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방 잡을까요?
81화
“설마 그 아일 만나 보셨어요?”
“네. 잠깐 보고 왔습니다. 다른 놈도 아니고 준성이 녀석이 푹 빠져 있는 처자라는데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요.”
“…….”
“더군다나 회장님께 핍박을 받고 있다는 소문까지 자자하니 더 궁금해서 꼭 한번 만나 보고 싶더군요.”
제 대답이 못마땅한 듯 뾰로통한 시선을 보내는 한 회장 앞에서 송 교수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만났다고 하기엔 정체를 숨기고 대화만 조금 나눠 본 것뿐이었다. 외부에 정체가 알려져 있지 않은 데다, 일견 인자한 노신사로 보이기 좋은 제 외양이 이럴 때엔 꽤 도움이 된다. 아마도 그 아이는 저를 은퇴 후 유유자적한 삶을 살고 있는 여유로운 할아버지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꽤 오랫동안 이어진 제 이야기를 들어 준 건 그런 자신이 행여 적적해할까 말 상대라도 해 주려는 마음이었을 테고.
‘이런. 이거 내가 시간을 너무 많이 뺏었군요.’
‘아니에요, 할아버님. 오전 중엔 그렇게 많이 바쁘지 않으니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그리고 전 원래 말도 많고 설명하는 것도 굉장히 좋아해서요. 실은 여기서 종일 똑같은 이야기만 하다가 할아버님께서 지금 이렇게 저랑 대화해 주시니까 어우, 살 것 같아요.’
무슨 비밀이라도 털어놓듯 목소리를 낮춰 내놓는 말에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기본적으로 노인이나 약자에 대한 배려심이 강한 사람임에 분명했다. 일부러 말귀를 못 알아듣는 척 같은 설명을 반복하게도 해 보고, 노인이라는 입장을 이용해 뻔뻔하게 온갖 시시콜콜한 질문을 입에 올려 댄 다음이었다.
사실 이쯤 되면 진즉에 컨시어지 데스크로 보내고도 남았을 사안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직접 응대를 해 왔다. 상대와 교감하며 문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을 진심으로 기꺼워하는 태도였다.
‘사흘 동안 여기 머무시는 거죠? 그동안 또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맘 편히 찾아 주세요. 저 이번 주는 오전 조라서 매일 이 시간에 나와 있을 테니까요.’
‘허허, 고마워요. 덕분에 이번 여행이 더 즐거워졌어요. 언제 기회만 된다면 우리 아들도 한번 데려와 보고 싶네요. 아직 미혼인데 내 아들이지만 정말 괜찮은 녀석이거든. 소개 한번 시켜 주고 싶어서.’
‘어머, 저를 며느릿감으로 생각해 주시는 거예요? 말씀만으로도 정말 영광스럽고 감사한 일이지만 어떡하죠? 전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아니, 그건 미안할 일이 아니죠. 인연이 따로 있는 것을. 아주 좋은 사람을 만나고 있는 것 같네요. 보는 내가 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허허.’
싹싹한 말투며 서글서글한 웃음이 제 눈에도 이렇게나 예쁜데 아들의 눈엔 오죽할까 싶었다. 시간과 여건만 허락한다면 좀 더 붙들고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지만, 바쁜 일과에 폐를 끼치는 게 마음에 걸려 아쉽게 대화를 마무리하고 돌아 나온 참이었다.
“고운 아이더군요. 얼굴만 고운 게 아니라 천성이 고운 아이요. 물론 좀 더 겪어 봐야 알겠지만, 우리 준성이가 그렇게나 아끼는 아이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더이다.”
더욱 불쾌한 듯 표정을 굳힌 한 회장의 눈치를 슬쩍 살펴본 송 교수는 넌지시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내 들었다.
“이번 일은 우리 회장님답지 않게 조금 성급하셨던 것 같습니다.”
준성이 어떤 마음으로 한국 땅을 밟기로 결심한 건지. 면세점 일에 죽도록 매달렸던 건지. 그 마음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제 자식을 좀 더 단단한 반석 위에 올려놓고자 한 부모로서의 욕심이 그 진심을 외면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한 회장만의 자식 사랑이 도리어 자식의 가슴에 못을 박고 있는 셈이었다.
“이건 서로에게 상처만 될 뿐이지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아니었지요. 괜찮다면 지금이라도 철회하는 게 어떨까요?”
“……이제 와서 되돌리는 것도 꼴이 우습긴 마찬가지겠죠.”
“그렇기도 하겠군요. 그럼 뭐, 좀 더 생각해 봅시다.”
단호하게 잘라 내는 말에 송 교수는 바로 수긍하며 물러났다. 한 회장에게도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게 옳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리고 좀 더 조심스럽게 단어를 골라낸 말이 이어졌다.
“다만, 준성이 녀석. 그동안 너무 외로웠잖아요.”
젊어서는 자신의 삶에만 치중하느라 가족의 소중함을 몰랐다. 뒤늦게 그런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모두가 가족이란 울타리를 벗어난 후였다. 아무도 없는 집 안에 덩그러니 혼자 남아 보니, 그제야 그 외로움이 뼈에 사무쳤더랬다.
그런 환경 속에 방치된 아들 녀석들은 과연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럼에도 크게 엇나가지 않고 나름대로 잘 자라 준 건 정말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특히나 준성은 누구보다 착실히 부모의 뜻을 따라 살아왔고, 단 한 번도 두 사람을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부모 품에서 한창 응석을 부려야 할 나이에도 또래에 비해 지나치게 어른스러워 믿음직스럽다고만 생각했던 아들이었다.
“30년이 넘도록 그렇게 살아온 아이예요. 아무 욕심도 없이. 그저 우리가 깔아 놓은 길만 묵묵히 걸어온 그런 녀석이 처음으로 뭔가를 원하고 있고요.”
그런 아들의 진심이 뭔지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무엇도 내색하지 않기에 괜찮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로 그 마음속까지 괜찮았을까.
아마, 절대 그건 아니었을 것이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송 교수가 여전히 불퉁한 표정으로 말이 없는 한 회장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녀의 손등을 다정하게 두드리며 남은 말을 내놓았다.
“당신이 자랑스러워하는 아들이에요. 그런 아들의 안목인데, 한 번만 믿어 줍시다.”
* * *
한 회장에게서 연락이 온 건 그녀가 근무를 시작한 지 딱 5일째 되는 날 아침. 막 출근한 그녀가 라커 룸으로 들어서기 직전이었다.
“회장……님께서요? 저를요?”
“네. 바로 사옥으로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출근 시간이라 차가 밀릴 수 있으니 빨리 움직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라커 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는 재촉하듯 말을 덧붙였다. 어감으로 봐선 이미 회장실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분위기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수진은 곧 휴대폰을 꺼내 저와 함께 근무를 할 프런트 직원에게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바로 남자를 따라나섰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은 기분이었다.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오르는 순간부터 잔뜩 위축된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곧 한 회장의 차디찬 시선 속에 덩그러니 선 채 추궁당할 제 모습을 상상하니 숨이 콱 틀어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럴 바에야 어느 막장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눈앞에 돈 봉투 하나가 툭 떨어지고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말을 듣는 쪽이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출근하는 차량으로 가득한 강남의 빌딩 숲을 헤치며 도착한 곳은 삼성동에 위치한 HJ그룹의 사옥이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회장실의 묵직한 문 앞에서 수진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찾으셨습니까, 회장님.”
문이 열리고 회장실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서자마자 어디선가 차디찬 바람이 훅 덮쳐 오는 듯한 착각에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난방이 빵빵하게 돌아가고 있음이 분명한데도 한 회장의 집무실 안에선 묘하게 한기가 도는 느낌이었다.
한 회장은 입구에서 꺾어진 위치에 놓인 커다란 소파의 상석에 앉아 있었다. 뭔가를 보고 있었던 건지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었다. 콧등에 걸친 안경 너머로 날카로운 시선이 찌르듯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앉아요.”
최대한 침착한 태도로 걸음을 뗀 수진은 한 회장과 대각선으로 마주 보는 자리로 가 앉았다. 다소 꼿꼿해 보일 만큼 단정한 몸짓과 태도를 냉정하게 지켜보고 있던 한 회장이 하얗게 긴장한 채 시선을 내리고 있는 여자의 얼굴로 눈을 돌렸다.
“내가 김수진 양을 왜 이 자리까지 불렀는지는 알고 있죠?”
“네. 알고 있습니다.”
“좋아요. 어차피 서로 사연은 알 만큼 아는 사이일 테고. 굳이 이걸 돌려 말할 시간도, 그럴 이유도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난 수진 양이 내 아들과 헤어졌으면 해요.”
막연히 이 순간을 상상만 했을 때는 아직 그를 놓을 수 없다며 소심하게나마 제 의견을 말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건 정말 상상뿐이었나 보다. 막상 그게 현실이 되니 말을 하기는커녕 딱 달라붙은 입술을 뗄 수조차 없었다. 그저 멍하니 테이블 어느 부분에 시선을 둔 채 이어지는 한 회장의 말을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연애? 할 수야 있죠. 옛 친구라 했으니 그만큼 정도 깊을 거고, 어쩌면 특별한 인연이라 착각할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결혼이라는 건 그리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에요. 이 세계에서의 결혼은 단순히 두 사람의 결합을 뜻하는 게 아니니까. 이건 수진 양이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고, 내 아들이 내 아들로 남아 있는 한 죽을 때까지 따라붙을 조건이기도 해요.”
냉정하게 설명을 마친 한 회장이 잠시 틈을 주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 역시 수진 양이 몰랐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요. 그걸 알면서도 당장 좋은 감정이 커서 외면했겠죠.”
“…….”
“그리고 아마 지금도 헤어질 마음은 전혀 없을 거고.”
정확히 제 속마음을 끄집어내는 말에 수진은 조용히 숨만 몰아쉬었다. 여기서 어떤 말이 더 떨어질지 당최 감을 잡을 수가 없어 불안했다. 그 전에 그녀 자신도 제 뜻이 뭔지 제대로 어필을 해야 할 텐데 도저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러니 나로서는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밖에요.”
툭하니 내뱉은 한 회장이 그녀의 앞에 뭔가를 내놓았다. 방금 전까지 한 회장 본인이 바라보고 있던 서류 봉투였다.
그 정체를 확인한 수진이 저도 모르게 한 회장을 바라봤다. 이게 뭐냐고 묻는 듯한 시선에 한 회장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턱짓으로 서류를 가리켜 보였다. 알아서 확인해 보라는 뜻을 읽어 낸 수진이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어 안의 내용물을 꺼내 들었다.
“주변을 압박하거나, 더 좋지 않은 상황으로 몰아넣고 떼어 놓는 방법도 고려는 해 봤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런 짓을 더 하는 게 썩 내키지 않더군요.”
한 회장에겐 무엇보다 쉽고 간단한 일이었지만, 그건 저 자신의 자존감은 물론, 소중한 제 아들에게도 상처가 되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미 제 치졸함에 준성이 내보인 반응을 생각하면 그 자신이 망가질 때까지 치달을 가능성 또한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억지로 찢어 놓았다간 더욱 불타오르게 될 감정임을 알기에 절대적으로 피해야 할 방법이었다.
“내가 조사해 본 바, 수진 양은 지금보다 훨씬 발전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사실 직원으로만 보자면 버리기 아까운 인재죠. 가능하다면, 이대로 쭉 우리 호텔에서 근무하면서 지배인 이상의 자리로 올라서는 걸 권해 보고 싶을 정도로요.”
차분히 말을 마친 한 회장이 지그시 수진의 반응을 살폈다.
뉴욕 맨해튼의 중심부에 위치한 라비타 호텔로 그녀를 보내겠다는 소개장과 뉴욕행 비행기 티켓. 그리고 미국 내 부동산 계약서로 추정되는 문서와 호텔 경영학 MBA를 딸 수 있는 대학의 자료까지 모두 확인하고 난 수진은 얼떨떨한 눈으로 한 회장을 바라봤다.
혼란에 빠진 눈을 마주 바라보던 한 회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거기서 3년이면 될 것 같은데. 수진 양 생각은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