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8/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78화

이상하게 평화로운 하루였다. 물론 여전히 일은 산처럼 쌓여 있고, 이래저래 불려 다니느라 의자에 엉덩이 붙이고 있을 시간조차 없는 건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데, 묘하게 주변이 조용한 느낌이라 해야 하나.

단순히 평온한 일상이라 하기엔 찝찝한 느낌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이 느낌은 큰 폭발이 있기 직전의 고요함 내지는 폭풍의 눈 안에 들어와 있는 것과 유사했다.

아니, 어쩌면 이것은 이제 곧 닥쳐올 운명에 대한 예감이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 시작을 알린 건, 나 과장의 당혹스러움 가득한 목소리였다.

“어라? 잠깐만 있어 봐라. 엄마야, 이게 뭐야? 어? 이게 대체 뭔 소리야?”

퇴근을 한 시간쯤 앞뒀을 무렵이었다. 신 부장에게서 막 결재를 받아 낸 따끈한 서류를 들고 와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들려온 나 과장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낯설었다. 저도 모르게 멈칫한 수진이 의아한 얼굴로 나 과장을 바라봤다.

우습게도 그때 강철도 모자라 비브라늄 멘탈의 소유자로 이름난 나 과장도 이런 표정을 지을 때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함께하며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왜요,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

“아니, 아니. 잠깐만. 이거 뭐가 잘못된 거 같은데. 맞아. 이거 뭐 문제 있는 거다. 그치? 잠깐만, 이거 좀 더 알아보고…….”

정작 묻는 말에는 대답 없이 제 할 말만 중얼거렸다. 그런 나 과장을 보는데 하루 종일 찜찜하게 들러붙어 있던 불안감이 뇌리를 치고 지나갔다. 어떤 예감에 끌리듯 제자리에 앉아 마우스를 집어 든 순간,

“주, 주임님! 큰일 났어요! 방금 인사 발령 공고가 떴는데…… 여기 왜, 왜 주임님 이름이…….”

들려온 유리의 외침에 그녀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인사 발령 공고

다음과 같이 인사 발령 되었음을 알립니다.

시행일 : 20XX년 1월 1X일

대상자 : 김수진

변경 전 : 영업부 객실판촉팀 주임

변경 후 : 객실부 프런트 데스크 사원」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아무 죄도 없이 멀쩡히 일 잘하는 직원을 왜 갑자기 엉뚱한 곳으로 이동을 시키는 거냐고. 이런 경우가 어디 있어?”

“제 말이요. 심지어 프런트면 우리 주임님이 5년 전에 근무하시던 곳이잖아요. 거기다 일반 사원으로 보내는 거면 이건 누가 봐도……. 아 진짜! 이런 부당한 일이 어디 있냐고요!”

1차로 흥분한 나 과장의 언성이 높아지자 그에 맞장구치던 유리는 차마 좌천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진 못하고 분통을 터뜨렸다. 제 일처럼 나서서 화를 내 주는 두 사람의 앞에서 멍하니 모니터를 보며 글자 하나하나 눈에 새기듯 읽고 또 읽던 수진이 문득 쓴웃음을 머금었다. 공식적으로 좌천의 빌미가 될 일이라면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지난번 영진그룹 건 때문일 거예요, 아마.”

“아니, 그러면 더 웃긴데? 일을 친 건 영진그룹 쪽이라는 것도 다 밝혀졌고, 심지어 그 가수인가 하는 분도 수진이 덕분에 공연할 수 있는 거라고까지 말해 줬다며. 이건 잘했다고 표창장에 상금까지 쥐여 줘야 할 일 아니야? 하, 나 정말 이해를 할 수가 없네.”

“윗분들이 보시기엔 또 다른 일이니까요. 제가 나서서 그쪽 담당자랑 일이 더 꼬일 뻔하기도 했고, 더군다나 다들 보는 앞에서 다투기까지 했잖아요.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죠.”

“그러니까 웃긴 상황 아니냐고. 이런 식으로 부당하게 하향 전보 시키는 거, 징계보다 악랄한 짓인 거 몰라? 차라리 징계면 이게 정당하니 부당하니 다퉈 보기라도 하지, 이건 사람 우스운 꼴 만들려고 작정을 한 거잖아. 지금 네 연차, 네 능력에 프런트면 지금 최소 매니저는 달고 있을 때인데 거기다 대고 사원이라니. 막말로 알아서 그만두고 나가라는 소리지, 이게! 그리고 이게 말이 영진그룹 때문이지 솔직히…… 어휴!”

분통을 터뜨리며 말을 줄인 나 과장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리가 있어 말을 아끼고는 있지만, 나 과장이라고 이 상황의 진짜 원인이 뭔지 모를 리 없었다. 어색하게 웃어 보인 수진이 착잡한 얼굴로 다시 모니터를 바라봤다.

준성의 약혼이 무산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건 이틀 전, 점심때의 일이었다. 차마 그 일을 제 입으로 언급하긴 힘들었던 건지 전화를 걸어 온 건 수혁이었다. 제 연인에게 제 약혼의 경과를 이야기한다는 게 맨정신으로 할 이야기가 아님을 알기에 그런 상황 정도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 어쨌든 잘 해결된 거 같으니까, 이제 너무 걱정 말라고.

과연 그런 걸까.

당장에 그가 약혼식장에 끌려갈 일은 없어졌으니 다행이긴 했다. 당당히 네 약혼을 깨 주마, 선언하고 나선 건 저 자신이었으니 생각대로 되었음을 기뻐해야 함이 옳은데…….

이상하게 뭔가가 찜찜했다.

그 찜찜함은 한 회장에 관한 것이었다. 과연 한 회장이 준성의 의사를 온전히 존중해 주며 물러나 주실까. 그의 주변을 캐고 압박하는 일이 없을까.

아니, 애초에 한 회장은 정말로 제 존재에 대해 모르고 있었을까.

문득 그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모를 수가 없는 위치라는 걸 뒤늦게 깨달은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언젠가 호텔 로비에서 저를 바라보던 날카로운 시선도, 초청 가수 대기실에서 마주쳤을 때의 차가운 눈빛도, 모두가 의도된 외면이라는 뜻이 된다.

그냥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만으로 적당히 해결될 존재라 생각했던 건지도.

하지만 그렇게 하찮기만 한 존재는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을 지금은 어떨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리고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 또한 이미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는 있었다.

그럼에도 정작 눈앞의 현실로 맞닥뜨리니 생각한 것 이상으로 막막했다.

사실 당장 직급이 낮아지고, 연봉이 줄어드는 일 정도는 크게 와닿는 문제가 아니었다.

아니, 이 역시 달갑진 않았지만, 지금껏 공들여 쌓아 온 커리어가 무너지는 것에는 비할 바가 못 될 것이다.

현재의 자리에서 3년쯤 더 일하고, 회사의 스폰서십 프로그램을 통해 MBA 유학을 다녀온 후 당당히 각 업장의 지배인 노릇을 하다 최종적으로 이 호텔의 총지배인이 된다는 게 그녀의 원대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이제 물거품이나 다름없었다. 실질적으로 징계나 다름없는 처분을 받게 될 존재에게 스폰서십이라는 기회가 올 리는 만무했으니 말이다.

“불복해. 지금이라도 인사과 가서 항의하자. 부당한 처분인 거는 본인들도 알 거야. 고소감이라고, 이 정도는. 너 이대로라면 여기 더 못 다녀, 이것아. 새파랗게 어린 후배들 밑에서 아무렇지 않게 일할 수 있겠어?”

“어쩔 수 있나요. 그렇다고 회사 상대로 싸워 봤자 좋을 게 없는데. 그리고 저 이래저래 그럴 형편 아닌 것도 아시잖아요.”

오너의 아들과 연애를 하는 입장에선 상당히 껄끄러운 일임은 부정할 수 없었던 걸까. 사정을 알기에 더 기가 막힌 나 과장은 제 속이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푹푹 쉬어 댔다.

“어떻게든 버텨야죠, 뭐. 괜찮아요. 그 정도는.”

해탈한 듯 차분히 말을 내어놓고 씁쓸하게 웃자 다시 한숨을 내쉰 나 과장이 투덜투덜 불만을 토해 냈다.

“아니, 그래. 그건 그렇다 치는데 날짜도 그렇다. 당장 사흘 후라니? 인계는 그렇다 쳐도 연락 줘야 할 거래처가 몇인데 그걸 고작 끽해야 이틀 안에 해치우라는 게 말이 돼? 이게 어떤 일인지 몰라서 이러나? 제대로 정리할 시간은 줘야 할 거 아니냐고.”

“히잉, 주임님. 주임님 안 계시면 전 이제 어떡해요. 아직 배울 게 천지인데…….”

“너무 걱정 마세요. 일단 연초라 계약 연장 건은 다 마무리된 상태고, 정 안 되겠으면 같은 회사인데 며칠 더 도와주러 올 수도 있지 않겠어요? 유리 너도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부당한 일을 당한 건 제 쪽인데, 어째 달래 주는 것도 제 몫이 되어 있었다. 차라리 그래서 멀쩡한 정신이 유지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제 일처럼 침통해하는 나 과장과 곧 울 것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유리 때문에라도 더 힘을 내야 할 것 같았으니까.

“자, 이럴 시간 없어요. 일단은 저 업체 자료 정리부터 하고, 인계서 작성하고 있을게요. 일단 이걸 한 사람이 다 인계받기 힘들 테니까 조금 있다 민 주임이랑 민영 씨까지 오면 그때 자료 보면서 다시 이야기해 봐요.”

애써 바쁜 척 주변을 환기하며 일감을 꺼내 들었다.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 * *

“……역시 있네.”

8시가 조금 넘어선 늦은 퇴근길. 터덜터덜 사무 건물을 나선 그녀의 시야에 익숙한 차량 한 대가 걸렸다. 저만치 가로등 아래 고고히 서 있던 차량은 그녀가 도로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스르륵 다가와 멈춰 섰다.

“기다리지 말라니깐.”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말은 차량의 주인에게까지 닿진 못했을 것이다. 이윽고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가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어둑한 가로등 불빛 아래 점차 선명하게 정체를 드러내는 남자를 보며 수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고 싶지 않았는데.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이건 그 역시도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당장은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저 자신을 추스르는 것조차 벅차 타인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런 기분으로 그를 만났다가 저도 모르게 그를 탓할까 봐, 그에게 책임지라고 울며불며 매달릴까 봐 더 만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몇 시에 끝나? 얼굴 좀 보자.]

처음 그에게 연락이 온 건 퇴근을 10여 분 앞둔 시간이었다. 몰래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한 수진은 팀원들과 인수인계를 논의 중이라 늦을 것 같다고 답했다. 실제로 그땐 나 과장과 민 주임을 앞에 놓고 한창 거래사들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던 때였다.

기다리겠다는 말에 오늘은 먼저 들어가라며 잘라 냈다. 정리할 게 많아 꽤 많이 늦을 거라고. 너무 오래 기다리는 건 나 자신이 부담스럽다고도 했다.

이 건을 핑계로 오늘은 그를 피해 볼 생각이었다. 한 시간쯤은 정말로 기다리고도 남을 사람이라 자료 정리를 구실 삼아 8시가 넘도록 자리에 멍하니 앉아만 있다가 나서는 길이었다. 이쯤 되면 적당히 알아서 자리를 떴으리라는 판단이었다.

그런데 두 시간이 지난 지금,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의 앞에 다가와 서 있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저를 기다리게 한 것에 대한 불만도 있을 거고, 그 이유가 궁금할 법도 한데 전혀 그런 내색도 없이.

“뭐 좀 먹었어? 배고플 텐데 일단 밥부터 먹자.”

참 예쁘게도 미소 지으며 말을 건네 왔다.

이토록 칙칙하게 꼬인 마음을 가지고 쳐다보는 게 미안할 정도로.

“아니, 괜찮아. 지금은 생각이 없어서. 먹어도 소화가 될지도 모르겠고.”

“그래도 조금이라도 먹어야지. 자꾸 식사 거르고 그러면 몸 상하잖아. 정 소화 못 시킬 거 같으면 죽이라도…….”

“나 정말 괜찮아. 준성아.”

“…….”

“그러니까 그렇게 미안해하지 마.”

그 순간 남자의 입가에 잔잔히 떠 있던 미소가 서서히 사그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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