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방 잡을까요?
73화
부러 얄궂게 웃으며 덧붙이고는 그를 바라봤다. 변함없이 저만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좋다. 세상 무엇도 필요 없다는 듯 열렬하게 시선을 보내는 남자와 마주하고 있으면 이렇게나 사랑받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나 행복했다.
그 전에 이 남자의 얼굴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천국에 온 기분이긴 하지만.
“……진짜 아쉽다. 여기서 너랑 그냥 식사만 해야 한다는 게.”
허기진 듯 살짝 날 선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꽂혀 들었다. 그 시선을 피하지 않는 것으로 무언의 동의를 표한 그녀는 이윽고 능숙하게 겹쳐 오는 입술을 받아들였다.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며 자연스럽게 소파로 올라탄 그가 부드럽게 입술을 머금고 비벼 가며 틈을 연다. 버드 키스보다는 짙고, 프렌치 키스보다는 얕은, 서로의 입술과 입안의 여린 살갗만을 간질이는 달콤한 입맞춤 사이로 나직한 웃음이 새었다.
“읏, 그럼 어떡해. 룸서비스도 주문했다며. 슬슬 올 시간 되지 않았어?”
“지금 전화하면 좀 늦출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래서 설마, 으, 흠…… 으 잠깐, 여기서 하자고?”
다시 제 입술에 포개지려는 남자의 입술을 피하며 묻자, 목적지를 놓친 입술이 집요하게 따라붙으며 대꾸한다.
“이 방은 뭐가 다른가? 아, 혹시 소파에서 할 건지 묻는 거였어? 당연히 침대로 가야지. 소파는 생각보다 움직임이 불편하던데.”
“그, 그게 무슨……. 아, 흐, 그게 아니라! 너 저녁 먹으러 잠깐 나온 거 아니었어? 곧 돌아가야 하는데 밥도 먹고 하려면 시간이…….”
“왜. 잠깐으론 모자랄 거 같아?”
“뭐라는 거야, 정말!”
요게 누굴 음란마귀로 보나.
기어이 뻗어 나간 손이 그의 가슴팍을 퍽, 내질렀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크게 웃음을 터뜨린 그가 다시 자리에 앉으며 그녀의 몸을 끌어당겼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난 우리 사이 공개했으면 좋겠어.”
삐뚜름하던 시선이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물론 네가 먼저 연희와 이야기하고 난 후의 일이 되겠지. 그리고 우리 진지하게 만나고 있다는 거 제대로 공표하고 싶어.”
“…….”
“결혼하자는 말, 치기로 꺼내 본 말 아니야. 한순간 감정에 젖어서 쉽게 내린 결정도 절대 아니고. 그러니 너도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해 줘.”
그녀라고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지 않는 여자가 어디 있을까. 그와 나란히 버진 로드를 걷고, 같은 침대에서 눈을 뜨고, 그를 닮은 아이를 품에 안는 상상을 그녀도 수없이 해 봤다.
하지만 상상만 해 보는 것과 그것을 현실에 반영하는 건 너무도 달랐다. 연희와의 꼬여 버린 인연을 다 정리해 놓는다 해도 더 큰 문제가 버젓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또한 잘 안다.
“좀 더 많이 고민해 보자. 결혼이라는 게 우리만 좋다고 되는 일이 아니잖아. 당장 부모님들께 이야기드리는 것부터도 그렇고……. 사실 부모님 반대 무릅쓰고 결혼한다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니잖아. 인연을 끊을 게 아닌 다음에야.”
그건 가장 먼저 넘어야 할 산이자, 가장 높은 벽이었다. 그 말을 꺼낸 순간부터 시작될 혼돈의 카오스가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만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회장님께서 날 며느릿감으로 생각해 주실 거 같진 않거든.”
“직접 확인하기 전까진 단정 짓지 마. 그리고 아직 제대로 널 보여 드린 적도 없잖아.”
“…….”
“사람 보는 눈은 확실한 분이셔. 분명 널 마음에 들어 하실 거야. 그 점은 아들인 내가 보장해.”
추호의 의심도 없이 진심만을 담아 하는 말이었다. 진심이 가득한 눈을 보고 있자면 정말 그럴까 싶어 순간 혹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는 주제 파악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한 회장이 누군지 모르는 상태라면 모를까. 이미 코앞에서 마주한 경험이 있기에 더더욱 상상이 가질 않았다.
“날 대단하게 봐 주는 건 참 고마운데…… 그건 아닐걸.”
불과 몇 시간 전에 마주했던 눈빛을 떠올리자 가슴속으로 살얼음이 낀 것처럼 한기가 몰려들었다. 제 이름을 물었던 거로 봐선 아직 제 존재에 대해 모르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런 상태로도 간담이 서늘하도록 냉정한 태도였는데, 만약 준성의 약혼까지 깨 버린 후에 마주한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사실은 너무 큰 격차가 두려웠다. 그를 억지로 놓게 될 일이 생기면 어떡하나 무서워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도 늘어만 갔다.
그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럴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제가 이 남자에게 정말 도움이 되는 존재인지는 모르겠다. 아니, 현재로서는 명백하게 그의 앞길에 걸림돌만 되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런 자신이 그 반대를 무릅써 가면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런 반대에 부딪치는 남자는…… 과연 제게 준 마음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알아. 네가 뭘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건지. 이런 내가 부담스럽다는 것도 알고.”
“준성아.”
“내가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그래. 나 자신이 이런 식으로 상품처럼 오르내리는 것도 싫고. 너도 내가 약혼이니 뭐니 하는 일에 엮이는 거 싫지 않아?”
당연히 싫었다. 그럼에도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던 건, 그 일에 끌려다녀야 할 당사자의 심정은 오죽할까 싶어서였다. 예상했던 대로 그 역시 저 못지않게 마음고생을 하고 있었나 보다.
“그렇다고 바로 불지옥에 뛰어들 수는 없잖아. 너희 부모님뿐만 아니라, 사실 우리 부모님도 문제거든. 아마 쉽게 받아들여 주시지 않을 거야. 솔직히 나도 마음 같아선 그냥 너 데리고 확 도망이라도 가고 싶은데, 그럴 순 없잖아.”
그의 집안이라는 벽이 너무도 높아서 간과하기 쉽지만, 제 부모님을 설득하는 것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환영받지 못할 결혼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걸 안다면 당장에라도 저를 고향 집에 끌고 가실 분들이다.
“너나 나나. 그런 짓 못 할 거야. 알고 있지?”
말로는 그가 쫓겨난다면 받아 주마 농담처럼 이야기했었지만,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까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좀 미안해, 너한테. 너무 내 마음대로만 하는 거 같아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은 그의 약혼을 저지하려 마음을 먹었다. 제가 생각해도 앞뒤가 맞지 않아 헛웃음이 날 정도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태도가 어디 있을까.
“네 말대로 먼저 연희부터 만나 보고, 그다음에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 같아. 나한테는 지금 그게 제일 큰 숙제라서 다른 생각은 더 못 하겠어.”
싱긋 웃어 보인 수진이 화제를 돌렸다. 이런 고민은 저 혼자 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몸을 일으키며 식사는 언제 오는 건지,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건지 따위를 물으며 분위기를 환기하려 했을 때였다.
“그래.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돌아서는 그녀의 뒤로 다가선 그가 그녀의 허리를 감아 당기며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다만, 이것만 기억해. 네가 날 놓지 않는 한, 난 절대 널 놔줄 생각 없다는 거.”
“…….”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날 놓지만 말아 줘.”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간절함이 묻어나는 투였다. 대답 대신 뒤를 돌아본 수진이 다시 그를 끌어안았다. 단단한 그의 가슴팍에 뺨을 댄 채 한참 동안 안고, 안겨 있었다.
정말 내가 어쩌다 이렇게까지 이 남자에게 빠져들어 버린 걸까.
날이 갈수록 무럭무럭 커 가는 행복의 크기만큼, 불안이란 이름의 그림자도 무럭무럭 자라났다. 왠지 그와 함께할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사랑의 유효 기간은 2년이라는 말이 다시금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때는 그 짧은 기간 머물렀다 사라질 감정 따위에 어떻게 모든 걸 던질 수 있을까 싶었는데, 지금은 그 2년만이라도 채울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 고민 할 시간에 좀 더 이 남자와 함께 있을 걸 그랬지.
그와 만날지 말지를 고민하며 보낸 세월마저도 아쉽고 안타까워서 한숨이 났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라도 함께하고 싶어서 발버둥을 치는 자신이 참으로 측은해지는 밤이었다.
* * *
1월 둘째 주 수요일.
서울 시내 면세점 대기업군 사업자 발표가 있는 오늘, 준성은 최종 프레젠테이션 심사 진행을 위해 관세국경관리연수원이 있는 천안에 도착해 있었다. 면세사업부의 수장인 이주환 대표와 그의 직속상관인 강창원 전무가 함께하는 자리였다.
오후 8시부터 시작될 심사에 앞서 간단하게 저녁 식사를 하며 최종 브리핑까지 마쳤지만, 내부의 분위기는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았다. 한 사장의 배임 횡령 건에 대한 최종 판결이 또다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탓이었다.
수많은 혐의가 사실로 밝혀지고 그것이 만천하에 공개되었지만, 판결은 고작 징역 2년에 집행 유예 3년. 충분히 7년 이상의 형량이 떨어질 요건들을 두루 갖췄으나, 안타깝게도 법은 공정하게 칼끝을 들이밀지 못했다.
거대 로펌의 힘과 판사 출신 변호사를 향한 전관예우. 그리고 전 국민의 비웃음을 산 휠체어 쇼까지.
그렇게 온갖 편법을 동원해 받아 낸 집행 유예는 오늘 발표를 위해 단상에 올라야 하는 이주환 대표에게 화살이 되어 쏟아질 예정이었다.
“그럼 잠시 통화 좀 하고 오겠네.”
“네. 다녀오십시오.”
침통한 얼굴로 회의장에 도착한 이주환 대표가 본사의 연락을 받고 잠시 통화를 하러 자리를 비운 사이, 가까운 휴게실을 찾은 준성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퇴근했으면 메시지라도 남겨 둘 것이지.”
어젯밤 이후로 새로운 내용이 없는 메시지 창을 보며 괜히 섭섭함을 담아 중얼거렸다. 오늘 아침, 천안으로 출발하기 직전 통화를 했던 그녀는 퇴근하고 연희를 만날 거라 소식을 전해 왔다.
그러니 지금쯤은 연희를 만나 이야기를 하고 있을 시간이긴 한데…….
“……괜찮겠지.”
벌써 수 번이 넘게 입안으로 굴려 댄 말이었다. 일에 집중을 못 할 만큼 공과 사를 구별 못 하는 성격은 아닌지라 일정엔 크게 지장을 주지 않았지만, 이렇게 틈이 나면 머릿속은 순식간에 서울 어딘가에 있을 그녀의 행적을 좇고 있었다. 정말 괜찮을지. 이대로 둬도 되는 건지. 답 없는 고민에 저도 모르는 한숨이 새었다.
그녀가 스스로 일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
다만 어떤 식으로든 상처받게 될 그녀의 마음이 걱정됐을 뿐이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달려가 그녀의 곁에 함께 있어 주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현실이 답답했다. 어쩌면 이런 저를 알기에 그녀는 과감히 오늘을 선택한 건지도 모르겠다. 같은 서울 하늘 아래였다면 분명 저는 어디든 뒤쫓았을 테니.
“아, 여기 계셨네요, 상무님. 강 전무님께서 찾으십니다.”
“아, 네. 잠시만요.”
수행원의 목소리에 깊은 상념에서 깨어난 준성이 다시 휴대폰으로 눈을 돌렸다. 잠시 머뭇거리며 뭔가를 고민하다 이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겁게 운을 떼는 그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어, 나야. 부탁 하나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