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방 잡을까요?
71화
“마음에 드네요, 저 직원분.”
대기실의 문이 닫히자 입구를 흘낏 바라본 현규가 툭하니 말문을 텄다. 순간 한 회장의 미간이 슬쩍 모여들었지만, 때마침 자리에 앉던 정 회장이 발끈하는 통에 다른 이의 눈에는 띄지 않았다.
“에끼, 정신 나간 놈 같으니라고. 네 나이가 몇인데 저런 고운 처자한테 눈독을 들이나?”
“그런 뜻이 아니라요.”
얼토당토않은 오해를 받은 현규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오늘의 일이 난처한 것과는 별개로 참 재밌는 경험을 한 거 같습니다.”
공연을 취소하고 대기실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끈질긴 호텔 직원들에게 붙들려 한참을 설득당하고 있었다. 끝내 물리치고 문을 여는데 바깥이 소란스러워 무슨 일인가 했다. 하필 딱 그 순간 들려온 게 ‘급도 안 되는 가수’라는 말이었다.
이 나이에도 그런 말에 상처를 입는구나, 싶었다. 노년에 완고함만 늘어 더더욱 비뚤어진 마음에 그대로 호텔을 나가 버리려던 참이었다.
‘자꾸 그딴 식으로 사람한테 잣대 들이대는데, 할 거면 똑바로 하라고. 네가 함부로 깎아내린 사람이 어떤 사람일 줄 알고 그래? 타인을 깎아내리면 깎아내릴수록 결국 그 가치를 몰라보는 너만 더 우습게 보인다는 걸 왜 모르는 건데.’
그런데 들려오는 말이 걸음을 붙잡았다. 가만히 서서 더 듣다 보니, 그 말을 한 건 아쉬운 게 많은 쪽이었다. 약자임이 분명한데, 원칙과 논리로 무장해 기어이 할 말을 다 내놓고 결국 작게나마 승리를 거머쥐는 광경을 보고 나니 속이 다 후련했을 정도였다.
‘잠시 저랑 이야기 좀 하실까요?’
이미 호텔 측과 영진그룹 측의 이야기를 들으며 대략적인 그림은 그려 본 상태였으나, 잘잘못을 가린다 해서 결과가 달라질 건 없을 거라 생각했기에 입을 다물고 있던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 직원을 데리고 들어온 건 꽤나 즉흥적인 생각이었다. 왠지 치열하게 다투고 있던 이 여자라면 뭔가 더 중요한 사실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결과는 예상대로였고, 생각 이상으로 놀라웠다. 그녀는 그의 징크스는 물론, 오늘 은퇴를 마음먹었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대뜸 공연을 해 주십사 부탁을 하며 그의 길었던 음악가로서의 인생까지 언급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그 말을 듣는데, 노래만 해도 행복했던 때가 생각나더군요. 무작정 가수가 되어 보겠다고 기타 하나 들고 상경해서 겁도 없이 미군 부대 근처를 얼쩡거리던 시절이요.”
“허허, 그랬지. 고작 나이 열다섯에 미8군 클럽 무대에서 공연하던 사람이 자네 아닌가. 내가 그걸 보고 아, 요놈이 물건이구나, 싶어서 건져 냈지.”
“네. 그때 회장님이 제게 베풀어 주신 은혜는 정말 평생 못 잊을 겁니다. 그래서 더 완벽한 공연을 해 보이고 싶었던 건데…….”
씁쓸한 얼굴로 말을 줄이는 현규에게 한 회장이 다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이런 일이 벌어진 것에 책임을 통감합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아닙니다. 이미 사과도 충분히 받았고, 그 부분에 대해선 더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 회장님. 내가 보기엔 이 친구, 아까 그 직원이랑 이야기하면서 이미 마음 돌아왔어요. 너무 염려 말아요.”
정 회장이 낄낄거리며 덧붙였다. 그 말을 부정하진 않겠다는 듯 노신사의 입가로 조용한 웃음이 떠올랐다.
“아까 그 직원이 그러더군요. 긴 세월 동안 소중히 해 온 음악이 내 소중한 순간을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이상하게 그 말이 참 듣기 좋았어요. 교과서처럼 너무 뻔한 말을 하는데, 가끔은 그런 뻔한 말이 듣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차분히 운을 뗀 현규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창가에 놓인 프리지아 꽃바구니로 눈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아침 일찍 대기실로 저 꽃바구니가 배달되어 왔어요. 사무실 쪽에서 보냈다는데, 정확히 누가 보낸 줄은 몰라서 그냥 그러려니 했었죠. 그런데 이제 보니 누가 보낸 건지 알 것 같네요.”
영원한 우정과 새 출발을 응원한다는 의미를 담은 꽃말과 더불어 특유의 짙고 달콤한 향이 마음에 들어 개인적으로 즐겨 찾는 꽃이었다. 그러나 80년도 후반에 미국으로 건너가며 거의 잊힌 존재가 되어 버린 자신의 이런 취향을 누군가 알아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그의 기호를 제대로 파악하고, 그에 대한 조사까지 철저히 해 준 한 사람 외엔.
“제가 다시 무대에 서 보기로 마음먹은 건 김수진 씨 덕분입니다.”
단호하게 말을 마친 현규의 입가로 만족스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런 사소한 것까지 챙길 줄 아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 그런 실수가 나왔을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번 일은 어느 쪽의 실수인지 자명하겠지요.”
묵묵히 그 말을 듣는 한 회장의 얼굴은 여전히 굳은 채였다.
* * *
오후 3시부터 시작된 회의는 퇴근 때가 조금 지난 후에야 간신히 마무리되었다. 집무실로 돌아온 준성은 팔에 걸치고 온 재킷을 내려놓으며 넥타이를 반쯤 풀어 헤쳤다.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는 안건으로 치열한 토론이 오간 다음이라선지 먼지라도 낀 듯 목이 칼칼하고 눈은 물기 하나 없이 뻑뻑했다. 이어 종일 식사라고는 점심때 먹은 작은 샌드위치가 전부였다는 게 뒤늦게 떠올랐다.
“수고 많았어요. 프레젠테이션 자료 들어올 때까지는 더 할 일이 없을 것 같으니 일단 가서 식사부터 하고 오세요. 난 별로 생각이 없으니 신경 쓰지 마시고요.”
“아, 네. 식사야 뭐. 저도 크게 생각은 없어서…….”
뒤따라 들어와 잔뜩 들고 온 서류를 내려놓던 김 비서가 말꼬리를 흐리며 그를 바라봤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한 표정에 준성이 의아한 눈을 하자, 김 비서는 잠시 주저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늘 호텔 연회팀에서 문제가 있었는데, 회장님께서 그 자리에 나타나셔서 수습을 끝내셨다고 합니다.”
“총지배인님이 아니라 회장님께서요?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랜드볼룸에서 진행될 디너쇼 건이었는데, 가수 측에서 요구한 사항을 제대로 맞춰 주지 못했답니다. 그래서 공연을 못 하시겠다고, 이대로 취소하겠다고 나오시는 걸 간신히 붙잡아 놓은 현장에 회장님이 내려오신 거죠. 다행히도 지금은 잘 해결되어 무사히 공연을 진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어지는 말을 들으며 무심히 서류를 들추던 준성이 문득 멈칫했다. 왠지 이야기가 굉장히 낯익은 느낌이었다.
“혹시 영진그룹 건입니까?”
“네. 현장에 김수진 지배인도 함께 있었고요. 지금도 공연 현장에 함께 계시는 거로 압니다.”
역시나, 김 비서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은 이쪽이었나 보다.
바로 재킷을 집어 든 준성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잠시 본관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그동안 비서님은 잠깐 쉬고 계시든지, 식사라도 하고 오세요.”
“네, 상무님. 천천히 오셔도 됩니다.”
싱긋 웃어 보인 김 비서가 태연히 그를 배웅했다.
* * *
한바탕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현장을 맨몸으로 버틴 기분이 이럴까.
연회장 한쪽에 우두커니 선 채 무대를 바라보던 수진이 깊은숨을 내쉬었다. 유려한 피아노 연주와 함께 가슴을 적시는 열창이 이어지는 내내 현장엔 놀람 가득한 탄성과 진심 어린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 징한 우여곡절을 겪고 몸도 마음도 완전히 너덜너덜해진 상태였지만, 그런 그녀의 눈과 귀로도 쉽게 접하기 힘든 수준의 훌륭한 무대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감성적이고 아름다운 멜로디. 잔잔하지만 지루하지 않은 재즈풍 연주가 귓속으로 감겨들수록 곤두섰던 신경이 가라앉고 마음이 안정되는 게 느껴졌다. 누구 하나 이런 제 고생을 알아주는 이가 없는 것 같아 살짝 우울했었는데, 여기서 이렇게나마 위로를 받는 기분에 헛웃음이 났다.
‘괜히 회장님 픽이 아니셨네.’
뒤늦게 밝혀진 현규와 정 회장의 인연을 떠올린 수진이 새삼 소름이 끼친다는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대기실을 빠져나왔을 때, 이미 바깥세상은 충격과 혼돈 속에 휩싸여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앞을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의 틈을 비집고 나오니 저만치 떨어진 곳에 우글우글 모인 사람들이 보였다. 한창 수군거리며 대화를 나누던 직원들은 수진이 나오자 호기심 가득한 눈을 하고서 우르르 몰려들어 한마디씩 뱉어 댔다.
‘뭐예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대체 저분이 뭐 하는 분이시래요? 왜 회장님들이 이렇게 나서시는 거냐고요.’
‘우리 회장님이야 호텔 일을 전부 알고 계시니 그렇다 쳐도 영진그룹 회장님은 또 어떻게 알고 달려오신 건지…….’
일선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면 보통은 총지배인이 나서기 마련이다. 노신사의 완고함을 꺾지 못한 직원들은 결국 총지배인에게 연락을 했었다.
그런데 정작 등장한 건 총지배인이 아니라 한 회장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영진그룹의 정 회장까지 부랴부랴 달려왔으니 당연히 기함할 수밖에.
‘글쎄요. 저도 잘…….’
대기실에서의 모습을 봤을 때, 현규와 정 회장이 꽤나 친분 깊은 사이라는 건 충분히 알고도 남았지만, 일단은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한 회장이 등장한 이상, 이 건은 곱게 넘어가긴 틀린 일이 되어 버린 참이었다. 앞으로 어떤 폭풍이 몰아치게 될지, 생각만으로도 눈앞이 깜깜해서 더 이상 추리를 할 기운도 없었다.
확실히 모든 게 밝혀진 건 그로부터 이십여 분 후였다.
공연을 하기로 마음먹었다면서 리허설을 준비하겠다는 현규의 선언에 환호했던 것도 잠시.
‘감히 내가 키운 내 가수한테 그딴 식으로 소홀하게 굴어? 그것도 우리 회사에서 일한다는 놈들이 그런 짓을 해? 니들은 돈값도 못 하는 버러지들이야! 뭘 잘했다고 고개 빳빳이 쳐들고 있어!’
분기탱천한 정 회장이 언성을 높이며 등장하는 바람에 현장은 다시 폭풍 속으로 휘말렸다.
어떻게 진상을 파악한 건지, 행사를 준비한 영진그룹 측 담당자들을 몽땅 소집해 놓고 옥상에 거꾸로 매달아 버리겠다는 둥, 사옥 정문에 깔아 놓고 발닦개로 써 버리겠다는 둥, 온갖 악담을 퍼부어 대는데 옆에서 듣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릴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소문 속 기업 회장님들처럼 주먹이나 발길질이 오가진 않았다는 것 정도일까.
어쨌거나 완전히 뚜껑이 열려 버린 회장님의 화가 식을 때까지는 꽤나 시간이 걸렸다. 그 버라이어티한 욕설을 듣고 있는 사람들 중엔 아주 당연하게도 사색이 된 채 기절하기 직전인 미연이 끼어 있었다.
그렇게 소란 속에서 시작된 리허설이 무사히 끝나고,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공연이 시작되기까지, 더 이상의 문제가 생기지 않고 흘러가기를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른다. 제 공연을 앞둔 것처럼 긴장해 있느라 나중엔 근육통까지 생길 지경이었다.
그러나 정작 공연이 시작되고 나니 언제 그렇게 고통스러웠냐는 듯 마음이 평온해졌다.
본고장 스타일의 재즈와 컨트리 팝을 중심으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하며, 수많은 무대에 서 왔다는 가수는 생각 이상으로 노련한 무대 매너와 공연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런 징크스를 걱정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완벽한 무대였다.
한결 마음이 편해진 수진은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선율에 푹 젖어 들었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연주와 편안한 중저음이 만들어 내는 하모니에 종일 머릿속을 거칠게 긁어 대던 수많은 생각이 잦아들고, 황량해진 가슴속이 촉촉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선지 문득 이 노래를 혼자 듣고 있다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성이도 이 자리에 같이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럼 전화를 하지.”
순간 느슨해 있던 신경 줄이 바짝 당겨졌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끼어드는 목소리가 익숙해서 처음엔 헛것을 들은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있던 곳은 조명도 닿지 않고 지나는 사람도 없는 아주 외진 자리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여기 서 있는 제 얼굴조차 구별하기 힘들 텐데…….
“종일 전화 한 통 없기에 마음이 식었나 했더니만.”
다시 이어지는 말에 이번엔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
“다행히 그건 아닌가?”
느긋하게 휘어진 입술과 잔잔히 빛을 내는 눈동자.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나는 남자의 이목구비를 확인한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체 언제 온 걸까.
아니, 어떻게 날 찾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