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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72/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72화

묻고 싶은 말이 머릿속 가득인데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상하게 가슴이 벅차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자 싱긋 웃어 보인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대로 이끌려 연회장을 빠져나가는데 이상하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행여 아는 누군가가 볼까 가슴을 졸이는 와중에도 미친 것처럼 설렜다. 꼭 마법이라도 부린 듯 가장 보고 싶은 순간에 제 눈앞에 턱 하니 나타나 준 남자가 신기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놀랍고 당황스러운 한편, 기분이 들떴다. 꼭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그가 이끄는 대로 무작정 엘리베이터에 오른 후에도 황당한 일은 계속되었다. 태연히 카드를 꺼내 든 준성이 이어 33층을 눌렀다.

“어? 33층?”

불이 들어온 숫자를 확인한 수진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돌아봤다. 동시에 훅 덮쳐 온 그가 그녀의 입술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미처 피할 새도 없이 꽉 맞물린 입술 사이로 그의 뜨거운 숨이 파고들었다. 놀란 심장이 펄떡거리며 피를 뿜어 댄다. 농밀하면서도 달콤한 키스에 순간 아득했던 머릿속에 반짝, 정신이 돌아왔다.

“으, 흣, 잠깐……!”

소스라치게 놀란 수진이 후다닥 그의 가슴팍을 밀며 뒤로 물러 나왔다. 그러고는 습관처럼 주변을 살피고는 기함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뭐 하는 거야! 누가 보면 어쩌려고.”

“보면 어때서.”

“미쳤나 봐, 정말. 여기 CCTV도 있는데! 소문나면 어쩌려고!”

“알 게 뭐야. 애초에 여기서 키스하는 커플이 한둘도 아닐 텐데.”

“어우! 정말.”

남의 속도 모르고 짓궂기만 한 반응에 저도 모르게 뻗어 나간 손이 툭하니 그의 팔을 쳤다.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타이머가 고장 난 시한폭탄처럼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터져 버릴지 모르는 남자다.

행여 도중에 아는 얼굴이 올라탈까 봐. 또다시 그가 막무가내로 입을 맞출까 봐. 잔뜩 경계하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무사히 33층에 안착했고, 준성은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러고는 여간해선 걸음을 할 일이 없는 방향으로 이동하더니 태연히 룸의 문을 열고 그녀를 안으로 이끌었다.

“여긴 대체 왜…….”

불안해진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떨려 나왔다. 1년의 반 이상은 비어 있는 최고급 스위트룸 중의 하나였다. 하룻밤 숙박비만 최소 천만 원. 이천을 넘나드는 로열 스위트를 제외하면 가장 비싼 룸이라 그녀도 지금껏 딱 한 번, 구경밖에 못 해 봤다.

어안이 벙벙한 그녀를 응접실의 소파에 앉힌 그가 눈높이를 맞춰 몸을 낮추며 싱긋 웃어 보였다.

“저녁 안 먹었지?”

“어? 어. 그러고 보니 아직.”

종일 입맛이 없어 아침은 걸렀고, 점심은 작은 빵 한 조각과 커피가 끝이었다. 그러다 일이 터지는 바람에 바로 본관으로 뛰쳐나와 모든 사건이 해결된 지금까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그런데도 배가 고픈 줄도 몰랐다.

슬그머니 배를 쓸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금세 두 눈에 근심을 가득 담고서 저를 바라본다. 마치 그걸 다 꿰뚫어 본 것처럼 묻는 남자였다. 호텔 내의 웬만한 소식은 순식간에 들어가는 자리니 영진그룹 건 때문에 저를 찾아왔음이 분명했다.

그런데 묻는 뉘앙스가 딱히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그럴 줄 알았어. 일단 여기서 나랑 밥부터 먹자. 룸서비스도 주문해 뒀어.”

제 끼니 챙겨 주는 사람이 제일 반가운 법이라지만, 이런 룸에서 룸서비스라니. 제 머리가 수용 가능한 수준을 넘어선다.

“저기…… 내가 지금 이해가 잘 안 가서 하는 말인데…….”

“그리고 오늘은 여기서 자.”

“…….”

“내가 주는 새해 선물이야.”

절로 입이 떡 벌어졌다. 아니, 이 무슨 돈지랄도 정도껏이어야지. 제가 알기로 이 방에서 숙박을 했던 사람이라곤 귀빈이거나, 재벌가 인사, 고위 공무원 이외 넓게 잡아 봐야 초유명 연예인 외엔 없었는데…… 미친 거 아닌가?

“너 이 방이 얼마짜린 줄……! 아니, 잠깐만. 설마 무단 침입 이런 건 아니지? 넌 마스터키 있잖아.”

“그럴 리가. 정당하게 구매한 거야. 물론 VIP용 할인은 좀 받았지만.”

얼마나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엄지와 검지를 아주 조금 벌려 보이는 걸 보니 굉장히 의미 없는 수치임엔 분명했다.

“와, 세상에. 이 남자 부담스러워서 어떻게 사귀니.”

진심이 가득 실린 말에 픽 웃음을 머금은 그가 그녀의 뺨과 입가를 매만졌다.

“아쉽지만, 난 너 밥만 먹이고 다시 가 봐야 해. 그러니 내일까지 여기서 편히 쉬어. 체크아웃은 김 비서가 할 테니까 걱정 말고.”

정말로 아쉬운 기색이 가득한 눈을 마주한 순간 설핏 피어올랐던 웃음은 이윽고 미묘한 분위기를 감지하며 가라앉았다.

“……왜?”

묵묵히 저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이 깊다. 괜히 목덜미가 후끈해지고 가슴이 찌릿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안달하게 만드는 남자였다. 거침없이 직선으로 꽂혀 드는 시선은 늘 그녀를 안절부절못하게 만들곤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가다듬는 것만도 큰일이었다.

“나 실은 너한테 할 말 있어.”

그런 눈으로 꺼낸 말이었다. 눈빛과는 달리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수진은 가만히 손을 뻗어 그를 제지했다.

“내가 먼저 말하고 싶은데, 괜찮아?”

확신은 할 수 없지만, 왠지 저와 같은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았다. 줄곧 가슴에 걸려 있던 말을. 어쩌면 같은 고민으로 밤을 지새우고 또 힘든 하루를 보내야 했을 남자의 곧은 시선을 마주하며 툭하니 물었다.

“네 약혼. 내가 파투 내도 돼?”

당돌한 물음이 떨어지자 준성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곧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 미치겠네.”

정말로 예상이라곤 할 수가 없는 여자였다. 왠지 알고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런 식으로 반격을 해 올 줄이야.

누굴 만난 거냐고. 왜 그런 일을 숨긴 거냐고, 충분히 따지고 화를 내며 실망할 수도 있는 일인데, 그런 것 따윈 전혀 궁금하지 않다는 듯 결론부터 내놓는다. 심지어 어떻게 할 거냐 묻지도 않고 그녀 자신이 해결해 주겠단다.

이 여자를 정말 어떻게 해야 할까.

대놓고 저를 향한 소유욕을 내보이는 여자가 너무도 사랑스럽다. 이 당돌한 여자가 너무도 욕심난다. 저를 이토록 무력한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여자가 든든하기까지 해서 자꾸만 웃음이 터졌다.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한참을 웃는 동안 수진은 미묘한 표정으로 그를 흘겨보고 있었다. 그 표정까지 예뻐서 미칠 것 같은데 정말 어떻게 해야 하나.

“내 약혼을 깨시겠다? 그로 인한 손해 배상은 뭐로 할래?”

이윽고 웃음기를 거둔 그가 짐짓 여유를 부리며 꺼낸 말이었다. 얄밉도록 근사한 미소가 걸린 입가를 마주한 수진이 더욱 단호하게 대꾸했다.

“이 일로 혹시 네 인생이 꼬이면, 내가 책임질게.”

“꼬인다고 해 봤자, 집안에서 쫓겨나는 정도긴 한데…… 갈 곳이 없어지면 네가 데리고 살아야 해. 괜찮겠어?”

농담처럼 한다는 말에 피식 웃어 버린 수진이 이어 짐짓 고민하는 척 팔짱을 끼며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흠, 어떡하지? 돈 많은 남자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빈털터리 남자가 감당이 될지 모르겠는데……. 뭐,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잖아. 설마 진짜 빈손으로 나오진 않을 거지?”

“우리 회장님 얄짤없으신데. 팬티 바람 아닌 게 다행일걸.”

“웬일이야. 그럼 뭐, 좁은 곳도 괜찮으면 내 집에서 잠은 재워 줄게. 대신에 살림은 나눠서 하는 거로. 아! 방세도 받을 거야. 딱 절반 잘라서.”

“그거 좋은데? 눈만 돌리면 네 얼굴 보이는 곳인데. 괜찮네, 그거.”

농담으로 받아쳤더니 정말로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남자다. 이러다 당장에라도 짐 싸 들고 쳐들어올 기세다.

“어우, 어우 정말. 남자는 애들이랑 수준이 똑같다더니. 거기서 진짜 솔깃하면 어떡해.”

정말 애 앞에선 물도 함부로 못 마신다는 걸 여기서 실감하고 있다. 정색하며 손을 내젓자 그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웃는다. 그런 남자를 보며 수진은 장난기를 지운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너한테는 더 중요하고 큰 문제라는 거 알아. 아마 이게 정말로 널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있어. 어쩌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고, 일만 더 크게 만들어 버릴 수도 있겠지. 아니, 아마 그럴 확률이 더 클 거야. 그래도…… 내가 먼저 말해 보고 싶어. 이건 연희하고 나의 문제기도 하니까.”

“괜찮겠어?”

준성이 기억하는 연희는 늘 자신만만한 사람이었다. 아버지 쪽 집안은 대대로 거대한 사학 재단을 운영해 왔고, 어머니 쪽 집안은 대대로 정치권에 몸을 담아 왔다. 뼛속까지 상류층 집안으로 그녀의 아버지가 HJ건설의 대주주 중 한 명이었다.

풍족한 환경에서 구김 없이 자란 그녀는 자연스럽게 세상의 주인공이 되었다. 가지고 싶은 건 뭐든 가질 수 있었고,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사고로 무장한 채 살아왔다. 평소엔 구김 없이 밝은 성격으로, 누구보다 관대하고 여유롭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평생을 살며 ‘안 돼.’라는 말을 몇 번이나 들어 봤을까.

단 한 번도 ‘결핍’을 경험하지 못한 연희가 과연 그녀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게 있다는 현실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니. 나 그렇겐 못 하겠는데?’

그는 이미 그 질문의 답을 눈앞에서 봤었다. 조금의 악의도 없이 순수하기까지 한 이기심에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수진은 그런 연희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지만, 그건 거슬리는 게 없었을 때의 일이었다. 필연적으로 갈등이 따를 수밖에 없는 이 상황에도 과연 그 우정이 지켜질까.

이것이 지난 며칠간 그의 머릿속을 메우고 있던 생각이었다. 선뜻 수진에게 사실을 말하지 못한 이유였다. 저도 모르게 걱정스러운 물음을 꺼내 버린 것도 그 때문이었고.

그런데 수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이야기가 잘 안 된대도 어쩔 수 없지. 그렇다고 마냥 피할 수만은 없잖아. 그건 내 우정에 대한 예의가 아닌데. 적어도 내 연애는 내가 먼저 말해 주는 게 옳아. 진짜 친구라면.”

그녀라고 겁이 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타인의 생각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소중한 사람에게서 받는 상처가 얼마나 아픈 건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럼에도 이런 말을 해낼 수 있는 건, 이 남자의 마음을 믿기 때문이었다. 제가 무슨 짓을 해도 놓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그녀의 정신과 마음을 단단히 받쳐 주고, 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는 용기를 주었다.

제게 상처를 줬던 옛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전혀 주눅 들지 않았고, 미연의 패악질 앞에서도 꿋꿋하게 할 말을 다 해냈다. 이미 그 시절의 상처는 제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누구 덕분에 하도 시달렸더니. 이제 어지간한 일로는 끄떡도 안 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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