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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79/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79화

당혹스러움이 떠오른 남자의 눈을 보며 수진은 허탈하게 웃어 버렸다.

“거봐. 진짜 미안해하고 있잖아.”

그를 보면 저 자신을 제어하기 힘들까 봐 피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정작 그를 만나고 나니 실은 그의 이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의 잘못이 아닌 일로 힘들어하는 걸 보는 게 싫었다. 하지만 죄지은 것도 없이 제게 미안해하며 마음고생을 하게 두는 건 더 싫었다.

“그래, 뭐. 사실 평생을 생각해 온 목표가 이런 식으로 흔들리는 게 달갑진 않더라.”

애써 아무렇지 않게 말을 마친 수진이 남은 기운을 모두 짜내다시피 하며 입가를 끌어 올렸다. 벌써 두 시간을 기다린 이 남자는 절대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그럴 바에야 그냥 제 속에 있는 이야기를 털어놓고 그의 이해를 구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단 생각도 들었다.

“그냥 나 자신한테 실망스러워서 그래. 이렇게 될 수도 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시작한 일도 아닌데. 실제로 그게 무서워서 널 피해 다니기까지 했었고.”

‘설마 날 백조로 만들고 싶은 건 아니죠?’

비굴하게 사정해 가며 너랑은 죽어도 사귈 수 없다 했던 어느 날의 기억이 머릿속을 맴돌아 픽 웃어 버렸다. 그땐 정말 그것만큼 무서운 게 없었는데, 고작 몇 개월 사이 그보다 더 싫은 일이 생겨 버릴 줄은 몰랐다.

“이렇게 너랑 함께하려고 마음먹었을 때는 분명 이런 상황도 올 걸 각오했을 텐데, 정작 이런 일이 생기니까 나도 모르게 후회하고, 흔들리고 있더라고.”

그런 자신이 어쩌면 그리도 하찮아 보이던지.

타인의 힘에 무참히 흔들리는 제 현실이 아니라, 손짓 한 번에 흩어지는 먼지와 다를 바 없는 제 마음이 너무도 하찮아서. 그게 견딜 수가 없었다.

“당장 연희가 엮인 일이다 보니, 난 어떻게든 이 일만 해결하면 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나 봐. 그냥 눈앞의 일밖에 생각을 못 해서…… 진짜 신경 썼어야 할 상대가 누구였는지 파악도 못 하고.”

또다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진즉에 한 번쯤은 그럴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어야 했는데. 눈만 가리면 안전하다 믿는 타조처럼, 내가 볼 수 없는 상대면 상대도 나를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던 거다.

“회장님, 내가 누군지 알고 계시는 거지?”

그의 잇새로 짧은 숨이 새어 나왔다.

“미안. 내가 어떻게든 제자리로 다 돌려놓을게. 오늘은 그 이야기 하러 온 거야.”

“아니야. 그러지 마.”

수진은 딱 잘라 고개를 저었다.

“네가 나서서 해결이 될 일이었다면 처음부터 이런 일도 생기진 않았을 거라 생각해. 이런 상황에서 네가 나서면 네 입장만 곤란해질 거야. 난 널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아.”

제 처지를 회생시킬 방법은 아마도 단 한 가지뿐일 터다. 그리고 한 회장은 그 결과를 얻어 내기 위해 이런 일을 자행했을 거고.

하지만 그건 그도 그녀 자신도 원하지 않는 방법임엔 분명했다.

낮게 한숨을 내뱉은 수진이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붙잡았다. 마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끼며 애써 밝게 목소리를 밀어냈다.

“괜찮아. 나 충분히 버틸 수 있어. 그리고 정 아니다 싶으면 다른 곳으로 옮겨도 되니까. 생각보다 나, 되게 능력 있다? 먹고사는 건 문제없어. 실은 오라는 곳도 많아. 내가 안 갔던 것뿐이지.”

그건 너를 만나기 위해서였으니까.

그래서 이미 너를 만난 지금은 크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싶은데, 왜 포기가 안 되는 건지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은 다른 답도 없고, 여길 나갈 마음도 없으니 뭐. 어쩌겠어. 일단은 버텨 봐야지.”

이렇게 커져만 가는 욕심이 무엇도 포기할 수 없게 만들어서.

이런 자신의 부족함이 처음으로 싫어진 날이었다.

* * *

발 없는 소문은 그야말로 날개 돋친 것처럼 빠르게 퍼져 갔다. 사실상 인사 발령이 떨어진 다음 날엔 호텔 내에서 그녀의 좌천 소식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정기 인사마저 미뤄지고 있는 시점에서 굳이 한 직원에게만 인사 발령이 떨어졌다. 심지어 승진이나, 같은 직급의 보직 이동도 아닌 명백한 좌천 인사.

공고문엔 별다른 사유가 적혀 있지도 않았고, 이런 식으로 사람을 밀어내는 인사는 30년이 넘는 호텔 역사상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드문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히 그 사유를 캐는 쪽으로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었다.

일차적으로 언급될 수밖에 없는 연말 행사 건을 중심으로 나무가 가지를 뻗듯 온갖 구설의 향연이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건 당일 영진그룹 회장에게 큰 결례를 범했다는 둥, 초대 가수를 설득하며 미인계를 쓰다 들통이 났다는 둥, 호텔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며 회장님이 노했다는 둥. 듣는 이조차 기함할 소리가 아무렇지 않게 오갔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진실이 뭔지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런 구설에 반박은커녕 이때다 싶어 생각난 온갖 루머를 언급해 대며 즐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와중에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은 좀 더 과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에도 좋았던 모양이다.

“헐! 진짜요? 이게 회장님한테서 나온 명령이라고요?”

“쉿, 효은 씨만 알고 있어야 해요, 이거. 룸에서 둘이 나오는 걸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래요. 거기다 비서들 퇴근하고 난 다음엔 상무실을 그렇게 애용했는지 밤마다 불이 안 꺼지더래요. 청소하는 분들이 툭하면 소파 밑에서 쓰고 난 콘돔 발견해 온다는 소문이 아주 파다해요.”

“어머, 웬일. 그럼 둘이 정말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거예요?”

“사귄다기보단 한쪽이 열심히 몸으로 들이댄 거겠죠. 솔직히 그거 마다하는 남자가 어디 있겠어요? 거기다 뭐, 외모도 그럴싸하고 잘 아는 사이기도 하니 더 쉬웠겠죠.”

“허, 대박이다. 어쩐지 유난히 친구니 뭐니 강조하고 다니더라니, 이게 그렇게라도 접근해 보려고 발악을 한 거였네. 우리 팀 최 대리한테도 은근 여지 주면서 어장 치다가 딱 끊어 냈었거든요. 그게 상무님 오시고 나서였으니 정확하겠네요.”

휴게실 앞, 꺾어지는 길목에서 듣게 된 말에 수진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테이크아웃 커피 잔을 들고 있는 손이 잘게 떨렸다. 제 옆에 선 나 과장도, 재잘거리며 뒤를 따르던 유리도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문 채였다.

사무실로 출근을 하는 마지막 날이었다. 아무 말도 없이 제 짐을 챙기고 있던 수진을 끌고 나선 건 나 과장이었다. 잠시 기분 전환이나 하자며 간식거리를 사 들고 휴게실로 들어서다 제대로 똥을 밟았다.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던 수진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두 사람을 돌아봤다.

“아, 맞다. 저 따로 챙겨야 할 게 있었는데 지금 생각났어요. 또 잊기 전에 먼저 가 볼게요. 간식은 두 분이서 드시고 오세요.”

그렇게 자리를 피해 버리는 수진을 차마 잡지도 못하고 굳어 있던 두 여자의 귓가로 꺄르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발끈한 나 과장이 성큼 그 자리로 뛰어들었다.

“니들 지금 뭣들 하는 거야? 밖에 소리 다 들리는데!”

“과장님!”

“어머, 나, 나 과장님!”

갑자기 뛰어 들어온 나 과장을 발견한 여자들의 얼굴이 당황으로 굳었다. 인사과의 직원 두 명과 그 사이에 껴 있던 민 주임을 확인한 나 과장이 더욱 분개하며 언성을 높였다.

“민효은! 너는 뭐 하는 사람이야? 업무 시간에 나와서 헛짓거리 하는 것도 모자라 말려도 모자랄 판에 같은 팀 식구를 네가 나서서 씹고 있어? 지금 제정신이니?”

“과, 과장님. 그게 아니고요, 저는 그냥…….”

“같잖은 변명 하지 말고. 이미 다 들었으니까. 우리 팀 막내랑 니들이 그렇게 씹어 대던 당사자까지 듣고 가셨다. 이제 속이 시원하니?”

서늘하게 내뱉은 말에 그녀들은 완전히 사색이 되었다. 그제야 아차 싶은 얼굴이었다. 그래 봤자 이미 저지른 짓을 되돌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 수진이랑 상무님이 친구라는 소문은 들었지? 친구끼리 만나는 것도 너희들 눈치 봐 가면서 만나야 하니? 니들이 뭔데? 그리고 말이야 바른말이지. 누가 누구한테 들이댔다고? 허, 내가 정말 어이가 없어서. 소문을 낼 거면 제대로 내. 만약에 둘이 사귄대도 그건 수진이가 들이댄 게 아니고 상무님이 들이댄 거야. 뻑하면 우리 팀 찾아오고, 뻑하면 우리 수진이 연락해서 불러내고 한 게 누군데 그딴 소리들이야?”

“아, 아니 몰라서 하는 말을 가지고 뭘 그렇게 화를 내세요? 그냥 도는 말인데.”

계속 야단만 맞고 있는 게 불편했는지 인사과 직원 하나가 볼멘소리로 항의했다. 그 순간 나 과장이 코웃음을 쳤다.

“그치. 모를 수 있어. 그건 죄가 아니지. 근데 모르면서 아는 척 떠들어 대는 건 창피한 일이지. 그리고 진실을 알았으면서도 미안해하는 마음조차 없는 건 사람도 아니고!”

그녀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제 할 말을 다 쏟아 낸 나 과장은 곧장 민 주임에게로 눈을 돌렸다.

“너 당장 따라와.”

휭하니 휴게실을 나서는 나 과장의 뒤로 민 주임과 유리가 졸졸 따라붙었다. 내내 벌레 씹은 얼굴을 하며 따르던 민 주임은 인적이 드문 복도 앞에 딱 멈춰 선 나 과장이 뒤를 돌아보자 움찔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여자 쪽이 들이대서 남자가 넘어간 거라고? 넌 그게 정말 덤벼들어서 될 일이라 생각하니? 그래?”

“과, 과장님. 이건 그게 아니라요.”

“아니, 다른 건 그렇다 치고. 네 눈엔 상무님이 그리 쉬운 사람으로 보이든? 그리 쉬운 분 같으면 네가 먼저 덤벼 보지 그랬냐? 잘되면 사모님 소리 들을 일인데.”

여지없이 비꼬는 말이 작렬했다. 네게는 절대 불가능했을 거란 의미였다.

“그리고 만약에 수진이가 진짜로 상무님이랑 그런 사이라 치자. 그건 온갖 방해되는 요소 다 감수하고 사귄다는 뜻이야. 그런 마당에 쉽게 헤어지겠니? 상무님 성품이라면 분명 결혼까지 가고도 남을 텐데 그러면 김 주임이 그때도 김 주임으로 남아 있을 거 같냐, 이 말이다.”

그제야 뭔가를 깨달은 듯 민 주임이 얼굴을 굳혔다. 그런 민 주임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던 나 과장이 나직하게 덧붙였다.

“심보 곱게 써. 사람 미래 어찌 될지 아무도 장담 못 하는 거야. 그때 가서 후회해 봤자 늦으니까.”

은근 뼈가 실린 말을 내뱉고는 그대로 사무실 쪽으로 걸음을 떼었다. 그런 나 과장의 옆으로 유리가 황급히 따라붙었다.

“헐, 과장님. 방금 그 말씀 진심이세요? 정말 두 분이서 그런 사이라고…… 아니, 그거야 그럴 수 있다 쳐도 정말 결혼까지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말이 그렇단 소리지. 그리고 순서가 엉망이잖아. 일단은 정말 사귀는 사이인지 아닌지부터 확인하고 말하자.”

기막힌 말이 도는 게 화가 나 내놓은 말이지만, 아직은 두 사람의 비밀을 지켜 줘야 하는 입장이다. 먼저 밝히지 않는 한 제가 먼저 말해도 될 일은 절대 아니었기에 나 과장은 얼버무리듯 말을 돌렸다.

“그리고 애초에 내가 한 말이 성립하려면, 10년이 넘도록 한 여자만 좋아하고 있었어야 가능한 건데 그게 말이 좋아 10년이지.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이 짧은 것도 아니고.”

“그렇긴 해요. 차라리 10년 우정이면 모를까. 10년 사랑은 부부도 어렵죠.”

“그래. 그래서 정말 그런 사람이라면 보통 사람은 아니라 생각하는 거지. 솔직히 세상 어떤 미친놈이 그리 지고지순하게 한 여자만 생각하고 살겠냐고. 그것도 10년씩이나.”

툭하니 내뱉던 나 과장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나 과장의 얼굴만 바라보며 걷던 유리도 같이 그 자리에 멈춰 서더니 나 과장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봤다. 이어 ‘어머.’ 하고 내뱉는 유리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실루엣을 가진 근사한 슈트 차림의 남자가 거침없이 사무실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나 과장의 입가로 피식거리는 웃음기가 떠올랐다.

“근데 정말 그런 미친놈이 있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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