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76화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얼굴부터 빨개지고 말았다.

와, 이 적나라한 뉘앙스는 뭐니.

날이 갈수록 짓궂어지다 못해 이젠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게 진정 요물이 따로 없었다. 게다가 요상한 말을 꺼낼 때만 존대를 하는 아주 못된 버릇까지 더해 놓으니 더욱 가관이었다.

“하여간 못 말린다니까.”

이런 상황에 굳이 이런 장난스러운 메시지를 보낸 이유가 뭔지. 이 짓궂은 행동의 의미를 모르지 않아서 더욱 웃음만 났다. 아마도 제가 연희를 생각하며 우울해할까 봐 그런 것일 테지. 이미 어떤 결과를 얻게 될지도 다 예상하고 있던 사람이니까.

그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이런 걱정까지 시켰구나 싶어 민망하기도 했다. 혹시라도 걱정하고 있을 그를 위해서라도 지금은 괜찮다는 뜻을 보여 줘야 할 텐데, 대놓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기엔 좀 뜬금없는 느낌이고.

여기서 뭐라고 대답해야 이 남자를 안심시킬 수 있을까.

괜히 눈을 가늘게 뜨며 이런저런 상황을 떠올려 보던 수진이 이내 픽 웃으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스위트룸까진 어렵겠지만 성의껏 준비해 보겠습니다♡♡]

마지막에 정성스럽게 하트까지 붙여 놓고선 전송 버튼을 꾹 눌렀다. 그러고는 키득거리며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과연 저 답장에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몹시 궁금했지만, 최소 반나절 동안은 확인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자, 이제 하루 종일 내 생각만 해 보세요.”

아침부터 사람 심장을 철렁하게 만든 것에 대한 소심한 복수였다. 나직하게 중얼거린 그녀의 입가로 장난스러운 웃음기가 떠올랐다.

* * *

사무실을 나선 수진이 흘깃 하늘을 바라봤다. 퇴근 때가 되니 이미 완전히 저물어 버린 하늘은 여전히 짙은 구름에 둘러싸여 있었다. 낮 동안엔 한두 번 눈을 뿌렸다고 했던가. 종일 사무실에 처박혀 온갖 서류들과 씨름을 했던 날이라 확인은 못 했지만, 한눈에도 묵직해 보이는 구름이 심상치 않은 게 당장 눈이 쏟아져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날씨긴 했다.

“어우, 공기 축축한 거 봐. 또 얼마나 쏟아지려고 이러나? 종일 길도 엉망이었는데 큰일이네.”

매섭게 파고드는 추위에 나 과장이 코트 깃을 단단히 여미며 투덜거렸다. 같은 생각인지 나 과장의 옆으로 다가선 효은이 어깨를 떨며 진저리를 쳤다.

“그렇지 않아도 예보 보니까 적설량이 좀 되더라고요. 9시쯤부터 온다는데 밤새 또 왕창 쌓이겠죠? 으으, 지긋지긋해. 내일도 30분은 일찍 나와야겠네요.”

“이런 날 회식은 무슨 회식이야, 정말. 하여간 부장님은 날을 잡아도 꼭 이런 날에.”

“제 말이요. 하고많은 날 다 두고 왜 굳이 오늘이냐고요. 금요일도 아닌데.”

기어이 토해 놓는 불만에 수진은 공감하듯 웃음을 머금었다.

종일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신 부장이 느닷없이 나타나 회식 이야기를 꺼내 든 건 정확히 퇴근이 30분 남았을 무렵이었다. 모처럼 야근 없이 칼퇴근이라며 신이 나 있던 직원들이 약속이나 한 듯 표정을 구겼지만, 늘 그렇듯이 신 부장은 그저 해맑은 얼굴로 장소와 시간을 통보할 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오게 된 곳은 호텔에서 멀지 않은 먹자골목 언저리에 위치한 소고기 전문점이었다. 예약된 룸에 들어가 적당히 자리를 나눠 앉는 직원들의 얼굴엔 뒤늦게 설렘이 깃들었다.

어쨌거나 공짜로 먹는 비싼 고기의 앞에선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어느덧 불판 위에서 구워지는 고깃덩이와 주거니 받거니 오가는 술잔의 조화만으로도 회식 자리는 흥겹게 물들어 갔다. 점차 무르익어 가는 분위기에 적당히 장단을 맞추던 수진은 직원들이 한창 떠들어 대는 틈을 타 술잔을 내려놓고 소지품을 챙겨 들었다.

“왜? 어디 가게?”

“잠깐 앞에서 바람 좀 쐬려고요.”

“오, 애인한테 연락해 주려고? 그래. 얼른 다녀와. 금방 2차로 자리 옮길 거 같으니까.”

음흉하게 웃어 보이는 나 과장의 말에 굳이 부정은 하지 않고 슬그머니 식당을 빠져나와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가득한 주변 길목을 어슬렁거렸다.

“하아, 피곤하네.”

꽤나 바쁜 하루였다. 그래서 무사히 보낸 날이었다. 생각이 많아 봤자 좋을 게 없는 이런 날엔 정신없이 밀려드는 일에 치여 허덕이는 게 차라리 나았으니까.

“그나저나 이 시간에도 바쁜가?”

어느 틈에 수진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마음은 오늘 하루 정도 그를 실컷 애태우고 싶었지만, 그게 가능할 리 없다는 건 그녀 자신이 더 잘 알았다. 최소 반나절은 참아 보려 했던 호기심은 결국 한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어떡하지. 지금 보고 싶어 죽을 거 같은데.]

그리고 도착해 있던 메시지에 그녀는 소리 없이 웃어 버렸다. 당최 밀고 당기기라고는 할 줄 모르는 그가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심지어 그런 면에선 저 역시 다를 것도 없었다. 이래서 천생연분인가, 싶을 정도로.

이후로도 일하는 짬짬이 그에게서 두 건의 메시지가 더 도착했다. 특허권 획득 확정 소식을 듣자마자 천안을 출발해 서울에 도착했고, 이제 곧 회의를 진행할 거란 메시지가 오전 11시쯤. 그리고 본사와 호텔을 오가는 일정을 해치우고 곧 회장님과 늦은 점심을 함께할 거란 내용의 메시지가 도착한 게 오후 3시경이었다.

그리고 회식 장소로 출발하기 전, 그녀가 지금의 회식 건을 보고한 것을 끝으로 두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더 이상의 메시지는 없었다. 바쁜 일이 있겠거니, 생각은 하고 있지만 이상하게 섭섭해지는 이유는 대체 뭔지.

“메시지라도 한 통 남겨 줄 것이지. 보고 싶다더니 말만 잘하고…….”

“아, 김 주임. 여기 있었네?”

난데없이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흠칫한 수진이 잽싸게 휴대폰을 집어넣으며 뒤를 돌아봤다. 이어 잔뜩 취해 비틀거리며 서 있는 최 대리를 발견한 그녀의 표정이 정색하며 굳었다.

뭐지. 이 쎄한 느낌은?

“대리님? 왜 나오셨어요? 식사 더 하지 않으시고요.”

“그게. 저기…… 내가 김 주임한테 꼭 할 말이 있어서. 그러니까 꼭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 하는 말인데.”

아니, 그거 하지 마.

평소에 못 한 말이면 술 처먹고도 하지 말란 말이다.

왜 항상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를 않는 걸까. 안타깝게도 세상엔 술만 들이부으면 없던 용기가 솟구치고 찌질함도 동반 상승 하는 부류가 있다. 그리고 최 대리는 정확히 그런 유의 인간이었다.

최 대리가 제게 호감이 있다는 것쯤은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만, 늘 주변을 맴돌며 변죽만 울려 대는 사람이라 별일은 없을 줄 알았다. 그냥 뒀으면 아마 죽기 직전까지도 옆에서 헛소리만 늘어놨을 인간이었다.

그런 그가 변한 건 정확히 그녀가 반지를 끼고 사무실에 들어섰던 날부터였다. 그날 오후부터 갑자기 세상의 온갖 시름을 다 짊어진 양 축 처져서는 툭하면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어 대는 통에 처음엔 다들 집에 우환이라도 들었나 생각했었다. 물론 자신이 그리 매력 없냐는 둥, 세상 믿을 여자 없다는 둥 개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하면서 모두가 단박에 그 이유를 알아 버리긴 했지만.

솔직히 그녀로서는 난감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대놓고 치정 싸움을 했으면 했지, 저렇게 혼자 상처받은 척 세상 가련한 얼굴로 시름시름 앓아 대고 있으면 사정을 아는 사람들의 눈엔 이 상황이 얼마나 우스워 보이겠는가.

더군다나 미치겠는 건, 그게 정말로 앓는 게 아니라 그러는 척 연기하며 주변의 관심을 끌려는 티가 팍팍 난다는 점이었다.

‘아주 비련의 주인공 납셨네. 정떨어지게 왜 저래, 정말. 쇼를 할 거면 혼자 망가질 것이지 애꿎은 사람까지 웃음거리 만드는 건 뭔 심보야? 왜 저러는 거냐고?’

그 꼴을 지켜보던 나 과장이 혀를 끌끌 차며 내놓은 말이었다. 그나마 사무실 사람들은 돌아가는 사정을 다 꿰고 있으니 망정이지, 자칫하다간 이상한 사람으로 몰리기에 딱 좋은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회식 자리에서도 멀쩡한 고기 안주를 두고 깡소주를 들이켜는 생쇼를 벌이고 있는 것이 참으로 꼴값이구나,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젠 술김에 고백까지 할 기세다. 이쯤 되면 그의 정강이에 사커 킥을 날려 버린대도 당당히 무죄 판결을 받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알 거 다 아는 나이니까 딱 까놓고 하는 말인데, 나…….”

“아니요. 하지 마세요. 저는 대리님한테 듣고 싶은 말 없어요. 그러니 아무 말 하지 마세요. 안 들어가실 거면 제가 먼저 들어갑니다.”

냉정히 그의 말허리를 잘라 낸 수진이 그를 비껴 지나가려 했을 때였다. 황급히 움직인 최 대리가 앞을 가로막는 바람에 수진은 크게 움찔하며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마터면 그의 가슴팍과 정면으로 부딪칠 뻔한지라 더더욱 불쾌감이 치솟았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자, 잠깐만. 잠깐이면 돼. 수진 씨, 정말 애인 생긴 거야? 비싼 반지 좀 받았다고 냉큼 그놈한테 넘어간 거냐고!”

“애인이 생기건 말건 그게 대리님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그리고 함부로 말 놓지 마세요. 저 대리님이랑 그렇게 친한 사이 아니고, 회식도 엄연히 업무의 연장이에요. 지금은 업무 시간이나 다름없는 때니 공과 사는 지키셔야죠.”

짜증을 가득 담아 내뱉는 말에도 최 대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만 이어 갔다.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해? 우리가 알고 지낸 지가 벌써 몇 년인데. 솔직히 수진 씨도 나한테 호감 있었으면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아니지!”

“무슨 소리예요! 한 번도 그런 적 없으니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뭐, 뭐야? 그런 적이 없긴 왜 없어? 만날 나 일하는 거 챙겨 주고, 내가 부탁하는 거 다 들어주고 했던 건 뭔데?”

“그건 대리님이 던져 놓고 나 몰라라 하니 어쩔 수 없이 한 거죠!”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챙겨 주고 그러나? 내가 말 안 한 것까지 전부 챙겨 주고 한 건 그건 나한테 여지를 준 거 아니야?”

와, 미치겠다. 순간 뒷골이 띵해 수진은 잠시간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추스르곤 차분히 말을 이었다.

“뭔가 대단히 오해를 하신 거 같은데, 제가 대리님 일 도와드린 건 다른 이유가 없어요. 대리님이 일을 제대로 못 하면 그게 결국 제 일로 돌아오거나 곤란한 상황으로 이어지니까 그걸 방지하는 차원에서 도운 거뿐이라고요. 그냥 ‘제가’ 곤란해서요. 아시겠어요?”

이걸 이렇게 일일이 설명하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 몹시 짜증스럽고 불쾌했다. 어떤 여지조차 준 적 없었는데도 그걸 제 탓이라 몰아붙이는 뻔뻔함에 화가 치밀었다.

“그리고 전 오랫동안 좋아해 온 사람이 있고, 아시다시피 지금은 그 사람이랑 사귀는 중이에요. 죄송하지만 최 대리님을 단 한 번도 이성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을뿐더러 제 취향도 아니세요. 그 사람이 없었다 해도 최 대리님과 사귀거나 하는 일 따윈 절대 없었을 거예요. 그러니 앞으로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거, 사양하겠습니다. 멋대로 제 마음 오해하는 것도 굉장히 불쾌하니 알아서 정리하시고요.”

좋게 말해선 들어 줄 사람이 아니었다. 이젠 그의 자존심을 존중해 줄 마음도 없어진 수진이 할 말을 마구 쏟아 내고 돌아서려 했을 때였다. 역한 술 냄새가 훅 풍겨 온다 싶더니 갑자기 돌변한 최 대리가 그녀의 팔을 덥석 움켜쥐었다.

“어딜 가! 사람 이렇게 건드려 놓고 아니라고 발뺌하면 다야?”

“뭐 하는 짓이에요, 지금! 이거 놔요!”

수진은 기겁하며 손을 뿌리치려 했다. 남자치고 마르고 왜소한 데다 술에 취한 사람이라 금방 뿌리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꿈쩍도 않는다.

심지어 억지로 팔을 당기며 끌어안으려 드는 통에 더더욱 기겁한 그녀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렀다.

“악! 엄마앗!”

“지금 뭐 하는 겁니까?”

그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움찔한 최 대리가 그녀의 팔을 놓았다. 동시에 후다닥 그 품을 빠져나온 수진이 적절한 순간에 나타나 준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곤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