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5/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75화

짧게 덧붙인 수진이 이윽고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피하기만 하는 건, 날 좋아해 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았거든. 뻔히 그 마음을 아는데 외면하는 거. 그거 상대한테 엄청 상처 주는 일이더라. 정말 해선 안 되는 짓이고.”

“…….”

“오늘 너를 만난 것도, 피하고 싶지 않아서였는데……. 이게 정말 잘한 행동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 판단이 안 서네.”

솔직한 감상을 내놓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인 수진이 다시 연희를 바라봤다. 연희가 저질렀던 일도. 지금 제 앞에서 보이는 태도도. 전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편으론 그녀가 뭘 바라고 그런 행동을 했던 건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친한 친구도, 호감 가는 남자도 잃고 싶지 않았던 욕심 많은 그녀로서는 정말 그게 최선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나도 너 참 많이 좋아해. 그래서 인지 부조화가 오는 거 같아. 아직도 너랑 이런 일로 갈등을 빚고 있다는 게 실감이 잘 안 나. 지금이라도 내가 물러나면 다시 너랑 가장 친한 친구로 지낼 수 있을 거 같고, 그러네.”

일말의 가능성을 기대하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기막혀서 웃음이 났다.

“그런데 아니잖아. 이젠 그거 힘들게 됐잖아.”

관계의 끝을 확정 지은 순간, 커다란 선물 하나를 잃어버린 것처럼 가슴이 휑했다. 그러나 이젠 아무것도 돌이킬 수가 없었다.

“네가 정말 날 친구로 생각했다면, 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나한테 이러지 말았어야 해.”

둘도 없는 인연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진심이라 믿었던 우정은 모래톱 위의 사상누각이었음을 알아 버렸다. 하지만 그 사실에 굳이 분노하거나 좌절하며 제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너. 한때 내가 걔를 포기하고 널 선택했었다는 거. 그만큼 널 좋아했다는 거는 절대 잊으면 안 돼. 그건 네가 평생 품고 있어야 할 빚이야.”

차분히 말을 마친 수진이 물끄러미 연희를 바라봤다. 모든 정리를 끝낸 건조한 시선이 무감한 눈동자에 맞부딪쳤다.

“그러니까 이번엔 네가 물러나 줘.”

“…….”

“친구로서 하는 마지막 부탁이야.”

* * *

두 개의 찻잔이 놓인 테이블 앞엔 한 여자가 멍하니 앉아 있었다. 다 식어 버린 차가 담긴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한참 동안 허공에 시선을 던지고 있는 여자의 곁으로 직원 하나가 조심스럽게 기척을 죽이며 다가섰다.

“저기, 손님. 뭐 필요한 거라도 있으세요?”

“아,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이제 일어나려던 참이었어요.”

너무 오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수진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며 짐을 챙겨 들었다. 몸을 돌리려다 거리를 가늠하지 못하고 테이블을 건드리자 찻잔이 크게 흔들리며 달그락 소리를 낸다. 흠칫 놀란 직원이 재빨리 그녀를 붙잡아 주려는 걸 얼른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

괜찮다고. 죄송하다고. 연신 사과하며 자리를 빠져나오는데 문득 허탈한 숨이 새어 나왔다. 좋은 결과는 아닐 거라 예상은 했지만, 저 자신조차 가늠 못 할 만큼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자꾸만 머리가 멍하고, 온몸이 물에 푹 잠긴 것처럼 둔했다. 지금은 그냥 빨리 집에 돌아가 눕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레스토랑을 나서고 엘리베이터의 숫자판을 바라보며 또다시 멍해 있는데,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내려섰다. 위로 더 올라가는 중이라는 걸 확인했기에 자리만 살짝 비켜 주고는 그대로 또 바뀌어 가는 숫자만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아까 내린 사람이 아직도 제 옆에 서 있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가 멈칫했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혁아.”

“얼굴이 왜 그 모양이냐?”

“여긴 어떻게 알고…….”

난데없는 친구의 등장에 이상하게 울컥해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어떻게 알긴. 준성이가 보내서 왔지.”

“…….”

“분명 어디선가 이렇게 멍때리고 있을 거라더니 진짜네. 사람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아주 넋이 나가 가지곤 누군지도 모르고.”

“…….”

“너 그러고 다니다 누가 잡아갈까 봐 걱정되니까 빨리 가 보라더라.”

부러 익살맞은 투로 내놓은 말임에도 이상하게 목이 꽉 잠겼다. 뭔가 대꾸하는 순간 목구멍을 막고 있는 것이 그대로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렇게 아무 말도 못 하고 바라보기만 하자 수혁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다 알고 있다는 얼굴로 피식 웃어 보였다.

“몰랐냐? 걔 완전 스토커야. 네가 서울 바닥 어디에 있든 10분 내로 찾아 버릴걸? 독한 놈이 집요하기까지 하니 너도 도망치긴 글렀다.”

“…….”

“그러니까 그런 표정 하지 말라고. 준성이 놈 가슴 찢어지니까.”

눈가로 훅 열기가 몰려들더니 기어이 눈물이 차올랐다. 울지 말라고 하는 말에 더 눈물이 터져 버렸다. 그런 수진을 바라보던 수혁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그녀의 뒷머리를 당겨 제 어깨에 댔다.

“오늘만 빌려주마. 준성이도 딱 여기까지만 허락했어. 그러니 걱정 말고, 다시없을 기회니까 마음껏 써라.”

그런 와중에도 한다는 소리에 웃음이 났다. 그렇게 잠시 웃었다가 다시 뜨겁게 차오르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수진은 수혁의 팔을 붙잡았다. 한참 동안 가슴에 쌓인 설움을 모두 토해 낼 때까지 수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그 자리에 함께 있어 줬다.

* * *

집에 돌아가는 길은 혼자였다. 데려다주겠다는 수혁을 괜찮다며 끝내 돌려보내고 돌아선 길이었다. 터덜터덜 걷는 걸음 사이사이, 잔뜩 흐린 밤하늘 언저리가 얼룩덜룩한 빛으로 물들어 있는 광경을 몇 번이나 봤는지 셀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길게 토해 낸 숨이 하얗게 부서졌다.

‘그럼 이제 우리 더 볼 일은 없는 거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저를 바라보던 연희가 내놓은 말이었다. 그러고는 주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연희는 처음 그녀를 봤을 때처럼 싱긋 웃어 보였다.

‘그만 약속 시간 돼서. 먼저 일어날게. 잘 지내.’

‘그래. 너도 잘 살아.’

끝내 제 말에 대한 답변은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답은 충분했다. 그렇게 돌아서는 연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불쑥 말했다.

‘그동안 고마웠어.’

내 친구 해 줘서. 의지할 존재가 되어 줘서.

다음 말은 그렇게 입안에만 머물렀다. 그 순간 왜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는 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조금은 충동적으로 내놓은 말이었지만, 실수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잠시 멈칫한 채 반쯤 뒤를 향하던 얼굴이 다시 정면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더 이상 대답은 없었다. 그대로 레스토랑을 빠져나가는 연희의 뒷모습을 바라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생각처럼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도리어 실컷 울고 났더니 속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하고 잠도 잘 왔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대로 자리에 누운 그녀는 다음 날 아침까지 아주 푹 잠을 잤다. 그동안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고민해 온 걸 보상받듯 아주 달콤한 꿀잠이었다.

그리고 익숙한 알람 소리에 눈을 떴을 때는 뭘 그렇게 묻어 버리고 싶었던 건지 세상이 온통 하얀 눈에 뒤덮여 있었다.

“……아 뭐야. 미쳤나 봐. 뭔 눈이 이렇게 왔어.”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오늘도 출근해야 하는 직장인의 입에서 긴 탄식이 새었다.

제 삶에 무슨 대격변이 일었든, 세상은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 사실을 처음 깨달은 건 출근 준비를 모두 마치고 현관으로 향하며 무심코 휴대폰으로 오늘의 뉴스를 확인했을 때였다.

“어?”

떡하니 뉴스란의 메인에 떠 있는 기사를 확인한 그녀의 입가로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호텔 라비타가 시내 면세점 특허권을 따냈다는 소식은 빠르게 온 세상을 휩쓸었다. 눈밭을 헤치며 출근하는 길에 마주친 사람들도, 곧이어 도착한 사무실의 직원들도 이미 그 이야기를 떠들어 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떻게 이 조건을 뒤집은 거지? 왜, 이번엔 정말 힘들 수도 있다고 난리들이었잖아.”

“누가 아니래요. 비자금 건으로 그렇게 죽일 듯이 까였는데. 진짜 무슨 수도꼭지도 아니고 뉴스만 틀면 그 소식부터 시작했었잖아요. 덕분에 우리 회사 이미지만 개판 되고. 아, 김 주임님 오셨어요? 우리 면세점 통과한 이야긴 들으셨죠?”

탕비실 앞에 삼삼오오 모여 한창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 민 주임과 민영. 유리를 발견한 수진이 슬쩍 그 옆을 지나치려는데 유리가 재빨리 알은척을 해 왔다. 어쩔 수 없이 싱긋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거야 뭐 뉴스로 봤지. 잘된 일이긴 한데, 우리가 이렇게 좋아할 일은 아니지 않아?”

“헐! 소식 못 들으셨어요? 이거 완전 대박인데요, 우리 회사가 이번에 면세점 따낸 거, 그거 다 상무님 공이래요.”

아니, 그것도 굳이 우리랑은 관련 없는 일인 건 똑같다니까.

차마 진실을 내뱉지 못하고 그냥 웃어 보였다. 역시나 그들이 열광하는 이야기의 진짜 주제는 상무님이었다. 면세사업부에 아는 직원이 있어 들은 이야기라며 유리는 무슨 영웅의 서사시라도 읊어 대듯 준성의 행적을 줄줄이 입에 올려 댔다.

여러 가지 악재가 겹치며 꽤나 불리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업 계획서를 충실히 이행하며 점수를 딴 것도 그의 공이고, 그것도 모자라 프레젠테이션 현장에서는 맹공격을 퍼붓는 심사 위원들 앞에서 쩔쩔매는 이 대표를 대신해 모든 공격을 무찌르고 기어이 막판 뒤집기에 성공했다는 게 잔뜩 흥분해 5분 동안 떠들어 댄 이야기의 요지였다.

“다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데 거기서 딱 등장하더니 엄청 당당하게 한마디도 빠짐없이 대답을 다 하셨대요. 그러고선 떳떳하게 모든 죗값 다 치르고 앞으로 확실히 재발 방지에 힘쓰겠다는데 누가 더 뭐라 그러겠어요. 그것도 심지어 회장님 아들이, 미래의 회장님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인데. 그건 그냥 게임 끝난 거죠. 어우우! 멋있어, 멋있어.”

어째 목소리가 서라운드로 들린다 했더니 그새 끼어든 민영이 휴대폰 화면을 들이밀며 함께 ‘멋있어, 멋있어’를 부르짖어 대는 중이었다.

“주임님, 주임님. 여기 뉴스 좀 보세요. 아니, 세상에 무슨 기사 사진이 이렇게 잘 나와요? 이건 진짜 아이돌 홈마들도 사진 찍다가 현타 올 거 같지 않아요? 무슨 보정이고 뭐고 필요가 없잖아요. 진짜 피부가 무슨 와…….”

“난 진짜 상무님 피부 부럽긴 하더라. 나도 한 피부 하는데 보면 나보다 좋아 보이더라고. 어쩜 이렇게 적나라하게 다 찍혔는데도 모공 하나 안 보이나.”

불쑥 끼어든 민 주임이 공감해 주자 민영은 꺅꺅거리며 좋아했다.

“그쵸, 그쵸? 진짜 볼 때마다 새삼스럽게 잘생기셨어요. 이젠 잘생겼다고 말하기도 지칠 정도예요.”

“우리 상무님. 부디 들숨에 잘생김. 날숨에 까리함만 내뱉으시고 오래오래 만수무강해 주세요.”

“정말 사랑하고 존경하고 장관이고 절경입니다.”

결국 기승전‘주접’으로 끝나는 대화를 뒤로한 채 수진은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슬쩍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제 기쁜 마음도 그녀들 못지않았지만, 이래저래 바쁜 그와는 바로 연락이 닿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축하의 메시지만을 보내 둔 상태였다.

[축하해. 잘해 낼 줄 알았어.]

기사를 확인하자마자 현관에 선 채로 부랴부랴 메시지를 작성했었다. 이런저런 할 말이 너무도 많아 수없이 긴 말들을 적었다가 지우기를 반복한 끝에 남긴 말은 짤막한 축하 인사뿐이었다. 통화라도 한다면 모를까, 문자로는 이 감정을 제대로 전달하는 게 불가능해 보였다. 차라리 직접 얼굴을 보고 진심을 다해 축하해 줄 생각이었다.

[빨리 보고 싶어. 나 너한테 해 주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뒤이어 메시지 하나를 더 보내 놓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전철을 타며 이동하는 짬짬이 확인했을 때만 해도 답이 없었는데 사무실에 들어오는 사이 메시지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이야기가 길어질 거 같네요. 방부터 잡고 연락 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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