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5/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85화

막바지 휴가철이 한창인 8월 중순의 어느 날.

체크아웃 고객들이 한바탕 휩쓸고 간 1층 로비엔 간신히 여유가 찾아왔다. 오전 업무를 마무리하는 와중에 마지막으로 객실 정비 상태를 체크하고 관리부 직원에게 지시 사항을 남긴 수진이 한산해진 로비로 내려오자 컨시어지 데스크를 지키고 있던 윤 매니저가 웃으며 알은척을 해 왔다.

“수고 많으셨어요, 부지배인님. 오늘따라 이상하게 컴플레인이 많았네요.”

반갑게 부르는 목소리에 수진이 싱긋 웃으며 데스크로 다가섰다.

“그러게요. 날이 더워서 그러나. 기분 좋게 휴가 즐기러 오셔 가지고 왜 이리들 화가 많으신 건지. 그나저나 아까 레스토랑 예약 변경 건은 어떻게 됐어요? 서은 씨가 직접 모시고 이동한 건가요?”

“네. 아무래도 단체 고객분들이시라 소란이 커질까 봐 바로 움직인 거 같아요. 아, 그리고 5분쯤 전에 부지배인님 찾는 분이 계셨는데 바로 연락드리겠다고 하니 바쁘면 나중에 다시 오겠다 하셨어요.”

“저를요? 어떤 분이셨어요?”

“왜, 있잖아요. 지난달에도 오셨던 그 멋지게 생기신 할아버님이요.”

“아, 송 교수님이요? 혹시 지금 어디 계시는지 아세요?”

“호텔 밖으로 나가시는 거 같긴 했는데, 행선지가 어딘지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흠. 일단 전 프런트에 있을게요. 혹시 오셨는데 제가 못 보거나 반응이 늦으면 바로 콜 해 주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용건을 마친 수진이 프런트로 향하자 때마침 근처를 서성이던 직원들이 선망 어린 시선을 보내며 작게 수군거렸다. 자기들 딴엔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이는 거겠지만, 이미 이런 일을 수없이 겪어 본 그녀로서는 뻔히 제 이야기를 하고 있음이 뚜렷한 그녀들의 행동에 그저 헛웃음이 날 뿐이었다.

햇수로 3년. 정확히는 2년 6개월간의 뉴욕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지도 벌써 두 달째였다. 뉴욕 지사에서 근무하며 착실히 대학원 진학 준비를 마치고 이듬해 5월, 코넬대학 대학원에 입학해 MMH(Master of Management Hospitality)를 수료하며 호텔경영학 석사 학위를 따내고 귀국. 이후 객실부의 부지배인으로 발령을 받아 화려하게 복귀한 그녀는 현재 호텔 내 가장 핫한 이슈의 주인공이었다.

처음 그녀의 좌천 소식이 전해졌을 때만 해도 사소했던 사건은 회장님의 아들인 송준성 상무와의 열애 사실이 밝혀지며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이후 뉴욕행을 선택하기까지 근본 없는 괴소문이 자자했던 며칠 동안은 그야말로 제 얼굴 한번 보러 기웃거리는 사람들만 하루에 수십은 너끈했더랬다.

당사자가 뉴욕 지사로 떠난 후에도 한동안은 꽤 많은 이야기가 오갔으나, 더 이상의 떡밥이 수급되지 않은 탓인지 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리고 꽤 긴 시간이 흘러 돌아올 때가 되었을 무렵엔 슬슬 모두의 기억 속에서 제 이야긴 잊혔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귀국 직후, 갑작스러운 부지배인 진급이라는 파격적인 행보는 다시금 그녀를 화제의 중심으로 몰아넣었다. 그럴듯하게 오가는 무성한 추측 중에서 가장 유력한 건 그녀가 실은 뉴욕에서 재벌가 며느리가 되기 위한 수업을 받아 왔고, 조만간 준성과 결혼해 호텔을 물려받기 위한 과정의 일환으로 지금의 자리에 떨어진 거란 의견이었다.

‘진짜로 그런 거면 억울하지나 않지.’

정작 그녀는 뉴욕으로 떠난 이후 단 한 번도 한 회장에게서 긍정적인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는 게 함정.

며느리 수업은 무슨. 언젠가 준성이 했던 말처럼 처음엔 현지 생활에 적응하느라 피똥을 쌌고, 이후엔 MMH의 살인적인 학점을 따내느라 정말 머릿속이 하얗게 타 버릴 정도로 공부만 했던 기억뿐이었다. 그리고 돌아온 지 두 달이 지난 지금까지, 그녀는 저를 향한 호기심 어린 시선을 조용히 감내하는 중이었다.

“그럼, 다들 조금만 더 신경 써 줘요. 오늘은 날이 많이 찝찝해서 그런지 사소한 일로도 트러블이 많네요.”

“네, 부지배인님.”

프런트 데스크에 도착해 객실 현황을 살피고 유달리 말이 많았던 오전 업무 내용까지 체크하고 나니 꽤 시간이 흘러 있었다. 직원들에게 몇 가지 당부를 마친 수진이 뒤늦게 송 교수의 존재를 떠올리곤 혹시나 하고 눈을 돌렸을 때였다.

“어?”

때마침 호텔 입구로 들어서는 사람들 틈에서 건장한 체구의 송 교수를 발견했다. 서둘러 입구 쪽으로 이동한 수진이 뭔가를 찾는 건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송 교수에게 정중히 인사말을 건넸다.

“어서 오세요, 교수님. 다시 만나 뵙네요.”

“아, 여기 계셨네요. 내가 너무 자주 와서 귀찮은 건 아니죠?”

“그럴 리가요. 오늘도 숙박이신 거죠? 지금은 룸 정비 중이라서 바로 체크인은 힘드실 듯합니다. 혹시 다른 일정이 있으신가요? 그동안 제가 짐이라도 맡아 도움을 드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허허허, 아니. 아닙니다. 오늘은 그냥 근처에 일이 있어 잠시 들렀습니다. 우리 부지배인님 얼굴도 보고 괜찮으면 점심이라도 한번 사 주고 싶어서요.”

“어머, 그러셨구나. 저야 기억하고 찾아 주시는 것만으로도 영광인데요. 식사는 제가 대접해 드려야 할 일이고요.”

“사양하지 말아요. 오늘은 소개해 줄 사람도 있으니.”

“소개……요?”

“아, 마침 여기 왔네요. 여기다.”

뭐라 대응할 새도 없이 송 교수는 저만치 서 있는 남자를 손짓해 불렀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낯선 남자를 발견한 수진의 얼굴에 살짝 당황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꽤 오래전, 처음 송 교수를 만났을 때 들었던 말이 번개같이 머릿속을 스친 순간이었다.

‘아직 미혼인데 내 아들이지만 정말 괜찮은 녀석이거든. 소개 한번 시켜 주고 싶어서.’

아무리 봐도 이 상황은 그건데…….

수진의 당혹스러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송 교수는 만면에 웃음기를 띠운 채 말을 이어 갔다.

“일단 인사라도 해요. 이쪽은 내 아들.”

“처음 뵙겠습니다. 김수진이라고 합니다.”

차마 고객 앞에서 곤란한 내색을 할 순 없었던 수진은 먼저 인사말을 건네곤 제 눈앞까지 다가선 남자를 바라봤다. 꽤나 건장한 체격의 남자였다. 나이는 대략 삼십 대 후반쯤 되려나. 단정한 헤어스타일에 캐주얼이 가미된 세미 정장을 갖춰 입은 모습이었는데 전혀 더워 보이지 않았다. 차가워 보이는 금속 테의 안경 탓인지 꽤나 냉정한 인상이라 더더욱 그런 느낌이었다.

거기다 뭔가…… 굉장히 익숙한 느낌?

아니, 누군가를 굉장히 닮은 느낌이었다. 그것도.

“처음 뵙겠습니다. 송준하라고 합니다.”

송준성과 매우 닮아 있었다. 심지어 다크 모드 버전으로.

수진은 어안이 벙벙한 채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세상에. 사람이 이렇게 닮아도 되는 거야? 더군다나 성도 같고 이름까지 비슷한 것이 형제라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형이 둘 있다고 그러지 않았나?’

한 번도 소개받은 적 없고 사진 한 장 본 적 없었기에 사실 무슨 유니콘 같은 존재가 아닌가 싶긴 했다. 그러고 보니 그 형제들의 이름조차 들어 본 적이 없었고.

……에이, 설마.

“나랑 같은 학교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어요. 이놈도 송 교수라서 학생들은 작은 송 교수라고 부르긴 하는데, 뭐. 호칭은 차차 정리하도록 하고. 아, 어차피 크게 자주 볼 일은 없으려나? 허허.”

“그, 그런가요? 하하…….”

뭐라 대꾸를 해야 할지 몰라 애매하게 답하고 웃었다. 그러니까 이게 어떤 느낌이냐면, 뭔가 주변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나만 정황 파악을 못 하다 제일 먼저 죽어 나가는 공포 영화 속 엑스트라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교수님도…… 좀 닮으신 것 같기도…….’

방금 소개받은 남자를 가운데 두고 준성과 교수님을 양옆에 세우면 딱 그라데이션이 완성될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거기서 뭐 하세요, 아버지.”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수진은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굳었다. 절대 잘못 들을 수가 없는 내 남자 준성의 목소리인데, 들리는 단어의 조합이 그렇게 낯설 수가 없다.

“이런, 여기서 마주치다니…….”

겸연쩍게 웃어 보이는 송 교수의 시선을 따라 그녀의 시선도 옮겨 갔다. 그러고는 수많은 수행원들을 거느린 채 떡하니 버티고 선 준성과 그 옆에서 매서운 눈빛을 보내고 있는 한 회장을 발견했다.

왠지 머릿속이 새하얗게 바래졌다. 굳어 버린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습관적으로 움직인 몸이 공손히 양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게 했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부사장님.”

인사를 전하는 그 짧은 순간, 뒤늦게 수많은 생각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니까 여기 이 할아버님이, 아니, 송 교수님이라 불리던 분이 실은 내 남자의 아버지셨고, 저기서 무시무시한 눈으로 저를 쏘아보고 있는 회장님의 남편 되시는 분이로구나.

……난 그런 분을 그냥 인자한 할아버지 취급을 하고 있었던 거구나.

머릿속이 바래지다 못해 이젠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러고 보니…… 정말 닮았다. 가까이 두고 보니 완전 거푸집이 따로 없어.

한심하다는 듯 수진과 송 교수를 번갈아 바라보던 한 회장이 특유의 서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요즘 들어 왜 이리 호텔에 자주 드나드시나 했네요.”

“제 행적을 다 꿰고 계시나 봅니다, 회장님.”

“모를 수가 있나요. 여긴 제 안방이나 다름없는 것을요.”

한층 냉정하게 대꾸한 한 회장이 수진에게로 눈을 돌렸다. 단정한 태도로 한 회장을 바라보는 얼굴은 겉보기엔 꽤 평온해 보였지만, 잘게 흔들리는 눈동자며 하얗게 힘이 들어간 손끝에선 어지간히 긴장을 하고 있음이 역력했다. 그 사실을 가볍게 감지해 낸 한 회장의 입술이 슬쩍 치켜 올랐다.

“조만간 시간 내서 부사장이랑 함께 본가에도 좀 들러요. 대체 언제까지 안부 인사도 안 전하고 일만 할 생각이었니?”

“……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수진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시선은 분명 저를 향해 있는데, 그 내용은 제게 하는 말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비현실적이었다. 멍하니 눈만 깜빡이는 그녀 대신에 준성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그야 어머니가 저흴 초대해 주셔야 가는 거죠.”

“다 큰 녀석들이 언제까지 시키는 대로만 하고 살는지. 그리고 부사장은 사돈 되실 분들에게 인사는 드렸습니까?”

“좀 더 선선해지면 바로 찾아뵈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래서 식은 언제 올리려고요. 바로 준비해도 이것저것 챙기다 보면 시간 훌쩍 갈 텐데. 한시라도 빨리 식을 올려야 아이 낳고 다시 활동하기도 수월하죠. 최대한 빨리 시간 내서 찾아뵙도록 하세요.”

“명심하겠습니다.”

너무도 태연히 오가는 대화의 내용을 도무지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그녀에게로 다시 눈을 돌린 한 회장이 아까보다는 조금 누그러진 투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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