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방 잡을까요?
74화
같은 시각.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해 있던 수진은 초조한 얼굴로 찬물을 들이켰다.
연희에게 모든 걸 털어놓으려 결심하고서 최대한 빨리 행동에 옮기려 했지만, 이래저래 사정이 여의치가 않았다. 연말연시는 한창 바쁜 시기였고, 연희 역시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할 일이 많은 탓이었다. 결국 서로의 시간을 조율해 저녁 식사라도 함께하자는 약속을 잡은 건 그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은 날로부터 꼬박 일주일이나 지난 다음이었다.
“오래 기다렸지? 차가 좀 막혀서 늦었어, 미안.”
“아니야. 나도 온 지 얼마 안 됐어.”
반가이 웃으며 다가오는 연희를 맞이하며 수진은 긴장으로 굳은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천진할 정도로 환한 웃음을 마주 대하려니 묘하게 가슴팍이 따끔거렸다.
메뉴판을 들고 온 직원에게 수진은 입맛이 없다며 허브티 한 잔만을 주문했고, 연희 역시 자신도 늦잠을 자 마지막 식사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며 커피를 주문했다. 앞으로 해야 할 이야기는 편히 식사를 하며 나눌 내용이 아니라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수진이 넌 요즘 뭐 하고 지냈어? 본가엔 못 다녀간 거지?”
“그렇지 뭐. 구정 연휴 때나 시간이 나려나. 너야말로 엄청 바빴을 거 같은데.”
“어우, 말도 마. 얼굴 한번 보자는 사람이 한둘이어야지. 몇 개월 치 약속을 한 번에 해치우려니까 사람 할 짓이 아니야.”
연희는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키득거렸다. 두루두루 넓게 사람을 만나는 연희를 잘 아는지라 절로 싱거운 웃음이 새었다. 만나기 전까진 제 불편한 마음이 겉으로 묻어날까 봐 신경이 쓰였는데, 막상 얼굴을 마주하니 언제 그런 걱정을 했었나 싶을 만큼 아무렇지 않게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쌓인 이야기를 실컷 풀어놓았다. 재잘재잘 이어진 수다는 온갖 주제를 맴돌고서 자연스럽게 과거로 향했다. 주문한 차가 나온 건 한창 대학 시절의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였다.
“그치, 그치? 아, 진짜 그때로 다시 돌아갔으면 좋겠다. 요즘 자꾸 그때가 그리워지는 게 이제 나도 나이 들었나 보다 싶어. 왜, 그런 말 있잖아. 나이 들면 미래보단 추억에 매달려 산다고.”
“에이, 우리가 아직 그럴 나이는 아니지. 100세 시대면 앞으로 살날이 얼마나 많이 남았는데 벌써 그러냐.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이 현실이야, 이젠.”
싱거운 말을 웃으며 잘라 내자, 연희는 왠지 시무룩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이더니 테이블에 양 팔꿈치를 올리며 턱을 괴었다.
“그런가? 그런데 난 요즘 왜 이렇게 옛날이 그립나 모르겠어. 겨울 타나?”
“응. 겨울 타는 거야. 너 매년 딱 낙엽 떨어질 때만 되면 옆구리 시리다고, 연애해야겠다고 그랬었잖아.”
“그랬지. 그래 놓고 한 달이 뭐야. 일주일도 안 가서 때려치웠고.”
연애를 했다고 하기에도 민망한 경험담이 툭 튀어나와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미묘한 정적이 찾아왔다. 아마도 이 순간, 같은 화제를 떠올렸을 걸 짐작한 수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실은 나, 오늘 너한테 진짜로 해야 할 말이 있어서 연락했어.”
차분히 꺼낸 말에 연희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좀 갑작스럽겠지만…… 네 약혼이랑 관련된 이야기야.”
준성과 함께했던 한 해의 마지막 날. 이미 두 사람이 한차례 만남을 가졌었고, 거기서 그가 약혼 건을 딱 잘라 거부하고 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온 다음이었다.
“그때 너한테 전화로 이야기했었지? 네가 놀랄 만한 소식이 있다고. 꼭 네 얼굴 보고 해야 할 이야기라고.”
단호히 잘라 내 준 준성의 마음은 고마웠지만, 한편으론 면전에서 냉정히 거절당해야 했을 연희의 마음도 좋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러웠다. 말을 멈춘 채 잠시간 생각을 가다듬고 난 수진은 이어 차분히 그 말을 꺼냈다.
“나, 지금 준성이랑 사귀고 있어.”
“…….”
“미리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연희야.”
말을 마친 수진이 연희를 바라봤다. 어느덧 웃음기가 사라져 버린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가만히 저를 바라보는 여자의 눈빛에서 생생한 감정이 느껴졌다.
그러나 예상했던 놀라움이나 배신감 따위의 감정은 아니었다. 미묘하게 웃어 보이는 그녀의 표정에서 읽어 낸 건 깊은 실망감 내지는 체념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꼭 그렇게 그 말을 해야 했니.”
“뭐?”
이어 나지막이 튀어나온 질문을 언뜻 이해하지 못한 수진이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물끄러미 수진을 바라보며 묘하게 씁쓸한 웃음을 짓던 연희가 이윽고 앞에 놓인 커피 잔을 집어 들었다.
“그날 무슨 일 있었는지도 다 듣고 온 것 같네. 걔가 내 앞에서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있다고 한 것도.”
“…….”
“실은 이미 그때 눈치챘었어. 아, 이거 수진이구나. 얘네 연애하고 있었구나. 걔 되게 옛날부터 일편단심이었잖아. 다른 여자라곤 돌멩이로 아는 애가 결혼까지 하고 싶다는데, 내가 어떻게 몰라.”
역시나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이해한 뜻이 맞는지 선뜻 믿기지 않았다. 잠시 혼란스러운 얼굴로 연희를 바라보던 수진이 뒤늦게 다시 물었다.
“그건 무슨 뜻이야? 꼭 네가…… 준성이 마음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맞아?”
“그렇게 눈에 띄게 너만 챙기고, 너만 찾고, 그런 걸 매일 봤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넌 몰랐겠지만 그때 나 말고 다른 여자애들도 대부분 눈치챘었어. 그걸 굳이 입 밖으로 꺼내면 기정사실화될까 봐 말을 아낀 것뿐이지.”
그 순간 뜬금없이 저를 찾아와 무슨 과의 잘나가는 여신이 그에게 고백했다는 둥, 또 어떤 예쁜 선배와 사이가 좋아 보이더라는 둥 낭설을 주워섬기던 동기들이 떠올랐다. 그땐 감히 그걸 확인해 볼 처지가 아니라 생각해서 속으로만 씁쓸해하고 넘어갔었는데…….
“맞아. 그때 걔들이 이상한 소문 엄청 물어다 줬었잖아. 그거 다 너 견제하느라 그런 거고. 유치하게 뭐 하러 그런 짓까지 하는 건지.”
그녀들과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던 연희의 입가로 슬쩍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냥 나처럼 솔직히 말하면 바로 해결될 일을.”
“…….”
“그래서 더 아쉬워. 이번에도 그냥 모르는 척하고 기다리고 있으면, 너 스스로 물러날 줄 알았거든. 그때처럼.”
천천히 남은 말을 마저 꺼내 놓은 연희가 아무렇지 않게 커피 잔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음미하듯 커피를 마시는 표정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녀가 그런 얼굴로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준성이한테 관심 있다는 말에 네가 그랬었잖아. 걘 내 취향 아니야, 라고.”
“……알고 있었어?”
물끄러미 연희를 바라보는 수진의 얼굴은 이미 차게 굳어 있었다. 그런 수진을 바라보는 연희의 입가로 다시 피식거리는 웃음기가 떠올랐다. 지금껏 흔히 봐 왔던 그녀 특유의 환한 웃음과는 결이 다른 감정이 묻어나는 웃음이었다.
“어. 알고 있었어. 네가 준성이 쭉 좋아했던 거.”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알고 있었다고? 알면서 그럼 그때…… 나한테 그걸 물은 거고?”
조금의 악의도 없이 무구하기만 한 눈동자와 시선이 닿은 순간, 굳이 대답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하는 말의 의미는 충분히 알고도 남았지만, 제 머릿속은 마치 그 말을 믿고 싶지 않은 것처럼 반응하고 있었다.
혹시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깊은 뜻이 있었던 건 아닐까. 아니면 제가 뭔가를 잘못 들은 건 아니었을까, 하고.
“너무 나쁘게 생각하진 마. 나로서는 그게 최선이었거든.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해서 우리 사이가 더 돈독해진 것도 사실이잖아.”
기막힌 궤변에 절로 헛웃음이 났다. 언뜻 들어선 그 말이 틀린 것처럼 느껴지지 않아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한때는 어린 시절의 상처를 연희에게 털어놓고 위안받으며 많이 치유되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진심으로 믿고 의지할 친구가 생겼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연희는 그 모든 것을 알고도 아무렇지 않게 제 위축되는 마음을 이용했다. 제가 어떤 대응을 할지. 그 순간 누구를 선택할지 이미 다 알고 말을 꺼낸 거였다.
“내가 이걸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니?”
정말로 알 수가 없어 물었다. 연희는 왜 굳이 이 시점에 그런 말을 꺼낸 걸까. 분명 제가 상처 입으리란 걸 알고도 남을 텐데, 왜 말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사실까지 굳이 입에 올려 가며 제게 이런 충격을 주는 걸까.
답은 하나뿐인데 인정하고 싶지 않았나 보다. 허탈하게 웃어 버린 순간, 그녀를 태연히 바라보고만 있던 연희가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차분히 입을 열었다.
“난 네가 참 좋아, 수진아. 살면서 내가 유일하게 진짜 친구라고 생각해 본 사람은 너뿐이었어.”
“…….”
“그래서 참 안타깝다. 이 상황이.”
철저히 제 마음을 이용하고 기만해 왔다는 걸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고서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일 뿐이었고, 그저 이런 식으로 깨진 우정이 안타깝다고만 한다. 이런 연희를 난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어차피 이 약혼은 하게 될 거야. 물론 나 역시 굳이 이 약혼을 깰 마음은 없어. 그러니까 괜히 더 상처받지 말고 여기서 네가 물러나. 이건 친구로서. 진심으로 네가 걱정돼서 해 주는 말이야.”
놀랍게도 연희는 그 모든 게 진심이었다. 친구를 향한 애정도 진심이었고, 이젠 예전 같을 수 없는 지금을 애석해하는 마음 또한 진심이었다.
“지금 주변 상황이 어떤지 알고는 있지? 아마 내가 가진 게 많이 도움이 될 거야. 최종적으로는 아무 문제 없이 걔를 회장 자리에도 올려놓을 수 있을 거고. 하지만 넌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 아니, 오히려 큰 약점이 되겠지.”
뼈아픈 현실을 참으로 친절히도 짚어 준다. 전혀 달갑지 않은 친절에 절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이미 그걸 누구보다 잘 알아서 문제였다.
“물론, 이 결혼이 준성이한테 꼭 필요한 건 아니야. 도움이 될 뿐이지, 하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커지진 않거든. 그래서 준성이도 그런 반응을 보인 거고. 그런데 너와의 결혼은 다를 거야. 그런 집안의 남자가 굳이 아무 배경도 없는 평범한 상대와 결혼하는 건 스스로 입지를 낮추는 일이나 다름없거든. 문제는 준성인 너랑 함께할 수만 있다면 추락이라도 불사할 거란 점이지.”
이 역시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공개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낸 한 사장뿐만이 아니라도 그룹 후계자의 자리를 노리는 이들이 과연 한둘일까. 만약 그의 기반이 조금이라도 흔들렸다간 그들은 절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피라냐 떼처럼 몰려들어 물어뜯어 댈 테지.
“걔가 생각하는 수준의 추락은 네가 알고 있는 그런 밑바닥을 뜻하는 게 아니야. 걔도 결국은 재벌가 사람이거든. 뼛속까지 풍족해서 진정한 의미의 바닥은 몰라. 평생을 그룹 후계자로 살아온 애가 너를 위해서 모든 걸 버리고 나올 수 있을까? 아니. 걔는 절대 못 해. 그럼 결국 상처 입고 버림받는 건 네가 되는 거야.”
“알고 있어, 나도.”
가만히 듣고만 있던 수진이 딱 잘라 내듯 말했다.
그 모든 걸 알고 있어서 계속 고민했었다. 계속 밀어내고 상처를 줬었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 더는 상처 줄 수 없어 그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언젠가는 끝이 온다는 걸 알면서도, 그 짧은 순간이나마 함께하고 싶은 욕심이 컸기에 그의 곁에 있기로 결심했었다.
“알고 있지만, 그런 이유로 아무것도 안 하는 건 너무 무책임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