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방 잡을까요?
77화
“준성…….”
“사, 상무님!”
놀란 그녀의 목소리는 완전히 사색이 되어 버린 최 대리의 외침에 그대로 묻혀 버렸다. 일을 마치자마자 바로 나선 길이었는지 준성은 어두운색의 슈트 위에 코트를 걸친 차림이었다. 밤공기만큼이나 차갑게 굳은 얼굴로 최 대리를 쏘아보던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지금.”
“…….”
“뭐 하는 건지 물은 것 같은데요.”
나직하게 깔리는 목소리엔 한기가 가득했다. 짙게 음영이 드리워져 한층 매서워 보이는 눈이 잔뜩 움츠려 있는 수진과 조금 떨어진 곳에 엉거주춤하게 선 남자를 번갈아 향했다. 음산하기까지 한 목소리에 질려 잔뜩 얼어 버린 최 대리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아, 그게, 사, 상황이 좀 오해가 있으실 거 같은데, 이건 그냥 제가 김 주임한테 개인적으로 중요하게 하, 할 이야기가 있어서…….”
“아, 잠시 질문을 바꿔야겠군요.”
툭하니 최 대리의 말을 잘라 낸 준성이 성큼성큼 수진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며 다른 손으로 그녀의 턱 끝을 붙든 채 신중한 눈으로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고운 얼굴 어딘가에 행여 생채기라도 났을까, 꼼꼼히 살피던 그는 곧 다친 곳이 없다는 걸 확인한 듯 짧게 숨을 내쉬더니 다시 눈을 돌려 최 대리를 쏘아봤다.
“내 여자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습니까?”
“헉! 야, 그걸 그렇게 말해 버리면……!”
쩌적. 쩡.
뭔가가 급속도로 얼어붙는 소리가 난 것처럼 느껴진 건 귀의 착각일까.
심지어 황급히 준성을 제지하려다 저도 모르게 꺼내 버린 말은 그야말로 확인 사살이었다. 더욱 당황한 수진이 잽싸게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리다 이미 모든 걸 파악한 최 대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 그럼 그때 그 반지가 그럼…… 히끅.”
넋을 놓은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최 대리가 딸꾹질을 했다.
“시, 실례했습니다. 전 그럼 이만 들어가 보겠…….”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하지 않았었나요?”
“아, 아닙니다.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제가 오늘 수, 술이 과해서 조금 실수를……. 죄송합니다. 그, 그럼 이만 전 회식이 있어서.”
“최용민 대리님.”
황급히 자리를 빠져나가려던 최 대리가 움찔하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제 이름을 알고 있을 거란 생각은 꿈에도 못 한 건지 놀란 눈이 불안하게 깜빡였다.
“현재 그룹 내 사정으로 인해 호텔과 HJ건설의 정기 인사가 좀 늦어지고 있는 건 알고 계시죠?”
“네? 네, 네. 알고 있습…….”
“그리고 최근 제주 지점의 매출이 몇 년째 하락하는 추세라 이번에 내부 리노베이션을 통해 시설을 보강하고, 서울 쪽 전문 인력들을 투입해 분위기를 쇄신할 계획이 있는 걸로 아는데요.”
지금의 상황과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건을 연이어 입에 올린 준성이 이윽고 아주 무심한 투로 툭하니 질문을 던졌다.
“최 대리님. 바다 좋아합니까?”
단순히 문자 그대로 호불호를 묻는 말이라면 굳이 싫을 것까지야 없는 일이다. 하지만 묻는 뉘앙스는 절대 그런 뜻이 아니었다. 눈치 없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최 대리였지만, 주옥같은 미래가 코앞까지 닥쳐왔다는 것쯤은 알고도 남았다.
“아, 아, 아뇨. 전 미역도 싫어하고 수, 수영도 못하는데요.”
더듬더듬 대답하는 최 대리의 얼굴은 이미 하얗게 질려 있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뼛속까지 도시 얌생이로 살아온 그는 서울을 벗어난 장소에서 살아가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거 아쉽네요. 바다를 좋아해야 제주 생활도 즐거울 텐데.”
“…….”
“뭐, 살다 보면 정들어서 취향이 바뀔 수도 있겠죠.”
싱긋 웃어 보이는 남자에게선 흉흉한 오라가 마구 풍겨 났다. 최 대리는 하얗게 얼어붙다 못해 숫제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릴 기세였다.
그러게 어쩌다 이런 남자한테 걸려서 그러고 있니. 평소에 똑바로 좀 살 것이지.
“사, 사, 상무님 저는…….”
“그냥 원론적인 이야기를 한 것뿐입니다.”
“…….”
“아직은 계획에 없습니다만, 혹시 모르죠. 언제, 갑자기, 어떤 이유로 확 마음을 먹게 될지.”
“…….”
“가령 다른 누군가 우리 관계에 대해 알게 되는 날이 온다거나 하는 경우엔.”
그 자리에 딱 못 박힌 채 진땀만 흘려 대는 남자를 마지막으로 흘깃 바라봐 준 준성이 싱긋 웃었다.
“다음 날 바로 제주행 비행기에 타고 계시겠죠.”
“며, 명심하겠습니다, 상무님. 꼭 입 다물고 있겠습니다.”
입에 지퍼 채우는 시늉까지 하며 다짐한 최 대리가 몸을 90도로 숙여 보였다.
“그럼 두 분 오붓한 시간 보내십시오.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한물간 웨이터 같은 멘트를 마지막으로 남긴 최 대리가 후다닥 자리를 벗어났다. 수진은 혼비백산하며 식당으로 도망치는 최 대리를 잠시 지켜보다 이윽고 준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말 제주 지점에 그런 이야기가 있어? 딱히 그런 소문은 못 들은 것 같은데.”
“실제로 시설이 오래된 건 사실이니, 언젠간 하겠지.”
“……뭐?”
너무도 태연히 내놓은 대답에 잠시 벙쪄 있던 수진이 헛웃음을 지었다.
“와, 어쩜 얼굴 하나 안 바뀌고 거짓말을 해?”
“아주 거짓말은 아니지. 마음만 먹으면 보고서 올려서 내가 말한 그대로 이행 가능하니까. 거기다 사람 하나 그쪽으로 내보내는 건 일도 아니고.”
“헐…….”
경악하는 그녀를 흘깃 쳐다본 준성이 고개를 비뚜름하게 기울였다. 그의 입가로 슬쩍 비틀린 웃음기가 걸렸다.
“감히 내 여자를 건드리고, 그 현장에서 들킨 놈이야. 지금 제 발로 걸어서 돌아가게 둔 것만으로도 많이 참은 거라 생각하는데.”
지그시 어금니를 악물며 내놓는 말이었다. 불거진 귀밑 턱이 작게 꿈틀거리고 좁아진 눈매는 베일 듯 날카롭다. 차분한 태도는 여전했지만, 잔뜩 날이 선 말투에서는 선득한 광기마저 느껴질 정도다.
이 남자. 진짜로 열받으면 이런 얼굴을 하는구나.
평소에 보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굉장히 낯설고, 무서워 보이는데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런 와중에도 제 마음은 철없이 설레고 있으니 이것도 병인 듯하다.
“이제 그 일은 그만 생각하고 나 좀 봐 줘.”
저도 그 못지않게 화가 났었다. 피곤한 하루의 끝이 엉망이 될 뻔한 순간이었다. 자칫 최악의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는 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모든 게 괜찮았다. 신기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았다. 이런 순간 떡하니 제 앞에 나타나 준 그에게서 느낀 든든함은 오늘 그녀가 느껴야 했던 모든 불쾌감을 희석시키고 있었다.
“하루 종일 보고 싶었는데 얼굴 좀 보여 주시라고요, 상무님.”
이어진 말에 그가 헛,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떠오른 웃음에는 즐거운 기색이 역력했다.
“축하해. 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어. 이번 일은 정말 네가 고생하고 신경 쓴 만큼 좋은 결과로 돌아온 거라 생각해. 그래서 더 값진 거고.”
꼭 해 주고 싶었던 말을 꺼내 놓은 수진이 생긋 웃음을 머금었다.
“너도 나 때문에 마음고생 많았어. 잘 버텨 줘서 고마워.”
금세 다정해진 말투가 간지럽다. 방금 전까지 냉기가 풀풀 넘치던 남자라선지 더더욱 비교가 되는 느낌이었다. 같은 생각인지 가만히 마주 보던 두 사람에게서 동시에 피식거리는 웃음이 새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진 분명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정작 이렇게 마주 보고 있으려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지금의 두 사람 앞에선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참, 어쩌지? 네가 이렇게 갑자기 나타날 줄 몰라서, 아직 방은 못 잡았는데.”
“어쩔 수 없지. 정 뭐하면 일단 여기라도 들어와 볼래?”
장난스럽게 대꾸한 그가 슬며시 코트 깃을 열어 보였다. 그새 넉살만 한 단계 더 늘어 버린 그의 대응에 크게 웃음을 터뜨린 그녀가 그 틈으로 쏙 파고들었다. 다정히 그녀를 감싼 그의 품 안은 그 어떤 스위트룸보다 아늑하고 따뜻했다.
* * *
고즈넉한 분위기의 방 안은 무거운 침묵만 짙게 깔려 있었다. 식사의 흔적마저 말끔히 사라진 테이블 위엔 두 개의 찻잔이 놓여 있었지만, 자리에 남은 건 단 한 사람이었다.
묵묵히 굳은 얼굴로 자리를 지키던 한 회장의 곁으로 윤 이사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슬슬 집무실로 돌아가셔야죠.”
“연희 양은 잘 출발했나요?”
“네. 무사히 차를 타고 가시는 걸 확인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수고했어요.”
짤막하게 대답한 한 회장이 이윽고 긴 숨을 내쉬었다. 그 얼굴엔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대한 피곤함이 묻어났다.
“꼭 한꺼번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이 터지는군요.”
갑작스럽게 연희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한번 뵈었으면 한다는 정중한 요청에 조만간 함께 저녁이라도 들자는 말로 답을 했었다.
그리고 이틀 후, 강남 모처의 한식당에서 대면한 연희는 시종일관 묘하게 굳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미래의 시어머니 앞에서 마냥 얼굴이 밝을 수는 없겠지만, 평소 자신감이 넘치던 연희의 모습과는 괴리감이 커서 의아하던 참이었다.
‘아무래도 제가 먼저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 부득이하게 연락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자마자 연희는 차분히 용건을 꺼내 들었다.
‘이 약혼 없던 일로 해 주세요.’
한 회장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스쳤다. 준성이야 쭉 이 약혼에 회의감을 보여 왔지만, 지금껏 긍정적이었던 연희의 태도가 왜 바뀐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알 것도 같았지만 선뜻 믿기가 힘들었다.
‘혹시 그 이유가 김수진 양 때문이니? 그 아이가 네 친구고, 지금 내 아들의 연인이라서?’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말에 연희는 눈에 띄게 놀란 얼굴이었다.
‘설마하니 내가 그런 것도 모르고 이 일을 진행했을까. 야망이 큰 아이라 생각했는데 고작 그런 거로 물러날 줄은 미처 몰랐어. 실망이 크구나.’
제 아들의 짝이 될 만한 여자를 꽤 오랫동안 수소문해 왔지만, 사실 누구 하나 마땅히 눈에 차는 이가 없었다. 외모도 재능도 집안도 다 거기서 거기였다. 그나마 그중 자신감 넘치고 자기애가 강한 연희가 괜찮아 보였다. 제 아들과도 안면이 있는 사이라 거부감도 덜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제 아들에게 연인이 생겨 버렸다. 워낙에 이성에 관심이 없던 녀석이니 잠깐 호기심에 만나다 끝날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그 인연이 깊었다.
그 아이가 하필 연희의 오랜 친구라는 건 정말 최근에야 알았다. 알았으면서도 그냥 밀어붙였다. 친구 사이인 만큼 현실은 더욱 아프게 다가올 것이기에. 그러니 더 버티지 못하고 알아서 떨어져 나갈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반대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건 왜 깨닫지 못했을까.
‘알았다. 네 마음이 그렇다는데 내가 무슨 수로 잡겠니.’
‘죄송합니다, 회장님.’
그렇게 제 용건을 마치고 돌아서던 연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끝내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덧붙였다.
‘수진이 정말 괜찮은 아이예요. 어떤 자리에서도 빛날 수 있는 사람이고요. 그러니 부디 한 번만 제대로 지켜봐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우습게도 그런 연희의 말은 언젠가 제 앞에서 당당히 제 연인에 대한 평가를 늘어놓던 아들의 얼굴을 떠올리게 했다. 그런 제 눈에 보인 사람이에요, 라고 했었던가.
동시에 면세점 발표가 있던 날, 함께 늦은 점심을 들며 나눈 이야기가 연이어 머릿속을 맴돌았다.
‘방법은 두 가지였던 거 알고 계셨을 거라 믿습니다.’
자리를 지키기 위해 내 세력을 키우거나, 상대의 세력을 와해시키거나.
준성이 택한 방법은 후자였고, 덕분에 한 사장의 세력은 철저히 무너지는 중이었다.
‘결과적으로 회장님께서 원하신 결말을 얻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 약혼, 철회해 주세요.’
너무도 당당히 내놓는 말에 한 회장은 깊은 한숨으로만 답했다.
‘왜 굳이 이연희여야 했는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한발 물러나는 척 저를 더욱 궁지에 몰아넣는 말이었다. 이미 제 치졸했던 뜻을 다 알아 버린 아들의 차가운 시선 앞에서 한 회장은 불쾌한 침묵만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기어이 모든 계획이 틀어졌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아무래도 이젠 직접 움직여야 할 때인 것 같다.
다시 짧은 숨을 토해 낸 한 회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인사과 김준헌 상무 좀 불러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