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80화

“어머, 여긴 어쩐 일이세요?”

“어이구, 상무님. 이번 면세점 건 소식은 들었습니다. 역시 상무님이십니다. 허허.”

“와, 엄청 오랜만에 오신 거 같아요! 어쩜 그사이에 더 멋있어지셨네요!”

사무실 입구가 소란스럽다 싶더니 난데없이 단어 하나가 귓속으로 푹 박혀 들었다. 커다란 상자에 짐을 챙겨 넣고 마지막으로 남은 물건이 없나 서랍을 열어 보던 수진이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그 자리에서 멈칫했다.

설마. 아니겠지. 뭔가 잘못 들었을 거라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자 그새 몰려든 대여섯 명의 직원들 사이에 유난히 빛나는 존재 하나가 우뚝 선 채 정확히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묘하게 짓궂어 보이는 미소가 깃든 얼굴과 눈이 마주친 순간 불길함이 엄습했다.

“김수진 씨.”

동시에 주변 사람 모두가 휙, 하니 고개를 돌려 저를 바라봤다. 어찌나 칼 같은 타이밍인지 순간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아, 네. 상무님. 무슨 일이신가요?”

그러나 이대로 말릴 순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수진이 허튼짓은 하지 말라는 뜻을 가득 담은 눈빛을 쏘아 보내자 그는 더없이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슨 일은요. 짐 옮겨 주려고 왔지.”

그 순간 주변 전체로 정적이 찾아들었다. 꼭 시간이라도 멈춘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그만이 유유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점차 가까워지는 남자를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는 사이 그녀의 책상까지 다가온 그가 아무렇지 않게 짐 상자를 덥석 집어 들었다.

“짐은 이게 다예요? 더 챙길 건 없습니까?”

“이게 지, 지금 뭐 하시는…….”

“밖에 차 세워 놨어요. 일단 거기로 옮기죠.”

“아니, 그러지 마시라고요! 제가 알아서 가져갈 수 있으니까.”

“설마 이 무거운 걸 들고 본관까지 걸어갈 생각입니까? 그런 데다 낭비할 힘 있으면 나한테나 좀 쓰시죠. 가뜩이나 체력도 없어서 빌빌대는 게.”

“뭐? 허, 야. 빌빌대긴 누가 빌빌거렸다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대꾸에 주변에서 동시에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린 그녀가 식겁하며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사무실 안의 사람들 모두가 두 사람의 말을 들어 버린 후였다.

심지어 방금 전 이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 꽤 야릇한 뉘앙스라는 것도 뒤늦게 깨달은 수진은 필사적으로 변명을 짜냈다.

“아, 저기 오해하지 마세요. 저희 친구 사이인 건 아시죠? 그사이 좀 많이 친해져서 저도 모르게…….”

“네, 많이 친해졌습니다. 몸도 마음도, 엄청 가까워졌죠.”

“…….”

수습은커녕 바로 이어진 남자의 대꾸에 살짝 웅성거리던 주변은 다시금 차디찬 정적에 휩싸이고 말았다.

삐걱삐걱삐걱.

굳어 버린 머릿속으로 녹슨 쇠를 긁어내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몰려 있는 사람들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가더니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까닥, 한다.

“뭐 해? 가자.”

그런 남자를 멀거니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주변으로 눈을 돌렸다. 언제 끼어들었는지 익숙한 얼굴의 팀원들 사이에 빼꼼히 고개를 빼며 동정을 살피는 최 대리에 이어 이제 막 도착했는지 손을 들어 알은척을 하는 나 과장과 유리가 보인다. 그리고 그 뒤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굳어 있는 민 주임까지.

빼도 박도 못하고 모두가 알아 버렸음이 분명한 상황에 수진은 더 해명하기를 포기하고 고개만 꾸벅 숙여 보였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나름의 작별 인사를 마치고 난 수진은 얌전히 그들 틈을 헤치며 사무실을 나섰다. 그렇게 몇 발자국 뗄 새도 없이 등 뒤로 비명인지 환호인지 모를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꺄아악! 말도 안 돼!”

“헉! 대박! 미쳤어!”

“뭐예요? 방금 뭐였어요, 이거?”

사무실 안은 난리가 났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아주 느긋한 표정으로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남자와 점점 가까워지는 동안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어쩜 이렇게 화끈하게 터뜨리는 거니.

그렇지 않아도 아주 불쾌한 소문이 돌고 있다는 걸 제 귀로 똑똑히 들어 버린 다음이었다. 제 평판을 더럽히는 소문의 내용보다, 그 자리에서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는 사실에 더 상처를 받았다. 그런 소문에 반박하지 못하는 자신이 정말로 소문 속 쓰레기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일까.

아무렇지 않게 나타나 모든 걸 뒤집어 놓은 이 남자의 행동이 마음에 들었다. 평소라면 분명 곤란했을 남자의 막무가내가 이렇게 반가운 적은 첨이었다. 이 일이 제 앞날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말해 지금은 속이 너무 시원했다.

하지만 그 마음을 내색하고 싶진 않았다. 잘했다고 했다간 더욱 기함할 짓을 저지르고도 남을 남자니까. 수진은 괜히 그를 흘겨보며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너 미쳤지?”

“아니. 내 여자의 명예를 지켜 주려고 달려온 남자가 미쳤겠어? 지극히 정상이지.”

“허.”

“웃지 마. 난 심각하니까. 대체 어디서 그딴 소문이 시작된 거야? 정작 내 집무실에선 한번 안아 보지도 못했는데.”

“어우, 정말!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황급히 주변을 둘러본 수진이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세게 찔러 줬다. 꽤나 힘을 줬는데 아프지도 않은지 남자는 그저 뻔뻔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웃고만 있다. 그런 얼굴로 힐끗 그녀를 바라보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다른 건 몰라도 이번 일이 네가 어딘가 부족해서라거나 큰 잘못이 있어서 생긴 게 아니라는 건 확실히 해 두려고.”

“…….”

“이건 부당한 일이야. 넌 이런 부당한 처사에 희생당한 피해자일 뿐이고. 그러니 더더욱 그 진짜 이유를 알려야지.”

사실상 이 좌천 인사는 그녀를 공개적으로 망신 주려 작정한 거나 다름없었다. 이런 상황이니 저를 우습게 보는 사람이 늘어난 것도 당연했다. 그게 달가운 건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진실을 밝혀 버리면 반대로 한 회장의 입장이 난처해질 건 불을 보듯 뻔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한 회장이 지극히 사적인 감정으로 권력을 휘둘렀다는 사실은 수진의 주변을 맴돌았던 구설보다 더욱 빠르게 퍼져 나갈 것이다. 그리고 만인의 입방아에 오르며 우스갯거리가 될 테지. 고고한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분이 과연 그런 평판을 조용히 들어 넘길 수 있을까.

“넌 그냥 네 생각만 해.”

길어지는 생각을 잘라 낸 건 준성의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말투다.

“먼저 치졸하게 나선 건 회장님이셨어. 더군다나 나와의 약속을 어기면서까지 그런 짓을 저지르셨는데 억울하실 것도 없지.”

“약속?”

“기회를 달라 했거든. 이미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증명해 보이고 싶다고. 이번 면세점 건이 해결되는 대로 널 제대로 소개할 생각이었고.”

전혀 몰랐던 이야기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엄청난 약속이 오갔을 줄이야.

“그런데 내 동의도 없이 멋대로 약혼을 진행시키고 계셨던 것도 모자라 너한테 이런 짓까지 하셨어. 그 부당함까지 이쪽에서 참아 드려야 할 이유는 없다고 보는데.”

그로서는 불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나서는 건 한 회장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이나 다름없지 않나. 그 차갑고 냉정하신 분이 제 자식이라고 관대함을 베풀어 주실 것 같진 않은데…….

어느새 건물 입구를 빠져나간 준성의 앞으로 재빨리 다가서는 김 비서의 모습이 보인다. 자연스럽게 짐을 넘긴 준성이 굳은 얼굴로 뒤따르는 그녀를 바라보더니 싱긋 웃으며 손을 뻗었다.

“당하고만 있지 말자. 얌전히 시키는 대로 해 봤자 해결되는 건 절대 없어. 그럴 바에야 뭐라도 해서 상황이 움직이도록 만드는 게 나을 거야.”

“그건 그렇지만…….”

“너무 걱정 마. 그런 치졸한 짓까지 했다는 게 알려지는 게 부끄러우시다면 이 건도 스스로 철회하실 테니까.”

“……과연 그러실까?”

이론은 그럴듯한데, 제 자리 하나 보전하자고 하는 짓이 꼭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불태우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인지. 더군다나 그 불길 속에서 벼룩만도 못한 나란 존재는 과연 무사할까 싶다. 절레절레 고개를 젓던 수진이 문득 눈썹을 찡그리며 준성을 바라봤다.

“그런데 나, 왠지 네가 이 순간을 기다렸던 것처럼 느껴지는데. 기분 탓이니?”

줄곧 두 사람의 관계를 공개하고 싶어 하던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꼭 기다렸던 것처럼 이런 소문이 돌자마자 달려와 정정한다는 핑계로 이런 대형 폭탄을 터뜨려 버렸다. 이걸 정말 노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것도 없잖아 있긴 하지.”

너무도 태연히 수긍하는 말에 픽 하고 웃어 버렸다. 이런 대책 없는 남자 같으니라고. 그런데도 이런 남자가 믿음직스럽게 느껴지는 걸 보면 이젠 저도 그 대책 없음에 물들어 버린 건가 싶다. 이젠 될 대로 되라 싶은 기분이라 해야 하나. 허탈하게 웃어 버리는 그녀의 앞으로 남자의 커다란 손이 다가왔다.

“가자.”

조각상처럼 완벽한 선을 그리는 얼굴에 근사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 웃음이 오늘따라 유난히 눈부시다. 이 멋진 남자가 내 남자라는 것도. 이 남자가 내 남자라는 걸 모두가 알게 되었다는 사실도. 새삼 믿기지 않아 웃음이 났다.

“응. 가 보자.”

작게 대답한 그녀가 그 손을 잡았다.

어떤 후폭풍이 불어오더라도 절대 놓고 싶지 않은 따뜻한 손이었다.

* * *

호텔 전체를 한바탕 뒤집어 놓은 사건은 곧장 회장실까지 전해졌다. 무표정한 얼굴로 윤 이사의 보고를 듣고 있던 한 회장이 피곤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안경을 벗더니 이마를 짚었다.

“알았으니, 그만 나가 봐요.”

이번 인사가 아주 부당한 짓이었음은 스스로도 인정하는 바다. 하지만 영원히 그 자리에 처박아 둘 마음은 없었다. 그저 살짝 겁을 줘 볼 생각이었다. 목표가 그리 큰 아이니 제 커리어가 무너지는 걸 견디지 못하고 알아서 포기하고 항복해 올 줄 알았다. 그럼 제자리로 복권을 시키든 원하는 자리로 승진을 시키든 적당히 회유하며 데리고 있다가 후에 온전히 마음을 다잡고 나면 중히 기용할 용의도 있었다.

그런데 제 아들이 이렇게 초를 칠 줄이야.

원래도 한 고집 하는 녀석이긴 했지만, 워낙에 신중해 함부로 행동하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기껏해야 제게 달려와 부당함을 직설하며 인사 발령 건을 철회시키려 할 테고, 그러면 협상 테이블에 올려 원하는 결과로 이끌어 볼 계획이었다.

다시 말해 이런 식으로 제게 반기를 드는 상황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대체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까.

지그시 미간을 누르던 한 회장이 절로 깊은 한숨을 토해 냈을 때였다.

“눈빛이 아주 선해 보이는 것이 딱 준성이가 좋아할 상이긴 하더군요.”

불쑥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한 회장은 불쾌한 듯 눈을 치뜨며 저만치 놓인 소파를 노려봤다. 때마침 느긋하게 찻잔을 집어 들던 송 교수가 흘깃 그녀를 보더니 능청스럽게 입가를 늘여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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