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방 잡을까요?
84화
입가에 어린 웃음기 탓인지 아까보단 누그러진 말투였다. 그런 얼굴로 흥미롭다는 듯 수진을 빤히 바라보던 한 회장이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이후의 절차는 윤 이사를 불러 진행하게 했다. 꼼꼼히 계약서를 작성하고, 서명까지 날인한 서류를 집어 든 수진이 회장실을 나선 후에야 한 회장의 입가로 지금껏 내보이지 않았던 흡족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런 한 회장을 흘깃 바라본 윤 이사가 슬그머니 덧붙였다.
“아무래도 저분이 정답을 선택하신 거 같네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그만 나가 봐요.”
“네. 알겠습니다.”
불퉁하게 내놓은 말에도 오랜 세월 한 회장의 곁을 지켜 온 윤 이사는 속지 않았다.
보이지 않게 웃음을 머금고서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윤 이사가 회장실을 나서자 괜히 못마땅한 듯 표정을 굳힌 한 회장이 다시 의자에 기대앉았다.
“뻔뻔하고 배짱 좋은 건 나쁘지 않군.”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슬며시 웃음기가 어렸다.
* * *
막상 모든 게 결정되고 나니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뉴욕에서의 생활에 필요한 건 모두 준비가 된 상황이었고, 심지어 한 회장은 출국 날짜까지 정해 놓은 상태였다. 어차피 자리를 비울 거면 하루라도 빨리 정리하고 떠나는 게 남은 이들에게도 도움 될 거라는 윤 이사의 조언에 따라 수진은 정확히 열흘밖에 남지 않은 날짜에 맞춰 준비를 마쳐야 했다.
부모님께 소식을 전하고, 나 과장과 수혁을 비롯한 지인들을 만나 사정을 설명하고, 모든 필요한 서류와 짐을 챙긴 후 마지막으로 집을 내놓기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는 동안 열흘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 버렸다.
“……끝까지 연락이 없네.”
그를 설득하려 했던 날, 끝내 그의 웃는 얼굴은 보지 못하고 헤어졌었다. 이후 그는 가끔 안부 메시지만 전해 올 뿐 달리 의견을 전하거나, 만나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가 생각을 정리하고 확실히 답을 해 주길 기다려야 하는 제 입장에선 차마 먼저 얼굴 좀 보여 달라고 할 수가 없었기에, 결국 그렇게 열흘 동안 생이별을 경험한 터였다.
“그렇다 해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무시하는 건데.”
이미 집에 있을 때 그에게 곧 출발할 거라 알리고 나선 참이었다. 혹시나 하고 전화를 걸어 봤지만 통화는 하지 못했다. 이후 공항에 도착해 수속을 마치고 자리를 찾아 앉는 몇 시간 동안에도 그는 끝내 연락을 주지 않았다.
물론 그로서는 쉽게 마음을 풀기 힘든 일이겠지만, 그래도 섭섭한 건 어쩔 수 없었나 보다. 결국 비행기에 오르고, 통 큰 한 회장님 덕분에 머리털 나고 처음 접하는 프레스티지석에 앉은 후였지만 심란한 마음은 사라지질 않았다.
정말 헤어지자는 건가. 그냥 이렇게 서서히 멀어지려 마음을 먹은 건가.
제가 양보를 하지 않으니 그 역시도 양보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렇게 지지 않고 고집을 부려 댔으니 정이 떨어질 만도 했지.
“어우 씨. 왜 자꾸 그런 생각만 해.”
생각이 마이너스극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눈물까지 찔끔한 수진이 얼른 눈가를 문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럴 리는 없었다. 정말 헤어질 마음이라면 차라리 대놓고 헤어지자 말을 했지, 이런 식으로 질질 끌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는데…….
“그런데 왜 연락이 없냐고.”
제 이런 결정이 그만큼 그에겐 상처였던 걸까.
그와 진정으로 함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는데, 이 방법이 그에게 상처만 준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이런 제 고집으로 인해 상처만 남고 얻는 건 없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눈물이 후두둑 흘러내렸다.
“아, 진짜 왜 울어. 뭘 잘했다고.”
흘러넘치는 눈물을 주체하지도 못하고 울먹이는 사이 누군가 옆자리로 들어와 앉는 기척이 났다. 잽싸게 눈물을 닦아 내며 창밖으로 눈을 돌리는데 어딘지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게 뭘 잘했다고 웁니까? 본인이 그리 고집부린 거면 후회는 하지 말아야지.”
순간 눈물이 도로 쑥 들어가 버리는 기분이었다. 수진은 뻣뻣하게 굳어 버린 몸을 움직여 제 옆자리를 확인했다. 너무도 낯익은 목소리. 절대 헷갈릴 수 없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느긋한 포즈로 자리에 앉아 빤히 그녀를 바라보더니 픽 웃음을 머금었다.
“회장님도 기왕 인심 쓰실 거면 퍼스트로 쓰시지. 애매하게 비즈니스는 뭐야.”
“너, 네가 여긴 어떻게……. 아니, 이 시간에 회사는 어쩌고?”
“당연히 휴가 냈지. 같이 여행하는 기분으로 비행기도 타 볼 겸, 내 여자가 살 곳이 어떤지 확인도 할 겸 해서.”
당당히 이어진 대꾸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휴가? 이 바쁜 시기에 뜬금없이 무슨 휴가?”
“음, 포상 휴가?”
과연 그 휴가를 결재해 준 사람이 누굴까.
역시나 싱긋 웃음을 머금은 준성이 거드름을 피우듯 턱을 조금 치켜들더니 태연히 대답했다.
“그 고생 하며 성과를 낸 나한테 내가 선물 좀 주겠다는데. 뭐 잘못됐어?”
그럼 그렇지.
기막힌 논리가 너무나 어처구니없는데 그런 와중에도 웃음이 난다. 더불어 이상한 안도감으로 온몸의 기운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기쁘다고 해야 할지, 화가 난다고 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는 기분에 울컥하려는 감정을 누르듯 아랫입술을 말아 물자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난 준성이 바로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다시 눈이 마주치면 또 눈물이 터질 것 같아 애써 외면하는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다정하게 말을 건네 왔다.
“아무리 섭섭했어도 그렇지. 간신히 생각 정리하고 왔는데 이제 내 얼굴 좀 봐 주시죠? 내가 그렇게 밉나?”
“아, 아니야, 그런 거. 그게 아니라 지금은 그냥 좀…….”
황급히 입을 열었다가 또 목이 메어 와 입을 다물었다. 기어이 흘러내린 눈물이 제 허벅지로 뚝뚝 떨어졌다. 그렇게 결국 아무 말 못 하고 울고만 있는 그녀의 어깨를 당겨 안은 그가 달래듯 등을 토닥였다. 나른한 웃음이 그녀의 머리맡을 스쳤다.
“큰일이네. 벌써 이렇게 눈물 바람인데 정말 나 없이 잘 살 수 있나? 밤마다 보고 싶다고 전화통 붙들고 우는 거 아니야?”
“뭐래, 정말.”
놀리는 듯한 말에 툭하니 그를 밀치며 품 안을 빠져나왔다가 이번엔 양팔이 붙잡힌 채 그를 마주 봐야 했다. 진지하지만 여전히 다정한 눈동자가 눈물 젖은 그녀의 눈가를 지그시 살폈다. 엉망이 된 얼굴도 그저 예뻐 죽겠다는 듯이 바라보던 그가 그녀의 양손을 굳게 잡았다.
“생각보다 시간은 금방 흐를 거야. 타국 생활이 만만치 않을 테니 다른 생각 할 겨를도 없을걸? 정신 좀 들 만하면 이미 귀국하는 비행기에 올라 있을지도 몰라.”
일부러 과장을 더한 말에 수진은 작게 웃음을 머금었다. 기다리는 입장인 그가 더 고통스러울 텐데, 이렇게 말해 주는 그가 고마워서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혹시 정 힘들거나 내가 보고 싶어 못 견디겠으면 언제든 말하고. 바로 달려갈게. 네가 원하면 일주일에 두 번 세 번도 움직일 수 있어.”
“……야, 그건 아니지. 그런 소리 하지 마. 누가 들으면 미친 줄 알걸?”
그건 완전 무리라고. 애초에 비행시간부터 개오버야.
그런데 정말 이 남자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아 수진은 정색하며 말을 끊어 냈다. 다시 말하지만, 이 남자는 홱 돌면 진심으로 위험해진다. 정말로 걱정되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태연히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한눈팔지 말고 열심히 공부만 하라는 뜻이야. 거기도 내 영역인 건 알지? 혹시 엉뚱한 놈이랑 눈이라도 마주쳤다간 바로 나한테까지 소식 전해지는 곳이니까 조심해. 그랬다간 그날로 바로 잡으러 간다.”
“어우, 정말.”
기어이 한다는 소리에 수진은 질렸다는 얼굴로 그의 가슴팍을 툭 때렸다. 가렵지도 않다는 듯 웃음을 터뜨린 그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하고 와.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게.”
“…….”
“여기. 네가 잡아 둔 방은 언제든 너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툭툭, 손끝으로 제 가슴팍을 두드려 보인 남자가 싱긋 웃었다. 결국 웃음을 터뜨린 그녀가 그의 품으로 뛰어들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대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은 그가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나른한 웃음소리와 함께 마주 닿은 입술이 이내 깊이 맞물렸다.
― 손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희 KS항공에 탑승하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저희 비행기는 뉴욕까지 가는 KS항공 142편으로…….
그렇게 애틋한 감정을 나누는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출발을 알리는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 *
“이제 슬슬 출발했겠네요.”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한 회장의 곁에 선 윤 이사가 툭하니 말을 건네 왔다. 대답 대신 흥, 하고 코웃음을 흘린 한 회장은 여전히 창밖에 시선을 둔 채로 오전 내내 곱씹던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만약 수진이가 뉴욕으로 가는 걸 선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셨어요?’
어젯밤, 자신을 찾아온 준성이 대뜸 꺼낸 질문이었다. 어떠한 확신을 가지고 꺼낸 질문임이 명백한 눈이었다.
이제야 그걸 깨닫다니. 이 녀석도 아직 멀었구나, 싶다.
‘그랬으면 영원히 탈락이었지. 그만한 계산도 안 되는 아이한테 우리 호텔을 맡길 순 없는 거잖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한 그녀의 앞에서 준성은 허,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그제야 이것이 한 회장의 시험이었고, 수진은 그 시험에 통과했다는 사실을 확신한 웃음이었다.
‘마음 놓을 거 없다. 그 애는 겨우 자격시험만 통과한 거지, 진짜는 이제부터야. 네 말대로 기회는 줬으니 제대로 증명할지 지켜봐 줄 생각이다. 이제부터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너나 그 애나 다음 기회는 없을 테니 그리 알아.’
‘고맙습니다, 어머니.’
그런데 들려오는 말이라니.
말문이 막혀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는 사이, 성큼 다가온 녀석이 그녀를 덥석 껴안았다. 정확히 초등학교 3학년 이후, 한 번도 제 품에서 느껴 보지 못했던 아들의 온기에 당황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불퉁한 말이 툭 튀어나와 버렸다.
‘징그럽게. 다 큰 녀석이 지금 뭐 하는 짓이니?’
그러면서도 그 징그러운 아들을 밀어 내진 못하고 어색한 손길로 등을 토닥였었다. 제대로 한번 안아 주지도 못한 사이에 장성해 버린 아들은 이제 제 어미보다 훨씬 커다란 품을 가지고 있었다. 그저 성실하다는 이유로. 강한 책임감을 타고났다는 이유로 원치 않는 것까지 모두 짊어지고 살아야 했던 아들의 품 안에 원하는 것 하나 정도는 안겨 줘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삶의 재미는 느끼게 해 줘야 하니까요. 그래야 목적의식도 생기는 법이니.”
절로 흐뭇하게 피어오르기 시작한 웃음을 감추려는 듯 표정을 굳힌 한 회장이 특유의 서늘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하여간, 아들 녀석은 잘 키워 봐야 결국 남의 남편밖에 안 된다니까. 안 그래요, 윤 이사?”
“그렇습니다, 회장님.”
뒤따르는 대꾸에 픽 웃음 짓던 한 회장이 쾌청하게 맑은 하늘로 눈을 돌렸다. 저 멀리 비행기처럼 보이는 하얀 조각을 지그시 바라보는 그녀의 입가로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