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방 잡을까요?
70화
“아무래도 일이 커지겠는데요. 지금 짐 챙겨 들고 나오시는 걸 한 지배인님이랑 박 매니저님이 간신히 사정사정하면서 붙잡고 계시는데…….”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더 들을 것도 없었다. 무섭도록 차가운 눈으로 미연을 쏘아본 수진이 그녀를 붙잡은 손에 더욱 힘을 줬다.
“따라와요. 그렇게 손 놓고 있지 말고, 지금 당장 나랑 같이 가서 사과부터 드려요.”
“아! 아프잖아! 뭐야 진짜? 내가 왜?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사과를……! 잠깐, 아, 야! 무슨 계집애가 힘이 이렇게 세! 놔, 이거 놓으라고!”
얼결에 대기실 근처까지 질질 끌려온 미연은 뒤늦게 저를 흘깃거리는 사람들을 발견하고서 황급히 손을 뿌리쳤다.
“너 뭐야? 미쳤어? 이게 뭐 하는 짓인데?”
주변 시선을 의식한 듯 살짝 목소리를 낮춘 미연이 눈을 부릅떴다.
“그쪽 회사 일이고, 우리 행사에 초대되신 분이에요. 어느 쪽이 실수를 했든지, 일단은 담당자로서 신경 쓰지 못한 부분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라도 느껴야 하지 않아요?”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데? 그리고 말이야 바른말이지, 그깟 식사 메뉴 좀 맘에 안 들었다고 공연이고 뭐고 때려치우겠다는 사람은 어디 정상이고?”
“아니요, 그건 정당한 요구였죠. 처음부터 제대로만 신경 썼으면 아무 문제 없었을 일이고요. 그리고 설령 우리 쪽에서 실수가 있었다 해도, 일단은 그쪽에서 섭외한 가수분이세요. 그럼 적어도 담당자인 김가연 씨는 마지막까지 신경 쓰고 체크했었어야 하는 부분 아닌가요?”
“허! 기가 막혀서 진짜. 야, 나도 바쁜 사람이야. 그럴 시간 없다고. 급도 안 되는 가수 데려다가 이런 무대 기획한 것도 이해가 안 가는 마당에 내가 그런 투정까지 다 맞춰 줘야 해? 막말로 저 사람이 누군데 그렇게까지……!”
“야. 김미연. 작작 좀 해.”
파르르 떨어 가며 오만한 소리를 지껄여 대던 미연이 순간 벙찐 듯 입을 벌렸다.
“뭐? 너 지금 나한테 그런 거야?”
“어. 너 들으라고 하는 말이니까 잘 들어. 자꾸 그딴 식으로 사람한테 잣대 들이대는데, 할 거면 똑바로 하라고. 네가 함부로 깎아내린 사람이 어떤 사람일 줄 알고 그래? 타인을 깎아내리면 깎아내릴수록 결국 그 가치를 몰라보는 너만 더 우습게 보인다는 걸 왜 모르는 건데. 넌 사회생활한다는 애가 그런 것도 몰라서 지금 나한테 이런 소리나 듣고 있니?”
“허, 허허…… 와 너, 너 지금……. 하, 어이가 없어서 진짜. 너야말로 지금 거래사 직원한테 그딴 식으로 말해도 돼?”
“뭐. 반말이 문제야? 네가 너무 자연스럽게 말 놓길래 친구 모드로 편하게 얘기하자는 줄 알고 나도 말 좀 놓았는데 문제 있어?”
“이게 진짜 얻다 대고……! 너 내가 계약 끊어 버릴 거야! 너희 호텔이랑 거래 안 한다고!”
너무도 속이 빤한 대응에 수진은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좋을 대로 해. 단, 그것도 너희 회사 내에서 절차 밟아야 하는 건 알고 있지? 꼭 바꿔야 할 이유가 뭔지 제대로 보고 못 하면 타 업체와의 리베이트 건으로 조사당할 수 있다는 것도.”
차분히 내놓은 말에 미연이 멈칫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너 K 호텔 숙박권이랑 레스토랑 식사권 나오는 거 참 열심히도 썼더라. 이틀 전엔 부산 지점에도 다녀오고. 아, 강원도 어디 리조트에도 다녀오셨던가?”
“너, 너 뭐야? 지금 사람 뒷조사까지 했어?”
“네 개인 정보를 지키고 싶었으면 SNS를 하질 말았어야지. 인스타 알림으로 다 뜨는데. 보기엔 좋더라. 사진도 잘 찍었고. 네가 우리랑 거래를 끊자고 했을 때도 과연 너희 회사에서 그걸 문제없다고 판단해 줄지는 모르겠다만.”
“이……!”
“아, 그리고 내가 을이라고 해서 네가 저지른 부당한 짓까지 다 받아 줄 거라 생각하지 마. 너랑 나는 업무적 협력 관계에 있는 거지, 상하 수직 관계가 아니야. 착각하지 말라고.”
조목조목 집어 내는 말에 미연은 분해 죽겠다는 얼굴로 이를 갈았다. 그러면서도 더 할 말은 찾지 못한 듯 입만 벙긋거렸다. 이렇게 말을 해 봤자 반성할 사람도 아니지만, 연회팀의 수고를 짓밟은 것에 대한 소심한 분풀이 정도는 될 것이다.
그런데 정작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기묘한 분위기에 뭔가 잘못되었구나 싶어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을 때였다.
“아…….”
언제부터 나와 있었던 건지. 한 지배인과 박 매니저의 뒤로 이제 노년에 접어드는 듯 희끗한 머리의 남자와 그의 매니저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황한 수진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 지그시 그녀를 굽어보던 흰머리의 남자가 차분히 말했다.
“두 분 이야기 끝났으면, 잠시 저랑 이야기 좀 하실까요?”
두 남자와 함께 들어선 대기실은 어둡고 조용한 분위기였다. 프리지아 향이 은은하게 풍기는 룸의 안쪽엔 폭신한 소파 세트가 놓여 있었고, 커다란 가방이며 작은 행거 외엔 짐이 없어 꽤 휑한 느낌이었다. 그나마 그런 느낌을 중화하는 건 창가에 놓인 커다란 프리지아 꽃바구니였다.
앞장선 매니저가 남자를 소파로 이끄는 사이 꽃바구니를 잠시 바라보고 있던 수진은 이내 자리에 앉는 남자를 향해 다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영업부 소속 판촉팀에서 영진그룹을 담당하고 있는 김수진 지배인이라고 합니다.”
“아, 기억나네요. 몇 번 메일을 통해 이야기했었죠. 내가 그 이현규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내가 어지간히 속을 썩이게 했던 것 같은데.”
피아노 건을 해결할 때의 이야기였다. 차마 그렇다는 내색은 못 하니 ‘아닙니다.’라고만 대꾸하고 입을 다물고 있자 남자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수진을 바라봤다.
“무슨 일인지. 밖에서 하는 이야기가 다 들리더군요.”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무례한 소리를 듣게 만들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사실 틀린 이야기도 아니고. 이제 이 나라에선 내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니 당연한 반응이겠죠. 사과를 받자고 한 말이 아니라, 그냥 궁금해지더군요. 이렇게 큰 목소리로 잘잘못을 따져 대는 이가 있는데 왜 그런 실수가 나온 건지.”
“…….”
“게다가 영진그룹 쪽과 호텔 쪽의 이야기가 다르던데. 한쪽은 책임은커녕 남 탓만 하고 있고, 한쪽은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는 것도 좀 의아하던 참이었어요.”
“당연히 저희가 맡아 책임질 일입니다. 이 일에 대해 저희가 어떻게 보상을 해 드려야 할지…….”
“보상을 바라는 게 아니에요. 그저 마음이 무거울 뿐이죠. 안타깝지만, 이대로는 무대에 설 수가 없는 상황이라서.”
“알고 있습니다. 오늘이 선생님께 아주 중요한 날이라는 것도요.”
“알고 있다고요?”
의아한 듯 되묻는 남자의 앞에서 잠시 망설이던 수진이 곧 입을 열었다.
“오늘 공연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현규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 이내 심각해지려는 표정을 읽어 낸 수진이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 어쩌다 보니 알게 되었지만 외부에 알리고 싶어 하지 않으신 듯해서 저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어쨌거나 맞아요. 내 오랜 친구 앞에서 마지막 무대를 보여 주고 조용히 은퇴할 생각이었죠. 결과는 이 모양이 되었지만.”
회한 어린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60년대 초, 미8군 클럽에서 활동하다 가수로 데뷔한 이후 지금까지, 무려 60년 가까이 음악과 함께한 삶이었다. 인기는 찰나였지만, 긴 시간 원 없이 하고 싶은 노래를 할 수 있었다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더는 무대에 서는 것조차 버거운 나이라서 마지막 기운이 남아 있을 때 최고의 공연을 선보이려 했는데, 엉뚱한 이유로 그 기회를 놓아야 한다는 게 그저 아쉬울 뿐이었다.
“저, 이번 공연 그대로 진행해 주시면 안 될까요?”
조심스럽게 이어진 말에 현규의 무뚝뚝한 시선이 수진의 얼굴을 향했다.
“무책임한 말인 거 압니다. 하지만 이렇게 공연을 중단하신다면 후에 더욱 후회가 크실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선생님께서 잘 극복해 내실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나도 날 못 믿어서 이런 징크스에 묶여 살았는데, 김수진 지배인이 나의 뭘 보고 믿겠다는 말입니까?”
살짝 날이 선 물음에 수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곧 진지한 눈으로 현규를 바라봤다.
“지금껏 음악을 해 오신 세월이요. 긴 세월 소중히 해 오신 음악이 선생님의 소중한 순간을 배신할 것 같진 않아서입니다.”
현규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묵묵히 뭔가를 생각하던 그가 이내 제 옆에 선 남자를 흘깃 바라봤다. 고민의 기색이 역력한 얼굴에 살짝 희망을 품었을 때였다.
갑자기 대기실의 문이 열리더니 검은 정장 차림의 남자들이 우르르 밀려 들어왔다. 어쩐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게 대략 좋지 않은 예감이다 생각한 순간,
“현규야, 이놈아.”
불쑥 그 틈으로 나타난 나이 지긋한 남자가 대뜸 내놓는 소리에 수진은 경악하며 눈을 크게 떴다. 심지어 싱긋 웃음을 머금은 현규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 말은 더욱 가관이었다.
“아니, 회장님께서 이 누추한 곳까진 어인 행차십니까?”
“어쩐 일이긴. 현규 네놈이 그깟 문어 쪼가리 하나 입에 넣었다고 노래를 안 불러 주겠다는데 내가 가만히 앉아 있으리?”
“문어가 아니라 새우였어요.”
“뭐든 간에! 오랜만에 네놈 노래나 한 자락 들어 보자 했더니만 사내놈이 되어선 그런 일로 도망을 가?”
“아직 안 갔소. 하여간 회장님은 그 나이에도 참 여전하시구려.”
너무 뜻밖의 인물이 등장하는 바람에 수진은 진심으로 당황해 버렸다. 설마 그 친구라는 분이 영진그룹 회장이었나. 생각만으로도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이런 날 기업의 중요한 행사에 초청을 받은 가수기에 제가 모르는 사연이 있을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했지만, 그게 그룹 회장과의 인연이라니.
일단 입구 근처로 물러나긴 했지만, 인사말을 건네기도, 그냥 빠져나가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어쩌나 고민하며 잠시 그 자리에 굳은 사이, 또다시 누군가가 불쑥 대기실로 들어섰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확인하려다 차가운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한 회장을 발견한 순간 수진은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누구?”
“아, 판촉팀 김수진 주임입니다.”
“영업부 직원이 왜 여기에 있는 거죠? 김수진 씨가 있을 자리는 아닌 것 같은데.”
“저희 쪽 실수가 확인된 게 있어 사과드리러 왔습니다.”
“그건 연회팀에서 해결할 일이지, 김수진 씨가 할 일은 아닙니다. 주제넘게 나서지 말고 본인 자리나 지키세요.”
“죄송합니다.”
누구의 안전이라고 감히 맞설 수 있을까. 칼날처럼 내리박히는 한 회장의 말에 수진은 뭔가 더 설명하는 대신 깍듯한 사과만 남기고는 서둘러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수진을 휙 하니 지나친 한 회장이 현규에게 정중히 말을 건넸다.
“소식이 늦어 이제야 도착했습니다. 큰일을 앞두고 저희 실수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어 송구합니다. 정 회장님께도 심려를 끼쳐 드렸네요.”
“아닙니다. 일은 이렇게 되었지만, 이미 충분히 사과받았고…….”
자연스럽게 대화가 오가는 사이 수진은 서둘러 그 자리를 물러 나왔다. 고래 사이에 낀 새우의 기분이 어떤 건지 아주 절실히 알아 버린 순간이었다.