. 네가 해낸 거야.”

“아…….”

그의 입가로 떠오른 다정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발견하자 순간 눈물이 툭 터져 나왔다.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에 당황하며 얼굴을 가리자, 준성은 그대로 그녀의 어깨를 당겨 품에 안았다. 한순간 로비 전체가 크게 술렁였다.

“아니. 자, 잠깐만 이것 좀…….”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생각지도 못한 포옹 신을 선보이게 된 수진이 당황해서 그의 품을 벗어나려다 몰려든 시선을 감당 못 하고 움츠러들었다. 도저히 저 인파 속으로 제 얼굴을 드러낼 자신이 없다.

“잠시만 못 본 척해 주세요. 눈물 그칠 때까지만.”

거기다 불을 지르는 것도 아니고!

주변을 둘러보며 여유롭게 말을 건넨 준성이 싱긋 웃음을 머금었다. 완전히 도화선을 당겨 버린 그의 태도에 사방에서 꺄악! 대박! 어떡해! 따위의 비명 섞인 탄성이 이어졌다. 그리고 용감한 누군가가 큰 소리로 물었다.

“부사장님! 정말 부지배인님이랑 결혼하시는 거예요?”

“네. 저희 곧 결혼합니다.”

그 순간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곧 온 로비에서 와아! 하는 함성과 함께 우렁찬 박수 세례가 터져 나왔다.

“부지배인님! 정말 축하해요!”

“두 분 결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미쳤어, 미쳤어! 어떡해. 대박!”

“우우! 이럴 순 없습니다! 이렇게 두 분만 행복하게 보내 드릴 순 없습니다!”

더욱 커진 환호와 간간이 껴드는 야유 속에서 준성은 보란 듯 더욱 힘을 줘 그녀를 껴안고 근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우, 이제 어떡해. 나 이제 여기서 일 어떻게 하냐고.”

새빨개진 얼굴이 작게 한탄하며 살짝 품을 빠져나왔다가 도로 그의 가슴팍으로 숨어들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이 소란이 가라앉기만을 기다리던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도 결국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 * *

로비에서 있었던 일은 인트라넷을 통해 빠르게 호텔 전체로 퍼졌다. 친절한 누군가는 영상까지 남겨 놓았고, 그 영상에 선명히 담긴 ‘네. 저희 곧 결혼합니다.’라는 준성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남은 오후 시간은 정말 무슨 정신으로 보냈던 건지.

그녀는 가는 곳마다 평소의 몇 배는 되는 수군거림과 노골적인 시선을 받느라 아주 진땀을 뺐다. 하필 지배인님이 급한 일이 있어 자리를 비운 날이라 어떤 핑계로도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그 엄청난 입방아 속에 저를 향한 나쁜 말이 없어 다행이긴 했지만,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 철인 법. 귀에 피딱지가 앉도록 같은 소리를 듣고, 또 같은 질문에 답하고 답하다 보니 슬슬 부아가 치미는 것도 어쩔 수가 없었다.

아니 사고를 친 건 송씨 집안 남자들인데!

심지어 완전히 호텔을 뒤집어 놓고 떠나 버린 사람은 따로 있는데 뒷수습은 왜 내 몫인 거냐고!

“교수님, 아, 아니 아버님께서 그렇게 종종 찾으셨다는 걸 네가 정말 모르고 있었다고?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

그와 함께 퇴근하는 길, 달리는 차 안에서 내내 종알거리던 그녀는 신호가 걸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홱 하니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알잖아. 나 요즘 집에 잘 안 들어가서…….”

“아아, 호텔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손바닥 보듯이 꿰고 계시는 분이. 내가 하루에 화장실 몇 번 가는지까지 알고 계시는 대왕 스토커께서 내가 무려 일주일에 한 번씩 외간 남자를 만나고 있었는데 정말 모르셨다고요?”

역시나 씨알도 안 먹히는 변명이었나 보다. 결국 준성은 난처한 얼굴로 웃으며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 아버지께서 너무 즐거워하시기에. 차마 아들로서 거기다 초를 칠 수는 없잖아.”

“허. 허. 기가 막혀서 정말. 아니, 내가 그러다 실수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그런 짓을…….”

“네가? 그럴 리 없잖아.”

내내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웃기만 하던 남자가 이 순간만은 너무도 단호히 단정 지으며 잘라 낸다. 수진은 잠시 말문이 턱 막혔다. 아니, 대체 뭘 믿고 그렇게 말하는 거지? 만약의 경우라는 게 있지 않던가. 그런 실수 한번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리고 그 실수 한 번에 두 사람의 미래가 송두리째 날아가 버릴 수도 있는 판국인데!

그러나 준성은 아주 확신에 가득한 눈이었다.

“난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널 보여 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아주 오래전, 치매기를 보이는 할머니를 모셔 놓고 재잘재잘 이야기를 늘어놓던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어떤 사람에겐 별것 아닌 배려인데, 그게 어떤 사람에겐 평생의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잖아. 난 우리 호텔이 그런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총지배인이 되고 싶었던 거고. 너무 꿈같은 얘긴가?’

그녀가 꾸는 꿈의 근간이 곧 사람에 대한 배려임을 아는 그로서는 이런 일로 그녀가 실수를 할지도 모른다는 가정 따윈 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있는 그대로. 그녀 자체로.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마 이번에 큰형님과의 만남이 잘 지나갔더라면 다음은 둘째 형님이었을 거야. 지금도 너 되게 궁금해하고 있거든.”

“허!”

“그나저나 회장님한테 들켜서 더는 호텔에 못 온다는 걸 알면 실망이 클 텐데. 아, 하긴. 이미 한 번쯤 들렀다 갔을지도 모르겠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거든.”

한다는 말이 점점 가관이라 도무지 입이 다물어지질 않는다.

왠지 결혼이라는 말 앞에 함정이라는 단어가 생략된 듯한 이 느낌은 뭐지?

“아흐……, 나 정말 어떡해.”

절로 신음이 나왔다. 아무래도 얼굴만 닮은 줄 알았더니, 저 제멋대로인 성격이야말로 유전인 모양이었다. 예비 시아버지는 물론, 둘이나 되는 예비 아주버님의 존재감이 벌써부터 두통을 유발시키는 기분이다. 한 회장이라는 벽만 넘으면 다 해결될 일이라 생각했는데, 다른 의미로 막강한 장벽들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때마침 신호가 바뀌고 준성은 나직하게 웃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네가 이해해 줘. 실은 지금까지 이렇게 가족이란 것에 관심을 줘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라서 더 그래.”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살살 누르던 수진이 멈칫하며 준성을 바라봤다. 슬쩍 눈을 돌려 그녀를 바라본 준성이 다시 운전에 열중하며 말을 이었다.

“온 가족이 자기 일을 하는 데다, 아들만 셋인 집이니까 대강 알 만하지? 더군다나 우리 형제들이 유독 개인적인 성격이라 서로 더 모이기 힘든 분위기이기도 했고.”

무겁지 않게 설명했지만, 실상은 훨씬 심각했음을 그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그런 집안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변화의 물결을 가장 크게 감지하고 있는 것도 그 자신이었다.

집에 들어오는 날이 1년간 한 손에 꼽는다는 준하와 준영이 매일같이 집에 들락거리기 시작한 것도. 저녁마다 세 남자가 오순도순 앉아 식사를 하고 있더라는 말을 전해 들은 것도, 모두 수진이 한국에 돌아오고 난 다음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였다.

준성이 언제쯤 새사람을 데려와 인사를 시켜 줄 것인가.

그걸 기다리다 못한 송씨 부자들의 철없는 행동이 결국 한 회장에게 꼬리를 밟힌 것이었다.

“덕분에 다들 즐거운 모양이야. 그런 점에서 네게 고마워하고 있고.”

“……나 좀 진지하게 부담스러워해도 되는 거지?”

정색하는 그녀는 또 왜 이리 귀여운 건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그 부담스러운 분들과 잘 지내는 방법을 열심히 생각하고 있을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함께함으로서 달라질 인생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모두에게 사랑받으며 활짝 피어날 그녀와 그녀를 닮은 아이를 보게 될 날도 머지않았다는 게 새삼 믿기지 않아 더욱 행복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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