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82화

도무지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알 것도 같은데 선뜻 믿기지가 않았다. 다시 시선을 내린 수진이 제 손에 들린 서류를 멍하니 바라봤다.

“이미 준비는 다 되어 있는 상황이니 남은 건 수진 양의 결정뿐이군요. 뉴욕 한복판에서 일을 해 보는 것만으로도 수진 양에겐 좋은 경험이 될 테지만, 이 제안의 진짜 목적이 그것이 아님은 알 테고.”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숨을 죽였다. 아무리 봐도 다시 봐도 이건 제게 스폰서십 유학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모든 직원들에게 그 기회가 열려 있다고 말은 하지만, 실상 아주 특별한 몇 가지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10년 정도 근속을 해 온 과장급 우수 사원들에게나 간신히 기회가 돌아오는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저도 뜻이 있었기에 줄곧 목표로 해 온 일이자, 제 꿈인 총지배인이라는 길에 다가서기 위해선 꼭 필요한 과정이기도 했기에 이번 좌천 건이 더욱 뼈아팠던 터였다. 이젠 꿈조차 꿀 수 없는 일이 되었구나 싶었는데, 이런 식으로 기회가 돌아올 줄이야.

“그곳에서의 생활비며, 수진 양이 대학원에 진학했을 시의 모든 학비 일체는 우리 호텔, 아니, 내가 직접 부담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만약 우수한 성적으로 장학금을 타 낼 경우에도 이쪽에서 약속된 자금은 모두 지원될 테니 할 수 있는 만큼 재주를 발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그것도, 지금껏 듣도 보도 못한 파격적인 조건과 함께라니.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상황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는 게 너무도 비현실적이라서 생각이 미처 따라잡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일단 내 제안은 여기까지고, 이젠 수진 양이 하기 나름이겠죠. 그곳에서 최고 수준의 대학에 진학을 하든, 적당히 학위만 따서 돌아오든. 진학에 실패해서 1년가량 뉴욕 연수만 채우고 돌아오든, 모든 건 스스로 결정하도록 해요.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세요.”

“…….”

“물론 각각의 경우에 따라 앞으로 수진 양의 미래는 많이 달라지겠죠.”

저 하기에 따라 미래가 달라질 수도 있다.

유독 깊숙이 박혀 오는 말에 수진은 저도 모르게 뛰어 대는 심장을 다스리려 애를 썼다. 지금의 그녀에겐 이것보다 달콤한 유혹이 없었다. 심지어 저 혼자만의 미래가 아니라, 준성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여지를 주는 것처럼 들리는 건 너무 상황을 긍정적으로만 보는 걸까.

“왜 대답이 없죠? 자신이 없다는 뜻입니까?”

차갑기 그지없는 질문에 수진은 순간 크게 숨을 들이켰다. 정신이 번쩍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맙소사. 무슨 기대를 한 거니?

정신적으로 너무 몰려 있던 나머지 뇌가 스스로 행복 회로를 돌리고 있었나 보다. 한 회장이 굳이 제게 이런 제안을 꺼내 든 목적이 뭔지는 그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나.

“이런 기회를 제게 그냥 주실 리 없다고 생각해서입니다.”

달콤한 미끼 안엔 날카로운 낚싯바늘이 도사리고 있는 법이다. 당장 배가 고프다고 그것을 덥석 물어 버렸다간 낚싯대의 주인에게 끝도 없이 휘둘릴 건 자명한 일.

처음부터 한 회장이 바라는 건 한 가지였다.

바로 저 자신이 준성의 곁에서 사라지는 것.

제 자리를 빼앗고, 겁을 주는 방식으로는 부작용이 컸으니 이번엔 직접 저를 회유해 원하는 걸 쥐여 주고 그를 포기하게 만들려는 것임에 분명했다. 그렇기에 한 회장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이 건을 성사시키려 할 것이다.

긴장으로 굳은 눈이 한 회장을 향했다. 여전히 의자에 기대앉아 있던 한 회장이 느릿하게 양손을 움직여 깍지 끼며 그녀를 마주 바라봤다.

“될성부른 인재에게 투자를 하는 건 늘 해 온 일이니 특별할 건 없습니다. 이 기회를 통해 수진 양이 내가 생각한 이상의 인재가 되어서 활약해 준다면야, 그건 내게도 나쁠 건 없는 일이죠. 만약 그런 인재가 못 된다면 기회비용만 버리는 일이겠지만, 그것도 내겐 그다지 큰 손해는 아니고.”

“…….”

“여기까진 표면적인 이유고.”

싱거운 말과 함께 말을 끊은 한 회장의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만, 난 수진 양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거예요.”

좀 더 확실하게 목적을 품은 말이 툭 던져졌다.

“현재의 수진 양은 얻어 낼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왜냐면 내가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당연하다는 듯 내놓는 말과 함께 그녀의 미소가 좀 더 뚜렷해졌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그녀를 바닥에 짓눌러 놓겠다는 의지가 깃든 말이었다.

“일단 이곳에 남아 있을 경우, 그 미래를 예상해 보죠. 최소 우리 호텔에서의 성공은 일찌감치 포기해야겠죠. 만약 여길 그만두고 떠난다 해도 이쪽 업계는 물론, 관련된 모든 직종에서 발붙일 수 있는 곳은 없을 거라 생각하세요.”

그런 것쯤이야 무서울 게 없다고 생각하고 싶은데, 이상하게 몸이 떨렸다.

“내 아들과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예요. 두 사람의 연애는 막지 못한다 해도, 결국엔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되는 걸 지켜봐야 할 겁니다. 설령 내 아들이 모든 걸 버리고 나가 수진 양을 선택한다 해도, 그렇게 내 아들의 삶을 망쳐 놓은 것에 대한 책임은 평생 지고 가야 할 거고요.”

이것 역시 그 사람과 함께라면 충분히 견뎌 낼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싶은데, 이미 머릿속은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한 채 망연해 있는 제 모습만을 덩그러니 그려 내고 있었다.

“미국으로 가든, 여기 머무르든 선택은 수진 양이 하면 됩니다.”

말은 선택이지만, 이건 가라는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멀리 떨어져 지내며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 식어 간다면야 나로선 그 이상 좋을 일은 없겠지요.”

그리고 이것이 진짜 한 회장의 목적일 터.

머리 위로 드리워지는 먹구름을 본 것만 같았다. 아무리 달려도 빠져나갈 수 없는 쳇바퀴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서서히 제 목을 죄여 오는 올가미의 감촉이 섬뜩했다.

“……생각 좀 해 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쿨하게 대꾸한 한 회장이 다시 의자에 깊숙이 기대앉았다. 승리를 직감한 듯 여유롭게 걸린 미소 앞에서 고개를 숙여 보인 수진은 그대로 회장실을 물러 나왔다.

* * *

오전 조 근무가 끝난 건 오후 4시쯤 되었을 때였다. 교대를 마치고 호텔을 나선 수진은 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호텔 주변을 멍하니 걷고 있었다.

어느덧 늦은 오후의 저물어 가는 햇살이 곱게 단풍 진 빛을 뿌려 대는 시각이었다. 사실 그냥 걷기엔 꽤 추운 때였지만, 시베리아 기단이 점령한 대기는 모처럼 미세 먼지 하나 없이 쾌청했고, 거센 바람도 없어선지 산책에 크게 지장은 없는 정도였다.

도리어 이만큼 춥기라도 해서 종일 바쁘게 돌아가느라 열이 오른 머릿속을 식힐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복잡한 상념 대신에 ‘어우, 춥다.’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올 무렵엔 퇴근 때가 되어 있었다.

“그럼, 이제 가 볼까.”

나직하게 중얼거린 수진이 사무 건물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안녕하세요, 김 비서님.”

“어? 어, 김― 주임님?”

잠시 제 호칭을 고민하던 기색이 역력한 김 비서의 대꾸에 수진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느닷없이 준성의 집무실 앞에 나타난 저를 보며 살짝 당황한 눈치였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은 건지 습관적으로 주변을 살피는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저와 준성의 관계는 호텔 전체에 소문이 날 대로 난 상황이다. 그렇지 않아도 저만치 보이는 부속실 직원들의 눈과 귀가 몽땅 이쪽을 향해 있는 게 느껴졌지만, 이젠 숨겨 봤자 의미도 없고 달리 껄끄러울 것도 없기에 수진은 당당했다.

“지금 안에 있죠? 들어가도 될까요?”

“아, 마침 상무님께서도 업무 마무리하고 계십니다. 이제 곧 나오실 거고요.”

“그럼 여기서 좀 기다리면 되겠네요. 김 비서님의 빠른 퇴근을 위해서 제가 빨리 데리고 가겠습니다.”

“하하…… 그건 고맙네요.”

싱거운 말에 김 비서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약 10여 분 후,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기다리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은 지시 사항을 전달하려던 건지 김 비서를 부르던 그대로 멈칫한 준성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어? 수진아.”

“생각보다 일찍 나왔네?”

생긋 웃어 보인 수진이 그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줄곧 이 관계를 숨기려고만 했던 수진이기에 이런 일은 상상조차도 못 해 봤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기쁘면서도 얼떨떨한지 그의 입가엔 웃음기가 만연하다.

“뭐야.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네가 여기까지 걸음을 다 하고.”

“무슨 일은. 그냥 너랑 같이 퇴근하려고 왔지. 가다가 저녁도 같이 먹고. 나 배고파. 빨리 가서 맛있는 거 먹자.”

애교 섞인 웃음과 함께 재촉하자 그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런 그녀가 예뻐 죽겠다는 듯이. 그저 사랑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듯이 짓는 웃음이 이상하게 가슴에 맺히는 것만 같아 수진은 더욱 아무렇지 않게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유유히 호텔 부지를 빠져나온 차량은 곧 복잡한 도심지로 접어들었다. 바로 밥을 먹으러 갈지, 아니면 집으로 갈지. 메뉴는 일식으로 할지, 한식으로 할지. 찌개가 좋을지, 면류가 좋을지 등등.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는 이야기가 오가다 결국 ‘국물만 있으면 뭐든 좋다’는 수진의 의견을 따라 두 사람은 가까운 샤브샤브 체인점으로 들어섰다.

메뉴를 주문하고, 뒤따라 나온 작은 솥에 담긴 육수가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두 사람은 시시콜콜한 하루의 일과를 늘어놓으며 키득거렸다.

“어휴 말도 마. 역시 오퍼레이션에서 접하는 진상은 그 농도가 다르다니까. 대신에 여긴 더 다양한 사람을 접하게 되니까 그건 좀 더 재밌는 거 같고.”

“되게 낙관적이네. 그런 진상을 만났는데도 웃음이 나와?”

“그렇다고 손님하고 계급장 떼고 맞장 뜰 수도 없잖아. 프런트면 우리 호텔의 얼굴이나 마찬가진데.”

짐짓 단호하게 말하는 게 제법이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뭐, 나중에 어디서든 반대 입장으로 만났으면 하는 작은 소망은 있지. 그땐 내가 아주 뼛속까지 그득하게 농축시켜 놓은 진상 짓을 아주 유감없이 발휘해 줄 거거든. 누구든 걸리기만 해, 그냥.”

뒤이어 덧붙인 말에 픽 웃어 버렸다. 말만 그렇지 정작 그런 일이 생기면 언제 그랬냐는 듯 아주 얌전히 제 할 일만 마치고 돌아올 사람이다. 아니, 그들의 고충까지 들어 주며 온갖 오지랖을 펼칠 가능성도 아주 없다곤 못 하겠다.

문제는 그런 그녀라서 더더욱, 못 견디게 사랑스럽다는 것뿐인가.

“매일 이렇게 너랑 같이 퇴근했으면 좋겠다.”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준성이 문득 생각난 소망을 내뱉었다.

면세점 건을 마무리하고서 모처럼 여유로운 때였다. 이미 다음 프로젝트 투입이 결정된 상태였지만, 지금까지처럼 급한 건은 아닌지라 한동안은 이렇게 퇴근 후 그녀와의 시간을 만끽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순간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바로 그러자는 대답을 할 수 없는 그녀의 사정도 이해했기에 준성은 다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알아. 오후 조나 야간 조면 택도 없는 거. 그 전에 어떻게든 널 다시 원래 자리로 돌려보내 줄게. 그렇지 않아도 계속 그 일에 대해 궁리 중이었어. 일단은 이번 프로젝트 건으로 최대한 딜을 걸어서 회장님을 설득시켜 보는 걸로 시작하려고. 힘들겠지만, 며칠만 더 기다려 줘.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 권리 꼭 찾아 줄 테니까.”

“그게…… 준성아.”

가만히 듣고 있던 수진이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무겁게 떨어진 목소리에 준성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무슨 말이든 들어 주겠다는 듯 다정한 남자의 시선 앞에서 수진은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눈을 내리깐 채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결심한 듯 그의 눈을 마주 봤다.

“실은 오늘 회장님 만났어.”

순간 준성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회장님을? 무슨 일로……. 아니, 괜찮은 거야? 별일 없었어?”

걱정스러움이 가득한 물음에 수진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이 아니야. 나, 제안을 받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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