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방 잡을까요?
83화
차분히 운을 뗀 수진은 한 회장과의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최대한 자신의 입장과 의견은 배제한 채 그저 어떤 대화를 나눴으며, 결과적으로 어떤 제안을 받았는지까지만 아주 심플하게 털어놓았다.
설명이 끝난 후에도 준성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미 말을 꺼낸 시점부터 굳어 있던 얼굴은 시간이 꽤 지난 후에도 풀리지 않은 채였다.
그렇게 말이 없는 남자의 눈치를 살피던 수진이 얼른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어, 육수 다 끓은 거 같은데. 와, 채소 되게 신선해 보여. 고기도 꽤 많이 주네, 여긴. 그치? 맛있겠다.”
끓고 있는 육수에 채소와 고기를 넣고 익히며 애써 웃어 보였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어떻게든 누그러뜨려 보려는 노력이었다. 이미 이 일이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한 건 명백했지만, 여기서 그와 다투고 싶진 않았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제일 먼저 나한테 연락을 했어야지.”
그러나 노력이 무색하게도 이어진 준성의 목소리는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미리 이야기 못 해서 미안. 나도 갑자기 가게 되는 바람에 연락할 짬이 안 났어.”
약간 변명하듯 덧붙인 수진이 멋쩍게 웃었다. 연락을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고, 실은 당장에라도 그에게 전화를 걸어 도와 달라 하고 싶을 만큼 무서웠지만, 참아야 했다는 말은 이 상황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어쨌든 무사히 이야기 잘 마치고 왔고, 또…….”
“지금 그게 문제야?”
“…….”
“이미 넌 가는 쪽으로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데.”
아무것도 내색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너무도 정확히 제 생각을 꿰뚫어 봤다. 잠시 말문이 막혔던 수진이 이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준성아. 내 말 좀 들어 봐.”
“그런 말에 넘어가지 마. 이미 한 번 나하고의 약속도 깨신 분이야. 한 번 약속을 깨셨는데 또다시 깨지 말라는 법 없어.”
물론 그녀 자신도 지나치게 좋은 조건이 의심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제아무리 계약서를 쓰고 법적인 공증을 받는다 해도 이건 한 회장 측에서 이행하지 않으면 그만인 약속이었으니까.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법의 힘을 빌려 따지는 일뿐인데 거대 기업을 상대로 법적인 다툼이라니. 이미 그 시점에서 제 인생은 구겨진 휴지 조각이 되는 거나 다름없지 않나.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잖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회를 잡고 싶었다.
“나도 알아. 이건 너랑 나를 떼어 놓기 위한 방법일 뿐이라는 거. 외국에 나가 공부하는 게 쉽지 않은 것도 알고, 설령 회장님이 흡족해하실 만큼 결과를 낸다 해서 우리 사이를 인정해 주실 거란 보장이 없다는 것도 알아. 다 아는데, 그렇다고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으면 여기서 달라지는 게 없잖아. 어떻게든 뭐라도 해야…….”
“아니.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테니까. 방법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어. 지금 여기서 네가 내 곁을 떠나는 게 더 최악의 시나리오라고. 네가 회장님 말씀대로 따른다 해서 과연 회장님이 너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실 거라 생각해?”
“…….”
“3년이야. 그 시간이면 회장님, 충분히 너랑 나 어느 쪽을 공략해서든 완전히 남으로 만들어 버리고도 남을 분이고.”
또한 불같았던 감정이 식어 버리기에도 충분한 시간일 테지.
그 긴 시간이 주는 무게감이 너무도 컸기에 수진은 다시 말문이 막혔다. 한 회장에 대해서라면 저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이렇게나 완강히 만류하는 일이라면 정말로 아닌 걸까.
“어려운 생각 말고, 넌 그냥 내 곁에 있으면 돼. 일단 밥부터 먹자. 배고프겠다.”
다소 날카로운 투로 잘라 냈던 것과 달리 한층 부드러워진 말이 돌아왔다. 익은 고기와 채소를 건져 덜어 주고서 묵묵히 젓가락질을 시작한 남자를 바라보던 수진은 이윽고 꾹 쥐고 있던 젓가락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예전에 내가 이런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을 때 네가 그랬었잖아. 날 제대로 보여 드린 적도 없으면서 단정 짓지 말라고. 그리고 이번 인사 건이 터졌을 때도 당하고만 있지 말자고. 뭐라도 해서 상황이 움직이도록 만드는 게 낫다고도 했었고.”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성의 없이 움직이던 젓가락질이 천천히 멈췄다. 유난히 고운 남자의 손에 잠시 시선을 두던 수진이 눈에 띄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 말대로 이건 기회가 아닐 수도 있어. 알고 있지만 하고 싶은 거야. 아무것도 못 해 보고 그냥 네가 뭔가 해 주길 기다리고 있는 건 싫으니까. 열심히 발버둥이라도 쳐 보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 보고 나서 부당함을 논하는 게 나 스스로도 떳떳한 일이라 생각해.”
지레짐작하고 포기하는 건 대학 시절, 눈앞에서 차갑게 돌아서던 이 남자의 뒷모습을 본 것만으로 족했다. 더는 그런 식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정당하게, 내 힘만으로 인정받고 싶다고. 다른 누구의 힘을 빌려서가 아니라, 오직 내 능력만으로.”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기에 제 삶은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았다. 제 손으로 일군 결과물은 곧 자신의 긍지였다. 그 고집스러움은 제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차라리 욕심을 내지 않는 게 옳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 남자는 아니었다. 제게는 버거운 존재라는 걸 알면서도 도저히 포기가 되지 않았다. 포기하라며 내놓은 미끼마저도 나서서 물어 버리고 싶을 만큼 욕심이 났다.
그래서 실은 한 회장에게서 그런 제안을 받았을 때 가슴이 떨렸었다. 처음 서류를 받아 들고 내용을 확인했을 때 순간적으로 제 안에서 피어올랐던 환희가 제 진심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버릴 수 없어서 괴로웠던 꿈을 다시 꿀 수 있고, 이 남자와의 사랑을 당당히 세상에 보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걸 현실로 만드는 게 제게 떨어진 의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더 고집을 부렸다. 어렵게 만난 소중한 사랑인 만큼, 더더욱 확실히 인정받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내 자리 찾아내고, 회장님께도 꼭 인정받을 거야.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수진이 여전히 굳은 채 저를 보고 있는 남자를 마주 바라봤다.
“모두에게 축복받으면서 너랑 결혼할 거야.”
당당히 튀어나온 포부에 준성은 잠시 멍한 얼굴이었다. 몇 번이나 결혼을 언급했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은 적이 없었다. 부담을 느끼는 것도 같았고, 자신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녀를 설득하고 조르는 건 늘 제 몫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그녀가 스스로 저와의 결혼을 입에 올린 것이다.
“그땐 내가 너한테 청혼할게.”
더군다나 이런 귀여운 소리까지 내놓을 줄이야.
“하…….”
결국 준성은 나직하게 웃어 버렸다. 이런 반칙을 저질러 놓고도 그녀는 당당하게 저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다.
“그거 알아?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난 더 막을 방법이 없다는 거.”
사람을 이렇게 쥐락펴락하는 주제에 뭐가 떳떳하다고 그리 예쁘게도 웃는 건지.
“미안해. 난…….”
“알았으니 일단 밥부터 먹자.”
“준성아.”
“아무 말 하지 마, 지금은. 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냉정하게 잘라 내는 말에 순간 목이 메었다. 말없이 식사를 시작한 남자를 보며 수진은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입맛은 없었지만, 그를 불편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일단 먹는 시늉은 해야 할 것 같았다.
정적 속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란히 차에 오른 후에도 두 사람은 달리 말이 없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람을 붙잡고 눈치 없이 수다를 떨 수도 없었기에 수진은 차창 밖으로 눈을 둔 채 곰곰이 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도 두 사람은 침묵을 유지했다.
“고마워. 태워다 줘서.”
익숙한 길목에 들어선 차량이 멈춘 후에야 수진은 간신히 말을 밀어냈다. 아직도 긍정적인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 모양인지 어둡기만 한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제 마음도 착잡했다.
“나 이만 들어가 볼게. 운전 조심하고.”
애써 웃으며 말하곤 차에서 내렸다. 아무래도 설득에 실패한 걸까. 이러다 한 회장과의 일을 걱정하기 이전에 그와의 관계를 걱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을 떨쳐 내듯 씁쓸하게 웃으며 돌아서는데 운전석의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났다.
“수진아.”
차마 돌아보지도 못하고 걸음만을 늦춘 그녀의 등 뒤로 성큼 다가온 남자가 그녀를 붙잡았다. 이어 등 전체를 포근히 덮어 오는 온기에 또다시 눈가가 화끈해졌다. 이런 와중에도 그의 품은 너무도 넓고 따뜻했다. 머뭇거리며 올라간 손이 제 어깨를 감싼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내가 허락하지 않는다 해도 네 마음, 바꿀 생각 없는 거지?”
나직하게 귓가를 스치는 말에 수진은 고집스레 입술을 깨물며 눈을 감아 버렸다. 그렇게 끝내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내놓지 않는 그녀를 그는 한참 동안 말없이 품고만 있었다.
* * *
다시 찾은 한 회장의 집무실은 여전히 한기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온기를 품은 찻잔을 앞에 놓고서도 손도 뻗지 못할 만큼 긴장한 채 앉아 있던 수진이 가만히 시선을 들었다.
“미국으로 가겠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상석에 앉은 한 회장이 한쪽 입가를 슬쩍 올려 웃는다.
“그리고 헤어지지도 않을 거고요.”
불쑥 이어진 말에 한 회장이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더 해 보라는 뉘앙스에 수진은 신중히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이 건은 조건에 넣지 않으셨던 거로 기억합니다. 물론 회장님께서 바라시는 게 뭔지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미 체급부터 다른 싸움에서 철저히 불리한 제가 챙겨 드릴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생각해서입니다. 그리고 회장님께서는 이 조건에 크게 영향받지 않으시겠지만, 제겐 이 관계를 지키고 싶은 간절함이 제가 발전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 중이고요.”
“그러니까, 지금 내가 주는 혜택은 받고도 내 아들과 헤어지진 않겠다는 뜻인가요?”
“네.”
“허.”
나직하게 헛웃음을 짓는 한 회장의 앞에서도 수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어차피 미래의 일을 당장 알 수는 없으니까요. 어쩌면 회장님께서 원하신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고, 저희가 이 감정을 지켜 낼 수도 있겠죠. 어떤 결과가 나오든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에 맡겨 주셨으면 합니다.”
그다지 마음에 드는 말이 아닌지 소파에 깊숙이 기대앉는 한 회장의 미간으로 깊숙이 골이 파였다. 그 타이밍에 수진은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내 놓았다.
“대신에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인재가 되어 돌아오겠습니다. 회장님께서 제가 탐나 못 견뎌 하실 정도로요.”
또다시 한 회장의 입에서 헛바람 새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처구니가 없는지 몇 번이나 헛웃음을 짓던 한 회장이 한참 만에야 툭하니 입을 열었다.
“하긴. 굳이 떼어 놓지 않아도 그 정도면 긴 시간이죠. 수진 양 말대로 굳이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잘 해결될 가능성이 더 높은 건 사실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